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재를 지우는 사회에서, 경계를 다시 묻다
요즘처럼 콘텐츠가 넘쳐나는 시대는 없다.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결과물을 쉽게 소비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시대에 저작권은 점점 가벼워진다.
“좋아서 퍼왔어요.”
“출처는 기억 안 나요.”
“좋은 건 같이 봐야죠.”
이런 말들과 함께 누군가의 문장과 이미지, 리듬과 감정이 출처 없이 캡처되어 타인의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일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법적으로는 저작권 보호가 강화되고 있지만, 사회적 감수성은 오히려 약해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창작물의 경계가 흐려지고 창작자의 존재가 가벼워지는 풍경 한가운데 서 있다.
우리는 남의 물건을 허락 없이 가져가면 ‘침입’이나 ‘절도’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남의 글이나 이미지, 생각을 가져가는 일에는 그만큼 민감하지 않다. 왜일까? 디지털이니까. 복제가 쉬우니까. 우리는 타인의 언어와 창작을 ‘좋아서’, ‘공유하고 싶어서’라는 말로 너무 쉽게 가져온다.
그러나 창작물은 단지 정보가 아니다. 그 안에는 누군가의 시간, 감정, 존재가 통과한 흔적이 있다. 그 경계가 무너질 때, 우리는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의도치 않게 ‘존재의 침범’을 시작하게 된다.
저작권은 단지 법률 조항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창작자라는 한 인간의 존재적 경계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다. 블로그 글, 수업 자료, 영상, 음악 등 타인의 표현물을 출처 없이 가져가고 문제 제기를 받으면 돌아오는 말.
“좋아서 퍼왔을 뿐인데요.”
의도가 좋으면 괜찮다는 생각. 그 생각은 침범을 무례가 아닌 ‘공유’로 포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을 지우고, 맥락을 지우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투명하게 만드는 존재 삭제의 방식이다.
오늘날 AI 기술은 이 경계 붕괴를 가속화한다. 번역, 요약, 이미지 생성은 창작자의 맥락과 감정을 제거하고 결과물만 남긴다. 그리고 그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것처럼 소비된다.
문제는 기술 자체가 아니다. 이미 우리는 ‘출처 없는 공유’에 익숙해진 사회에 살고 있고, 존재보다 효율을 중시하는 문화가 그 기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기술보다 먼저 회복되어야 할 것은 감수성이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함께 쓰는 것’을 미덕처럼 여겨왔다. 가족, 학교, 조직 안에서 타인의 것을 함께 쓰는 것이 친밀함의 표현이 되었고, 그런 문화는 창작물조차 “좋은 거니까 같이 쓰자”는 말로 너무 쉽게 넘겨버리게 만들었다.
더구나 유교적 가족주의와 정서적 유착은 타인의 삶에 개입하는 것을 ‘사랑’이나 ‘관심’으로 정당화해 왔다. “이건 다 너를 위해서야.” 그 말 아래, 상대의 감정과 선택을 묻지 않는 침범은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이런 경계 무시의 태도는 어릴 적부터 학습된다. 부모의 감정을 대신 떠안고 살아온 아이, 골든차일드. 그 아이는 자신의 욕구보다 타인의 기대를 먼저 고려하며, 경계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다.
그렇게 감정의 경계를 허물며 자란 사람은 훗날 타인의 창작물조차 ‘좋은 거니까 함께 써도 된다’고 착각하게 된다. 경계를 잃은 문화는 결국, 존재를 잃은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저작권 침해는 단순한 윤리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타인을 수단화하지 않는 감수성, ‘좋은 의도’라는 말로 침범을 정당화하지 않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타인의 표현은 타인의 것이다. 그 문장과 이미지, 리듬과 감정은 그 사람만의 삶이 통과한 흔적이다.
우리는 각자의 고유한 색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 창작은 혼자 하는 일이지만, 창작이 존중받는 건강한 사회는 서로의 경계를 지키며, 고유한 색을 흐리지 않는 연대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그 태도야말로,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인간만의 감수성이며, 존재를 향한 존중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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