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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디자인을 알게 되는 유일한 방법

사실 별 거 없다.

by 김태길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디자인이라는 게 ‘예쁘게 만드는 일’이라고 믿었다. 심미적이라는 것은 주관의 영역이기에 누군가의 취향을 강요할 수도, 강요받을 수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누군가 한 명쯤은 내 디자인이 취향인 사람이 있겠지라는 안일한 자신감도 있었다.


무언가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여백을 맞추고, 폰트를 골라서 정렬을 딱 맞게 놓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을 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한 화면 안에서 요소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되고, 제목과 설명이 미묘한 비율로 조화를 이루는 걸 보는 그 짧은 순간의 쾌감은 정말 대체 불가능했다. 마치 방금 구운 머랭을 오븐에서 꺼냈는데, 모양이 하나도 안 가라앉고 완벽하게 잘 구워진 걸 발견한 사람의 표정처럼. ‘이 정도면 됐지’ 하는 마음으로 파일명을 ‘final_final’로 저장하고 이 회사에 내가 기여한 것에 대한 보람을 만끽하곤 했다.


디자인이 진짜로 끝나는 건 그 순간이 아니라는 걸 UXUI 직무로 가기 시작하면서 배웠다. 디자인은 그걸 볼 때가 아니라 ‘쓸 때’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내가 만든 화면이 사람 손에 닿는 순간이 진짜 시작이었고, 그 이후의 시간 동안 내가 느끼는 건 ‘완성’이 아니라 ‘불안’이었다. 그게 잘 작동할까, 버튼은 눌릴까, 설명은 이해될까, 페이지를 벗어나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이 머릿속에서 무한히 반복 재생되면서, 나는 마치 시험을 쳤는데 채점표는 남이 갖고 있는 사람처럼 초조해졌다. 그전까지는 디자인 파일을 넘기면 끝이었다면, 이제는 그 파일이 세상 밖으로 나가고 나서부터 ‘진짜가 시작된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한 번은 그런 경험이 있었다. 팀에서 새로운 기능을 런칭했는데, 나는 그게 꽤 마음에 들었다. 얼마나 정성껏 만들었는지 설명하자면, 폰트 크기를 픽셀 단위로 조정했고, 버튼의 각진 모서리를 장인의 혼을 담아 깎았고, 여백 비율을 맞추기 위해 집에서도 몰래 피그마에 들어가서 고쳤다. 그러니까 거의 내 자식 같은 화면이었다. 그런데 막상 서비스가 나가고 나서 유저 문의나 피드백을 수집하다보니 당황스러운 지점이 한두군데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 기능을 전혀 안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버튼을 안 누르고, 또는 못 누르고. 스크롤이 아닌데 스크롤을 하려고 한다거나 엉뚱한 걸 눌러본다거나. 어떤 사람은 중간에 분노의 rage tap을 시연한 뒤 앱을 이탈해버렸다. 현실은 냉정했다. 아무리 마음속으로 소리쳐도, 내 디자인은 거기서 사용자를 붙잡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좋은 디자인은 내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누군가 써주기 시작해야 그때 비로소 완성되는구나.


디자이너는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디자인을 가장 모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 화면을 수십 번, 수백 번 열고 닫으면서 이미 모든 버튼의 위치와 기능을 외워버렸고 어떤 순서로 눌러야 하는지 학습한다. 그러니까, 내가 만든 걸 테스트하는 순간부터 나는 아무리 사용자에 빙의해도 ‘사용자’를 대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내가 만든 걸 내 손으로 테스트한다면 감정이입은 되겠지만, 객관적일 수는 없다. 내가 만든 요리가 제일 맛있는 법. 결국 사용성은 타인의 손끝에서만 드러난다. 그걸 인정하기까지 나는 제법 오랜 시간을 소비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가능하면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직접 써보려 했다. 문서 내용을 무시한 채 그냥 새로운 유저라고 가정하고 디자인을 테스트해봤다. 하지만 아무리 모르는 척해도 내가 그걸 만든 사람이라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았다. 내 손가락은 너무 똑똑했고, 내 뇌는 너무 기억력이 좋았다. 내가 어디를 눌러야 하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걸 모르는 척하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다. 결국 디자인을 전혀 모르는 친구에게 사용해보라고 프로토타입을 보여줬다. 그 친구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않은 채 몇 초 동안 아무 말 없이 화면을 바라보다가 어떻게 시작하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진짜 사용자는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버튼이 예쁘고, 여백이 균형 잡혔고, 폰트가 트렌디해도, 그걸 눌러야 할 이유를 못 느끼면 그건 그냥 이미지일 뿐이라는 걸.


그때부터 나는 디자인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좋은 디자인’은 파일 안에 있지 않다는 걸, 눈으로 확인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 경험해야 한다는 걸, 머리가 아니라 몸이 이해해야 한다는 걸. 그래서 나는 테스트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테스트는 디자인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누군가가 내 디자인을 쓰는 순간부터, 나는 내가 몰랐던 문제를 만나고,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나고, 그때부터 비로소 진짜 디자이너가 된다. 피그마 안에서의 나는 늘 완벽했지만, 그럴수록 사용자 손 안의 나는 늘 불완전했다.


그런데 웃긴 건, 그렇게 불완전한 모습을 보면 화가 나야 정상인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이 제일 많이 배운다. 마치 요리를 하다가 간을 너무 세게 했을 때, 처음엔 망했다고 생각하지만, 그제야 ‘아, 다음부턴 소금을 이만큼 넣으면 되는구나’ 하는 걸 알게 되는 것처럼. 디자인도 똑같다. 한 번은 진짜로 불편해야, 다음엔 편하게 만들 수 있다. 완벽한 디자인을 만든다는 건 착각이다. 다만 완벽함에 도달하기 위해 불편함을 조금 덜어내는 일을 반복하는 게 진짜다.


나는 요즘 가끔씩 일부러 불편한 걸 찾아본다. 내 디자인이 아니라도, 다른 앱을 쓰다가 불편한 지점을 찾을 때 배우는 게 많다. 내가 그 상황의 사용자가 되었을 때, 나는 한순간에 디자이너이자 사용자이자, 불평하는 고객이 된다. 그러니까 결국 좋은 디자인을 알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그걸 직접 써보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느낀 불편함을 잊지 않는 것, 그게 디자이너의 직업병이자 동시에 축복이다.


좋은 디자인은 ‘잘 만든 디자인’이 아니라 ‘잘 써지는 디자인’이다. 그리고 그건 피그마 안에서는 절대 알 수 없다. 예쁘고 논리적인 모든 요소가 실제 사람 손에서 엇박이 나며 불협화음이 될 때, 거기서부터 비로소 디자인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진짜 좋은 디자인을 만들고 싶다면 컴퓨터를 잠시 덮고, 그걸 누가 어떻게 쓰는지 옆에서 지켜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때로는 자존심이 상한다고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거치지 않는 디자이너는 있을 수 없다. 그 과정을 거쳐야만 진짜 사람이 쓸 수 있는 디자인이 나온다. 좋은 디자인은 보기 좋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결국 누군가에게 이해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디자인을 배우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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