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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평 Jun 27. 2022

아빠의 인스타그램


딸, 이따(집에) 갈 때 잊지 말고,
니 사진들 가져가!


오랜만에 본가에 들러 저녁식사를 하던 중, 엄마는 대청소를 하다 빼놓았다며 구석에 놓아둔 짐 보따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원래 집에 있던 앨범은 너무 낡아서 버렸으니, 사진 알맹이만 따로 가져가라고 챙겨둔 것이다. 엄마는 이참에 새 앨범을 사서 깨끗하게 끼워두는 게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펼쳐보는 서른여섯의 나는 너무 오랜만에 보는 그 오래된 사진들이 무척 생경하게 느껴졌다.


- 뭐가 그렇게 원통했는지 콧물 방울을 잔뜩 터뜨리면서 서럽게 울고 있는 아기

- 또 뭐가 그리 좋았던 건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입이 귀에 걸린 장난꾸러기 아이

- 뭔가 기분이 언짢고 화가 났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렌즈를 노려보는 초등학생 아이까지


그 순간이 모두 나였다.


이런 날 것의 내 모습이 낯선 동시에 신기하기도 했지만,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지 그 사진을 보고 내가 기억하는 순간은 의외로 많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는 아빠는 사진 찍기를 무척 좋아했다. 그 당시만 해도 꽤 고가였을 일제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자주 우리를 카메라 렌즈에 담곤 했다.

아빠의 활발했던 작품 활동은 본가에 쌓여있던 뚱뚱한 앨범 책들이 그 사실을 증명하는데, 매년 한 권씩 늘어가던 우리 가족의 앨범 책들은 내가 중학교 때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시간이 멈춰버린 듯, 더 이상 늘지 않았다.


아빠의 작품들을 이리저리 손으로 헤집어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있던 그때, 사진의 뒷 장에 적힌 익숙한 글씨체가 스쳐 지나갔다.



혜민이 뭘 보니?



아빠의 글씨였다.


수십 년간 낡은 앨범 책에 꽂혀있던 사진들이었던지라, 이 사진의 뒷면에 아빠의 글귀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추억에 젖어 혼자 낄낄대며 사진을 구경하는 중 너무도 예상치 못한 순간을 마주해버린 나.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빠는 나의 어린 시절, 그 찰나의 순간에 대한 메시지를 그 특유의 반듯한 글씨체로 적어내려 갔다.

정말이지 남들이 보면 흑역사라고 할 만한 나의 모습을 잔뜩 찍어놓고, 그는 하고 싶은 말이 그렇게 많았던 걸까.

혼자 낄낄거리며 장난스럽게, 혹은 진지하게 고심해가며 나의 사진 이곳저곳에 멘트를 남겼을 아빠.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해줄 수 있는 말들.


그것은 마치 아빠의 인스타그램을 보는 것 같았다.





8-90년대의 그 시절,
비록 인스타그램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빠는 이미 인스타그램이란 걸 하고 있었다.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버렸고, 나는 어느덧 그때의 아빠와 동갑내기가 되었다.

지금 아빠와 함께 이 사진을 넘겨보면서 같이 낄낄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그래도 지금이라도 이런 보물을 찾게 되어 참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 사진들을 꽂혀있는 앨범 그대로 집에 들고 왔다면, 하마터면 아빠의 이야기를 듣지 못할 뻔했다.


지금이라도 발견하게 되어서 그게 참 다행이었다.



과거에서 온 나의 인스타그래머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빠가 찍은 사진과 글귀는 너무 예뻐서, 아마 그 당시에 인스타그램이 있었거나, 혹은 아빠가 지금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갔다면.

아빠는 아마 어마어마한 팔로워 수를 가진 인플루언서였을 거라고 말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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