아이를 가르친다는 건, 두 사람의 욕망 사이를 걷는 일이다.
원래 나의 계획은 성인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었다.
자기가 원해서, 자신의 돈을 지불하고, 자신이 직접 행하는 수업.
그러나, 상황이 녹록치 않아 아이들 수업을 열게 되었다.
매번 마뜩치가 않았다. 나는 아이들을 받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을 받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단순했다.
보통 아이들의 경우,
그 수업을 ‘원하는’ 사람은 부모고,
실제로 수업을 ‘받는’ 사람은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건 생각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욕망하는 자와 행하는 자가 다르다는 뜻이 된다.
결국 나는 한 명을 수업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두 사람을 상대하고 있는 셈이다.
욕망하는 자와 행하는 자.
그리고 이 구조는 종종, 예상보다 훨씬 피로하다.
아이들은 왜 와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가.
그들의 의지인가?
아니면 그들 뒤에 서 있는 부모의 의지인가?
프랑스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 라캉은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라고 했다.
아이가 지금 이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
자신의 내면에서 비롯된 욕망이 아니라,
부모의 기대와 판단에서 비롯되었다면
그는 주체로서의 자리를 내어주고
타인의 욕망을 수행하는 객체가 되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서 나는 가끔,
깊은 무기력이나 정체불명의 저항을 느낀다.
그건 그 아이가 나쁜 게 아니다.
그저, 그의 삶이 아직 그 자신의 것이 아닌 채로
이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이다.
유명한 사회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에리히 프롬은 말했다.
"사람은 자유로부터 도피한다"고.
자신의 욕망을 선택하고 책임지는 삶은
생각보다 두렵고 불안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타인의 욕망에 기대어 살아간다.
아이들 역시,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부모의 기대와 사회의 기준 속에서
‘좋은 아이’의 역할에 스며들어 버리기도 한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이를
“그저 그렇게들 사는(Das Man)” 존재라 부른다.
본래적인 존재가 아니라,
타인들의 시선과 방식 속에 편입된 삶.
그저 앉아 있기 위해 앉아 있는 아이들 속에서
나는 문득 그런 구조를 본다.
현대 심리학에서는 이걸
내적 동기와 외적 동기의 불일치라 설명한다.
내적 동기 없이 시작한 배움은
의미도, 지속력도 떨어진다.
자기 효능감은커녕,
배움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만 남을 수도 있다.
그러니 이 구조 속에서 고통스러운 건,
가르치는 나만이 아니다.
그 아이 또한,
자신의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아 있는 고통을
매 순간 감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심스럽게 묻는다.
이 수업은 누구의 것인가.
누구의 욕망인가.
그리고 그 욕망은,
지금 이 아이의 삶을 정말 기쁘게 하는가.
� 이 글은 브런치 매거진 「경계의 심리학」에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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