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입니다. 다시 올리세요"
최근 이메일로 삼성과 아마존 사내 결재 방식에 대한 질문을 주신 분이 계셔서 이번 편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드라마 <미생>을 보면 입사 초기 상신한 결재가 반려되고 문제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신입사원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이와 같이 회사 생활에 있어서 결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비슷하지만 다른 두 회사를 경험하며 느낀 결재 시스템의 장단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다시 작성해서 오세요.
신입사원 시절 선배와 함께 결재를 받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삼성의 결재는 대부분 이메일을 통해서 진행됐지만, 신규 제품 테스트 전 받아야 하는 결재는 인쇄한 서류를 들고 해당 공정 담당자를 만나 직접 친필 사인을 받아야만 했었다. 때는 무더운 여름날, 선배와 함께 사무실에서 꽤나 떨어진 건물에서 근무하는 공정 담당자를 만나러 갔다. 선배는 "결재는 이렇게 받는 거야"라는 당당한 모습으로 서류를 건넸지만 1분도 지나지 않아서 반려를 받았다. 담당자는 결재 서류의 형식이 옳지 않다며 사무실로 돌아가 재출력 해오기를 요청했다. 햇살이 뜨거웠던 그 길을 돌아가며 헛고생을 시키는 것이 미안했는지 선배는 머쓱한 표정과 함께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두 번의 반려가 있었고, 정확한 이유 없이 돌아오는 반려 서류에 착한 그 선배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필자의 경우 그 당시 뭐가 뭔지 몰랐던 신입사원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담당자의 반려는 그냥 기분 탓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담당자와 친했던 다른 선배와 함께 결재를 받으러 갈 일이 있었는데, 준비가 훨씬 부족했던 결재 서류와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우리를 헛고생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업무가 손에 익은 후 필자 역시 결재를 받으러 다녔다. 그리고 그 공정 담당자는 매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트집을 잡았고 다시 한번 출력해오기를 요청했다. 과거에 승인받은 서류와 같은 형식으로 서류를 작성해도 형식에 문제가 있다고 했고, 3번의 재출력을 해오면 어쩔 수 없이 해준다는 표정으로 승인을 내줬다. 결국 해당 공정 담당자에게 결재를 받는 일은 우리 부서원들이 가장 꺼려하는 일 중 하나였는데, 알고 보니 이 사람은 우리와 "기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게 어이가 없어 하루는 커피를 사들고 그 사람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리고 결재 서류들을 반려하는 정확한 이유를 알려달라고 요청했고, 그 사람이 알려준 형식과 프로세스를 구체적으로 적어 숙지했다. 그리고 그 후 결재를 받으러 갈 때마다 그 노트를 펼치며 "담당자님이 요청하신 형식에서 벗어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왜 반려하시는 거죠?"라며 따지기 시작했고, 그렇게 몇 번의 마찰이 있고 난 후 더 이상 헛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다. 물론 이 사람은 정말 특이한 케이스였다. 그 사람의 후임으로 오신 분은 서로 도와주며 일해야 한다며 누구보다 열린 마음으로 우리를 대해주셨던 분이셨다.
하지만 이 이상한 "기싸움"에서 결재에 대한 큰 배움이 있었다. 이는 필자의 습관이 되었는데 결재와 같이 정해진 형식이 있을 경우, 담당자를 앉혀놓고 수많은 질문을 통하여 형식을 완벽하게 숙지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이 결재를 앞으로 당신에게 꾸준하게 받을 것인데 원하는 포맷이 있는지 또한 정해진 프로세스는 없는지를 사전에 물어봐서 반려당할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용 때문에 반려를 받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만, 결재자가 원하는 포맷이 아니거나 프로세스를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려를 받는 것만큼 시간과 에너지 낭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근 아마존에서 신규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타 부서와 처음 진행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사전에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부서와 이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처음이다. 근데 나는 정확한 프로세스를 모른다. 지금 A, B, C를 준비하고 있는데 혹시 부족한 게 있는가. 그리고 만약 X를 하고 Y를 전달하면 그게 끝인가? 너네 팀이 원하는 프로세스가 있다면 지금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다"라며 많은 질문을 던졌다. 이렇게 일을 진행하기 전 상대방의 프로세스를 확실하게 숙지한다면 나중에 헛수고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다.
삼성에서 모든 일은 결재를 통해서 이뤄졌다.
신규 제품 프로토타입 개발은 상사의 승인과 타 부서의 합의가 없다면 시작할 수 없었다. 비품 혹은 제품 실험에 사용되는 부품에 대한 구매 역시 부장님의 합의가 필요했었다. 그렇다. 이와 같이 우리는 결재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특히 삼성은 모든 결정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탑 다운 조직 구조를 갖고 있는데, 이러한 조직 구조에 맞게 결재 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재 시스템에 장점은 무엇이 있을까? 우선 어떤 업무를 진행하기 전 상사가 다시 한번 내용을 확인해주고 승인하기에 업의 질을 향상 시킬 수 있다 (물론 결재권자가 서류를 자세히 읽는다는 가정하에). 연구개발팀에 있었던 필자의 경우 제품 테스트에 있어서 결재를 통한 상사들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고 덕분에 필자가 놓치는 부분들 역시 다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다른 장점으로 결재를 통하여 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필자가 속해 있었던 부품 사업에서 품질 문제는 회사의 이미지와 직결되어 있다. 불량 제품이 발생할 경우 거래처를 잃을 수 있음으로 실수를 최소화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또한 실수는 한번 발생하면 엎질러진 물과 같아 다시 담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양한 사람들이 결재 시스템을 통하여 확인을 함으로써 실수를 줄일 수 있다.
허나 결재 시스템에서 오는 단점들도 있다. 직장인이라면 형식상 결재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며칠 동안 아무 진전이 없었던 적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결재 확인 요청을 하면 "제가 일이 너무 많습니다. 결재는 순서대로 하고 있으니 기다리세요"라는 답을 매번 얻었고, 굳이 이런 작은 결정에도 결재가 필요하나 그리고 이런 작은 일도 내가 직접 결정할 수 없다는 것이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또한 결재권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불필요한 형식들이 생겼다. 그렇게 흔한 경우는 아니었지만 모 부장님은 결재 이메일에 파워포인트를 첨부해야 하는 경우 특정 폰트를 쓰지 않는다면 반려를 하시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는 회사에 출근하여 매일같이 결재를 받는다. 허나 반복적으로 결재를 받던 그때를 생각해보니 "굳이 결재를 매번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큰 금액을 투자하거나 신규 제품 개발 혹은 양산 결정을 하기 전 관련 담당자들에게 결재를 받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업의 특성상 타 부서들과 같이 협업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럴 경우 결재는 타 부서와 소통할 수 있는 또 다른 창구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작은 부분까지 결재를 하며 진행하다 보니 업무 속도가 굉장히 느려지는 경우가 있었다. 예를 들어 직접 결정하고 일을 진행한다면 몇 시간 만에 끝낼 수 있는 일에 있어서 결재라는 프로세스를 통해서 진행해야 하다 보니 3일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필자는 대기업의 딜레마라고 생각한다. 기업이 커지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일들이 많다. 회사들은 무차별적 결정에서 오는 막대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세스들을 구축한다. 그리고 그중 가장 안전한 장치가 바로 결재인 것이다. 다소 느려질 수 있지만 안전한 방식을 택하는 구조와 직원에게 결정 권한을 줌으로써 스타트업과 같은 속도로 일이 진행되는 구조. 과연 무엇이 더 좋다고 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에는 삼성은 본인들이 있는 산업의 특성에 맞게 조금 더 촘촘히 짜여 있는 결재 시스템을 잘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삼성의 결재 시스템의 상당 부분을 없애면 어떨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삼성에서 근무했을 때 결재 없이 일을 한다는 게 상상조차 되지 않았는데, 결재라는 개념이 적은 외국 기업에서 근무하다 보니 필요한 결재 루트만 유지하고 나머지를 전부 제거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존은 다른 테크 회사들과 다르게 삼성과 굉장히 비슷한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마존의 매니저는 몇 명의 부하 직원들을 관리하고, 그 위에는 또 다른 매니저가 존재하고 있어 마치 커다란 피라미드와 같은 조직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구조를 흔히 Hierarchical structure라고 부르는데, 조직 구조를 비교해보면 삼성과 얼추 비슷하다. 하지만 조직 구조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아마존에는 결재 시스템이 크게 없다. 유일하게 생각나는 것이 차기 프로젝트 관련 회의를 하면서 인력 충원 관련 결재를 하는 것을 본 경우는 있다. 하지만 그 외 프로젝트 방향성 혹은 제품 구매와 관련하여 결재를 받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다.
아마존은 직원들에게 상상 이상의 결정권을 보장한다. 아마존은 본인들을 세상에서 가장 큰 스타트업 (The World's biggest start-up)이라고 부르는데 그만큼 직원들이 그 제품의 사장이 되어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모든 권한들을 부여한다. 예를 들어 제품을 개발하는 데 어떤 방식으로 개발할 것인지에 대한 최종 결정은 각 담당자가 직접 내린다. 물론 상사들 역시 어느정도 관여를 하기는 하지만 결국 결정을 내리는 것은 담당자다. 필자의 매니저 같은 경우에는 열심히 조언한 뒤 우리들이 가장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항상 확실한 데이터로 본인을 설득시켜주기 바란다. 상사라고 꼭 답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결재라는 시스템을 없애고 순수하게 논리와 데이터를 가지고 결정을 하는 것이다. 저번 주 회의 중 필자의 제품과 관련하여 디렉터는 "X라는 기능도 같이 개발 중이니"라고 물어봤다. 그래서 필자의 경우 "아니 우리가 현재 개발하고 있는 것에는 그 기능은 포함하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이 기능을 넣음으로 얻는 XX 이익 대비 YY 투자할 것들이 너무 많아"라고 답변을 했고, 우리 디렉터의 경우 "그래 우선순위는 네가 알아서 잘 정했겠지. 네가 우리보다 더 잘 알 테니 좋은 결정 해"라고 하며 넘어갔다.
그렇다고 하여 결재 없이 무조건 한 사람이 모든 결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존 역시 매니저를 포함하여 다양한 안전장치들이 설치되어 있다. 예를 들어 법률 혹은 PR에 문제가 되지 않기 위해서 어떠한 일을 마무리하기 전 다양한 법률과 PR 담당자들과의 협의를 해야 한다. 보통 이럴 경우 프로젝트 서류를 준비하여 한 회의실에 모여 글을 읽고, 그들의 의견을 듣는다. 이를 통하여 3자의 눈에서 봤을 때 문제가 될만한 내용이 없는지 지적을 듣고 개선을 하는 것이다. 그 외 우리의 모든 결정에는 데이터가 있다. 필자의 매니저가 자주 해주는 말로는 아마존에서 좋은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1) Data - 숫자로 표현할 수 있는가? (2) Anecdote - 고객들의 소리를 들어봤는가? 그리고 (3) Gut feeling - 네 직감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라는 세 가지의 조화로운 밸런스를 찾으라고 한다.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경우 과연 누가 결정에 토를 달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이 직원이 대부분의 결정을 직접 내릴 수 있다는 것에서 오는 장점은 많다. 우선 내가 직접 고민하고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더 신경 쓰고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그렇다 보니 더 애정을 갖고 일을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더 좋은 제품을 완성시킨다. 또한 이만큼의 결정권을 갖게 됨으로써 업무를 하는데 더 막중한 책임감을 갖게 되는데 이는 회사 생활에 큰 동기부여가 된다. 마지막으로 모든 업무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이다. 바쁜 박 과장님이 합의해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이 막힘없이 일을 진행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결정권을 직원들에게 줌으로써 아마존은 대기업의 딜레마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에 따른 단점도 있을 것이다. 혹여나 직원들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그만큼 회사에 막중한 피해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마존과 같이 인터넷 회사의 경우 대부분 Two-way door (다시 되돌릴 수 있는)가 있기 때문에 실패에 조금 더 너그러운 것 같다. 그리하여 직원들이 실패를 할 경우 이를 교육 비용이라고 생각하며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것에 그 누구도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물론 두 번 같은 이유라면 문제가 다르지만).
결재 시스템을 회사에 도입하는데 답은 없다. 회사들은 조직의 구조뿐만 아니라 제품과 산업에 대한 특성 고려하여 이를 결정해야 할 것이다. 삼성과 같이 한 번의 불량이 큰 문제를 일으키는 하드웨어의 경우 결재를 통해서 실수를 최소화하는 게 필요하다. 반면 아마존과 같이 데이터와 논리로 모든 결정이 이뤄지고 개인에게 결정권을 주는 회사의 경우 결재라는 시스템이 굳이 필요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영인들은 본인 회사에 가장 잘 맞는 옷을 고르는데 깊은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