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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플릿 시대의 디자이너는 무엇을 만드는가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의 역할

by 김태길

요즘은 디자인을 시작하는 사람도 전문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도 모두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내가 만든 것이고 어디부터가 도구가 만들어낸 것인지, 그리고 템플릿과 자동화가 점점 늘어나는 환경에서 디자이너는 무엇을 기준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창작했다’고 말할 수 있는지 같은 문제들이다. 예전 같았으면 화면의 구성을 직접 그리고, 구조를 조립하고, 인터랙션을 흐름에 맞춰 설계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창작으로 여겨졌겠지만, 이제는 대부분의 UI 패턴이 이미 잘 정리되어 있고, 피그마와 프레이머 같은 도구들은 어느 정도의 품질을 기본값처럼 제공해주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내가 만든 것과 도구가 대신 만들어준 것 사이의 경계가 이전보다 훨씬 흐릿해졌다.


특히 템플릿의 영향력은 더욱 크다. 어떤 서비스 구조든 템플릿을 열어보면 이미 적당한 방향성이 주어져 있고, 필요하다면 컴포넌트를 끌어와 배치만 해도 보기 좋은 화면 하나쯤은 금방 나온다. 이런 시대에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말은 예전처럼 화면의 형태나 스타일의 차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화면 자체는 더 이상 독창성을 증명할 기준이 아니고, 디자인의 개성 역시 도구가 어느 정도 흡수해버리는 상황에서, 디자이너가 새로 만든다는 것은 화면 바깥을 포함한 더 넓은 맥락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 템플릿이 강해질수록 디자이너가 새롭게 만드는 지점은 점점 더 형태보다 의도와 구조의 깊이 쪽으로 옮겨가는 것 같다. 같은 템플릿을 쓰더라도 어떤 흐름을 먼저 보여줄지, 어떤 선택을 덜어낼지, 어떤 상황을 예외로 처리할지 같은 사고의 방향은 결국 개인의 판단에서 시작된다. 도구는 좋은 재료가 되어줄 뿐 그 재료를 어떻게 조합해야 사용자의 문제를 정확하게 풀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은 제공하지 않는다. 디자인에서 새로움은 형태보다 맥락에서 생기고, 그 맥락을 읽는 능력은 템플릿이 대신해줄 수 없는 영역이다.


또한 템플릿이 늘어난 시대일수록 오히려 디자이너의 선택은 더 무거워진다. 똑같은 구성일지라도 어디에 힘을 싣고 어떤 장면을 생략할지, 무엇을 반드시 사용자에게 보여야 하고 무엇은 서브플로우로 감춰야 하는지, 어떤 문장이 불필요한 정보인지 같은 감각들이 결과의 결을 바꾸기 때문이다. 흔하게 보이는 화면 안에서도 묘하게 다른 분위기나 안정감이 생기는 이유는 이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차이다. 템플릿 시대의 창작은 화면의 차이가 아니라 판단의 차이에서 만들어지고, 이 판단은 도구가 아무리 발전해도 사람에게 남아 있는 영역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든다. 새로움을 만드는 일은 결국 외형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의미를 조정하는 일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템플릿은 형태를 제공하지만 의미를 제공하지는 않기 때문에, 디자이너는 도구가 만든 형태 안에 어떤 질서를 넣을지 결정해야 하고, 어떤 흐름이 사용자에게 더 자연스러울지 가늠해야 하고, 어떤 불편을 줄이고 어떤 부분을 남겨둘지 판단해야 한다. 이 판단의 과정은 여전히 사람이 하는 일이고, 이 판단이 쌓여 만들어진 결과는 여전히 디자이너의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은 무엇을 새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기준을 이전과 조금 다르게 바라보게 된다. 형태를 직접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어떤 사고를 조직했는지, 어떤 기준을 세웠는지, 어떤 흐름을 조정했는지 같은 질문들이 더 중요해졌다. 템플릿은 형태를 빠르게 만들 수 있게 해주는 도구일 뿐, 디자이너가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는 지적인 구조는 도구가 대신해줄 수 없다. 결국 창작이라는 건 결과물의 외형이 아니라 그 외형을 가능하게 만든 사고의 흐름이고, 그 흐름을 만드는 일은 여전히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이다.


좋은 템플릿은 창작을 대신하는 게 아니라 창작의 단계를 이동시킨다. 형태의 차이 대신 선택의 차이가 중요해지고, 구성의 차이 대신 해석의 차이가 중요해지고, 결과의 외형 대신 과정의 방향이 중요해진다. 그래서 템플릿 시대에도 디자이너가 새롭게 만드는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명확해진다. 도구가 형태를 만들어주는 시대일수록 디자이너는 형태 너머를 만들어야 하고, 그 지점에서 비로소 디자이너의 역할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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