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한국어 선생님

"미안하지만 네가 따라가기는 힘들 것 같은데"

by 김태강

오늘은 회사 관련 콘텐츠를 적으려다가 예전부터 적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어서 다시 한번 끄적끄적 됩니다.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신 분들 중 평소에 독서는 어떻게 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이 가끔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 고민해보다가 적어보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이렇게 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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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국어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한 분 밖에 계시지 않는다. 초등학교 졸업 전 유학을 갔기 때문에 우선 영어를 터득하기 급급했고 자연스럽게 한국어는 공부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하여 다양한 콘텐츠를 접할 수 있었던 시기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필자가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은 아니다) 주변에 한국 학생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유학 전 한국어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만 해도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나름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던 중 우리는 12학년 과목 선정을 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영국 교육 과정 중 하나인 International Baccalaureate이라는 프로그램의 경우 학생이 직접 여섯 과목을 선택한다. 그런데 그 시기 마침 학교에 한국어 선생님이 초빙되어 오셨고 자연스럽게 동년배 한국 친구들은 한국어를 듣기로 하였다. 필자 역시 크게 자신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배우지 못했던 한국어를 다시 한번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과목 선택을 했다.


새로 오신 한국어 선생님은 차가운 분이셨다. 평소에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조용하게 다니시는 편이셨다. 기왕 다음 학기부터 한국어를 듣기로 했으므로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서로 소개를 하고 이야기를 하던 중 선생님은 "그럼 다들 한국에서는 몇 학년까지 하다가 왔지?"라고 물으셨다. 다른 친구들의 경우 중학교 3학년 혹은 고등학교 1학년까지 공부를 하다가 왔기 때문에 한국 문학 역시 잘 아는 편이었고 필자의 경우 초등학교 6학년 1학기가 마지막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순간 표정이 썩 좋지 않으셨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약간의 고민을 하시더니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무래도 네가 이해하기에는 과목이 좀 어려울 수 있어.
차라리 다른 과목을 해보는 게 어떻겠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이때가 아니면 제대로 한국어를 배워볼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대학을 외국으로 갈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물론 나중에 어학당을 다니며 한국어를 배울 수 있겠지만 필자의 경우 고등학교 정규 과목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싶었다. 무슨 배짱이었을까. 선생님께 단도직입적으로 "저는 꼭 배우고 싶습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약간의 미소와 함께 "쉽지는 않을 테니 이번 방학에 많은 책을 읽고 오렴"이라고 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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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필자는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 소년이 아니었다.

책보다는 영상을 좋아했고 굳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만화책을 꺼내 들었다. 최대한 양보해서 읽은 책들이 <먼 나라 이웃나라>와 <그리스 로마 신화> 등으로 항상 필자의 책에는 그림이 있었다. 집에 수많은 책들이 있었지만 관심 가는 책이 없었다. 대신 만화책이라면 환장했던 그런 아이 었다. 어른이 돼서 만났던 초등학교 동창은 "예전에 너 반 가장 뒷자리에 앉아서 수업 내내 만화책만 읽었잖아. 기억나, 너 가방에는 만화책밖에 없었어"이라고 말해줬다. 돌이켜보면 그랬던 것 같다. 학교가 끝나고 나면 만화방에 가서 어린 필자는 30분 동안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과연 오늘은 어떤 것을 읽어야 잘 읽었다고 소문이 날까... 순정, 액션, 학원물 등 가리는 것 없이 집히는 대로 대여를 했고 집에 돌아와 저녁 먹기 전까지 만화책을 읽었고 저녁을 먹고 나서도 만화책을 읽었다. 평균 하루 10권 정도 초등학교 3, 4학년 내내 읽었으니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말을 안 해도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기한 것은 생각보다 만화책을 통해서 배우는 것도 많았다. 분명한 교훈이 있었고 의미 있는 내용을 읽다 보면 잠시 책을 덮고 많은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어린 필자에게 있어서 독서란 침대에 누워서 하루 종일 만화책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 아이가 유학을 갔다가 다시 제대로 된 글을 읽으려고 하니 얼마나 곤혹이었을까.

12학년 전 여름방학은 길었다. 약 2달 정도의 시간을 갖게 되는데 필자는 한국으로 돌아와 집에 머무르며 어떻게 독서를 해야 할지에 대해서 깊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어떤 책으로 시작해야 할지도 몰랐고 목표를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깊은 고민 끝에 무식해서 용감했던 필자는 나름 공격적인 계획을 세웠다. 방학이 끝나는 날까지 하루에 한 권의 책을 읽겠다. 책의 두께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무리 억지로 읽더라도 각 책마다 배움을 얻으려고 노력하자!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집에 있는 책들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읽은 한국어 책을 기억도 못 하는 중학생에게 집에 있는 책들은 너무 어려웠다. 대부분 부모님 책이거나 초등학생 때 산 책들이었기에 딱히 잡히는 게 없었다. 많은 고민을 해봤지만 시작부터 너무 어려운 책을 읽으면 쉽게 포기할 것 같아서 결국 초등학생 권장 도서를 집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아 글을 읽기 시작하는데 10분도 되지 않아서 끝없는 하품이 나왔고 멀리서 들려오는 라디오 소리가 어찌나 흥미로운지 모른다. 이와 같이 독서의 습관을 들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가만히 앉아 한 장을 넘겨도 백 장이 더 있었고 아무리 읽어도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첫날은 약 150장 정도의 글을 꾸역꾸역 읽었고 그래도 뭔가를 해내었다는 성취감에 하루를 마무리했다. 하지만 다음 날 역시 책을 선정하여 따듯한 차와 함께 하루를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을까. 생각보다 글을 읽는 속도는 빨라졌고 읽는 책 역시 다양해졌다. 자연스럽게 300장이 넘는 책들을 골라서 읽게 되었고 낮에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게 꽤나 힐링되는 시간이었다. 여기서 참 신기한 점이 있었다. 책을 읽으며 얻게 되는 지식은 꼭 그 주 중 사용할 일이 있었다. 예를 들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비슷한 내용이 거론되기도 하였고 뉴스를 보고 있는데 해당 내용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 점이 참 신기하기도 하였는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평소에 관심두지 않았던 분야를 바라볼 수 있는 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책에는 수많은 지식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지식을 얻게 됨과 동시에 거기서 파생되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책에서 A라고 말하게 된다면 왜 우리는 꼭 A일까? B라는 의문을 던져볼 수도 있는 것이고. 소설책을 읽다 보면 주인공이 처한 상태를 혼자 상상해보는 일 역시 생각보다 재밌었다. 친구들 중 해리포터와 같은 영화를 보고 "책이 역시 더 재밌었어"라는 말을 했을 때 그게 무슨 뜻인가 했는데 본인이 상상하며 그리는 게 얼마나 재밌는 일인지 이때 느껴본 것이다. 만화가가 그려놓은 캐릭터가 아닌 상상 속에서 주인공의 모습을 그려나가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멋지고 재밌는 일이었다. 강제적으로 글을 읽기 시작했지만 어느 시간이 지나자 꽤나 자연스럽게 책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약속이 있어서 그 날 책을 다 못 읽었을 경우 밤을 새워서라도 책을 끝내야만 했다. 그렇게 본인과의 약속을 한 지 2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개학과 동시에 한국어 과목을 듣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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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수업은 선생님이 겁을 주신 것만큼 어렵지 않았다. 한국어 문학을 배우는 것이었는데 여름 내내 했던 것과 같이 두꺼운 책들을 읽으며 본인의 생각을 글로 적어오는 게 숙제였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들이 <제인 에어>, <테스>, <난쏘공> 등 꽤나 잘 알려져 있는 글들을 읽고 친구들과 토론을 하는 것들은 참 재미있었다. 작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이 글을 적었고, 이 글이 적힌 시기에는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 배우니 단순하게 글만 읽고 상상하는 것이 아닌 더 많은 지식들을 배울 수 있었다. 선생님 역시 생각 이상으로 잘 따라오는 필자에게 어떻게 공부했냐고 물어보셨고, 읽었던 책들에 대한 노트를 보여드리며 "책 읽기 싫어하는 학생"에서 "그래도 잡히면 책을 읽는 학생"이 되었다며 자신 있게 말씀드렸다. 나름 열심히 한 모습이 기특했는지 선생님 역시 많은 신경을 써주셨다. 필자가 제출한 숙제에 코멘트들을 산더미처럼 남겨주시며 (문법, 받아쓰기 등 다수의 지적을 받았다)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지 도움을 주셨고, 수업이 끝나도 남아서 어떤 식으로 더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자주 말씀해주시고는 하셨다. 또한 토론을 준비하던 중 다른 친구들에 비해서 많이 부족했던 내 노트를 보시고는 방과 후 간단한 과외도 해주시며 응원해주셨던 분이셨다. 지금 생각해도 선생님 덕분에 그 당시가 일생 한국어를 가장 잘하는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차가운 줄만 알고 있던 선생님은 학생들에 대한 사려가 깊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았고 추후에는 식사도 같이 하고, 셀카도 찍으며 장난을 치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필자는 선생님 덕분에 가장 높은 점수인 A7을 받으며 졸업할 수 있었다. 덕분에 어디 가서 "유학생이라서 한국말 잘 못해요"라며 어눌하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실제로 삼성에 입사하자 다들 "유학생인데 왜 이리 한국말을 잘해?"라며 칭찬해주셨고, 어느덧 시간이 지나니 학력 위조한 게 아니냐며 필자를 의심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하다. 만약 선생님을 처음 마주했던 그 순간에 "아무래도 한국어를 잘 못하니 오히려 반에 폐를 끼칠 수 있겠네요" 라며 다른 과목을 골랐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책을 읽으면서 얻게 되는 즐거움을 평생 알지 못했을 수도 있고, 한국 기업에 취직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 당시 선생님이 수업을 듣지 못하게 하셨다면 아마 브런치에 글을 적는 일도 안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졸업 후 크리스마스나 특별한 날이면 선생님께 안부 연락을 드리고는 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께서 다른 나라로 이동하신 후 연락이 닿은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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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스탠퍼드 연설 중 언급되는 Connect the dot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스티브 잡스의 경우 대학시절 본인이 배웠던 '서체' 수업이 나중에 맥 컴퓨터에 멋진 서체들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그는 "여러분들은 현재가 미래와 어떻게든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가 미래로 연결된다는 믿음이 여러분의 가슴을 따라 살아갈 자신감을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이유 없이 신청했던 한국어 수업이 추후 내가 살아가는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 모른다. 학점을 위해서라면 다른 수업을 선택하는 게 맞았지만 이유 없이 "듣고 싶었던 과목"이었다. 덕분에 무모하게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 경험들을 통해서 얻은 것들은 지금의 내 인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고 믿는다. 이러한 경험을 해보니 가끔 지금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확신이 들지 않을때 분명히 지금의 경험도 언젠가 미래에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자신감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어린 친구들이 "정말 독서를 많이 해야 하나요?"라고 질문한다면 필자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책을 안 읽는다고 무시당할 일은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책에서 얻는 재미를 모르고 사는 것도 꽤나 불쌍한 일이죠". 물론 지금도 필자는 책 보다 영상이 더 좋다. 하지만 시간이 있을 때 항상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런 노력을 하는 이유는 대학교 이후로 참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 독서하는 사람들이 크게 도드라진다는 것을 많이 느꼈다. 그들은 책을 통해서 더 많은 지식을 얻기도 하지만 그보다 본인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표현하는데 능하다. 수많은 지식과 내용들을 접하면서 본인만의 확실한 견해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고, 이런 사람들을 보며 나도 조금만 더 일찍 책 읽는 재미를 알았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또한 이런 생각도 했다. 사람은 영상을 통해서 간접적인 체험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은 간접적인 체험을 뛰어넘어 직접적인 체험을 한 것과 동일한 경험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체험이란 물리적인 경험도 있겠지만 그 중 생각들이나 그 후 깨닫는 내용들이 대부분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생각을 유도하는 책을 통해서 어느정도의 직접적 체험을 하는건 어떨까.


물론 회사를 다니며 독서하기는 쉽지 않다. 퇴근 후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는 것만큼 행복한 순간도 없다. 하지만 또 다른 즐거움을 찾아 주말에 서점에 다녀와보는 것은 어떨까. 책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보면 본인 취향의 책을 찾게 되고 어느 순간 계산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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