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밌는 것 좀 만들고 싶었을 뿐입니다
무작정 시작하게 된 우당탕탕 사이드 프로젝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이정표가 될 수도 있고, 저 스스로도 훗날 이 시행착오들을 발판 삼아 더 성장할 수 있기에 그 과정들을 하나하나 기록해보고자 합니다.
회사 일이 재미없는 것은 아니다. 천성적으로 워커홀릭이자 몰입하는 걸 즐기는 나로써는 지금까지 다녔던 모든 회사들에서 했던 일들이 재미있었다. 단순히 '히히 재밌당' 하는 수준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걸 더 낫게 만들까?' 하는 발전적인 고민이 포함된, 정말 말 그대로 '일하는 즐거움'을 얻는 걸 선호한다. 특히 내가 만든 것들이 성과를 내는 것이 보일 때면, 그때만큼은 어떤 쾌락도 넘볼 수 없는 짜릿함이 생긴다.
하지만 마음 한켠엔 계속 해서 해결되지 않은 무언가의 욕구가 있었다. 소셜 콘텐츠 디자인을 거쳐 브랜드 전반의 디자인, 그리고 UX와 UI를 거쳐 프로덕트까지 온 나는, 슬슬 내 성장의 동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커리어 초반에는 혼자 배우고 찾아서 성장하는 재미가 꽤나 있었다. 인턴 6개월 후 정규직으로 전환하자마자 1달 만에 도망간 처음이자 마지막 사수(선배...보고 있어요...?)를 끝으로, 나는 나 스스로의 사수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다행히 만물 모든 것이 궁금한 성격인지라, 모르는 것이 있으면 책이든 인터넷이든 닥치는 대로 찾아서 알아냈고, 그 앎을 매우 즐겼다. 당장 어제만 해도 나무위키에서 '매미'를 뜬금없이 검색해서 보고 있었고, 유튜브에서는 '오징어 해부하기' 를 봤다. (왜 봤냐고 물으시면...궁금하잖아요...안 궁금하신가요? 매미는 왜 울까? 라든가...매미는 본인이 안 시끄러운가? 같은 것들...)
처음에는 다방면에 능통한 폴리매스형 인재라는 게 강점이 되었다. 스타트업에서 디자인 전반을 다 담당하는 디자이너라면 으레 이것저것 다 할 줄 알아야 했는데, 다행히 그런 '이것저것'을 매우 즐기고 서로 다른 분야를 연결하는 걸 재밌어 하는 성격이라 다행이었다.
게다가 영문학을 전공하고 디자이너로 일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다양한 분야의 통섭적인 관점을 필요로 한 커리어였기 때문에, 일반적인 디자이너의 시선이 아니라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써의 나름의 인사이트도 꽤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커리어를 쌓으면 쌓을 수록 시장에서 나에게 요구하는 T자형 인재의 깊이는 더 깊어졌고, 그만큼 내가 처음에 만든 다양한 분야의 통합적인 인사이트는 빠르게 소진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문성을 더 쌓기 위해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커리어를 탐구하기 시작했다. UX/UI 디자이너로써 어찌저찌 이직은 했다만, 이런저런 다양한 회사 일들이 겹치면서 제일 중요한 '데이터를 활용해 사용성을 개선한다' 라는 궁극적인 프로덕트 디자이너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어찌저찌 디지털 제품을 다루는 회사에 입사해 제품을 총괄하는 디자인 리드(라고 쓰고 팀원없는 팀장이라 읽습니다)로 1년 넘게 있게 된 결과, 나름 조금의 전문성을 맛보는 기회는 되었다.
그럼에도 이직은 쉽지 않았다. 일반적인 스타트업에 적당한 디자인 리드로 가기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그렇게 했을 때 내 향후 5년, 10년의 커리어는 어떻게 될 지 막막했다. 약 2년 조금 안 되는 기간의 UX/UI디자인 경력은 있었지만, 지금까지 다녔던 회사들이 우연인진 몰라도 충분한 데이터 환경을 제공하지 않았고, 그 필요성 또한 크게 생각하지 않는 의사 결정을 연속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마침 찾아왔던 이직 기회들 중 꽤 깊은 단계까지 진행되었다가 허사로 돌아간 것들이 많았는데, 공통적으로 '관련 경험이 아쉽다' 또는 '데이터를 활용한 디자인 경력이 부족하다' 라는 피드백을 직/간접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데이터를 활용한 의사결정을 통해 내 디자인의 퍼포먼스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경험이 간절했다. 그 것이 내가 일하는 가장 큰 원동력이자 내 즐거움의 큰 축이 되는데, 그 경험이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다. 더 이상 혼자서 이것저것 배워가면서 하기엔 내 학습의 역량이 내가 지금까지 쌓은 경력을 지탱하기 부족해진 것이다.
계속 이렇게 저렇게 움직이다 보면, 결국 프로덕트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그냥 이것저것 다 하는 '그냥 디자이너'가 될 거라는 두려움이 확신이 되었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회사에서 충분한 데이터 드리븐 디자인 환경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결국 목 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것이 맞다. 아쉬운 사람이 움직여야 하는 건 세상 만물의 이치다.
우리 프로덕트가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고?
그럼 그런 프로덕트를 직접 만들어버리면 되겠네!
그렇게 막무가내 우당탕탕 와르르 사이드 프로젝트를 결심해버렸다. 직접 데이터를 모아서 데이터 드리븐 의사결정을 해보기로 했다. 아무리 적은 규모의 데이터라도 최소한 내 디자인의 근거에 데이터를 활용했다! 라는 스토리텔링이 진지하게 필요했다. 또, 회사 일 말고도 내가 몰입할 수 있는 재밌는 것을 찾고 싶었다. 먼저 친하게 지내는 프론트엔드 개발자와 백엔드 개발자를 하나씩 꼬시기로(?) 했다.
'ㅇㅇ님, 재밌는 거 하실?'
'오 뭔데요?'
'우리, 서비스 하나 만듭시다.'
다행히 다들 현재 회사에서 하는 것만으론 역량 강화에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또 개인적으로 재미있는 걸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구가 있어서 모으기에는 쉬웠다. 같이 할 멤버를 구하고 난 다음에는 생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평소에 '아 이런 서비스가 있었으면 좋겠는걸?' 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을 위주로 아이템을 찾아보기로 했다.
각자 서로 일상에서 불편하거나, 이런 서비스가 있으면 좋겠다 생각한 부분을 가져와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니즈가 있었다.
그렇게 굉장히 진지(?)한 아이템 회의와 아이디어 브레인스토밍이 끝나고, 셋다 필요하거나 충분히 니즈가 있다고 판단한 생각한 아이템을 하나 선정해 진행해보기로 했다.
만들기 전에, 멤버들과 우리가 만드는 서비스의 스코프를 확실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는 실제 출시 후 사업으로 확장할 생각으로 덤빌 수도 있고, 누군가는 단순히 취미 생활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디까지 만들것인가를 합의해두지 않으면, 잡음이 생길 것은 분명했다.
'저희, 진지하게 접근하지 말고 회사 일 말고 재밌는 거 한다 생각하시죠'
'좋습니다!'
그래서 지은 팀 이름.
적어도 재밌는 걸 만드는 걸 목표로 하고, 그러다 잘 되면 나중에 밥그릇 하나 더 추가하는 걸로 고민해보자는 걸로 합의를 하게 되었다.
2편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