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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Eliot K Feb 15. 2021

신경외과를 때려치우려던 나를 그만두지 못하게 했던 소녀

인생은 왜 사는가 2

보통 의사의 수련과정은


의과대학을 졸업 후

인턴 1년,

전공의 4년을 거쳐서

전문의가 되는 게 일반적이다.


인턴은

12개월 동안


한 달마다


다른 과를 바꿔서 돌며

내가 어느 과 수련을 받을지

체험을 하는 시기이다.


가령 일반 회사로 치면


인사부서 1달

재무부서 1달

디자인 부서 1달

마케팅 부서 1달


이렇게 돌아가면서

일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12개월 간 일을 하고


인턴이 끝나기 2-3달 전쯤에

시험을 봐서


시험 성적을 가지고

과를 정하게 된다.


가령 마케팅 부서는

총 3명을 뽑고

인사 부서는 총 2명을 뽑는데


마케팅 부서에

지원자가 6명이고

재무 부서에

지원자가 1명이면


내가 그 지원자들 중


성적이 좋아야

마케팅 부서에 뽑히게 되고


못 뽑힐 거 같으면

경쟁이 적은


재무 부서에

지원을 넣는


그런 느낌과 같다.


그런데


보통 인턴 12개월이 끝나기 전에

어느 과에 합격했는지

발표가 나게 되므로


인턴의 마지막 1-2달은

합격한 과의 일을 인계도 받을 겸

일에 적응도 할 겸 해서


본인이 합격한 과에서

인턴을 돌게 되는데


이를 인지던트라고 한다.


마치 내가 재무부서에 합격을 해서

3월부터 재무부서에서 일을 하는 건데


어차피 3월부터 재무부서에 속해서

일을 해야 하니


1-2월부터 미리 가서

인턴으로 일을 하면서

일을 인계받는

그런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요즘은

인지던트를 하는 문화가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더라만..



나는

신경외과에 지원을 하여

경외과에 합격을 하였다.


그래서 원래는 3월부터

신경외과 전공의로 일을 하게 될 예정이었지만


예로부터 이어져 온 관습대로

2달 전인 1월부터

신경외과에서 인지던트로 일을 하게 되었다.


1월에는

선배들을 쫓아 당기며

경외과 의사는 무슨 일을 하는지

거의 참관하는 일이 대부분이었고


2월이 되어오자

선배들이

이제 100일 당직을 해야 하니


머리도 깎고 오고

친구들한테 인사도 하고 오고

짐도 바리바리 싸오라고 한다.


그렇게

2월부터 100일간

병원에 갇혀있게 되었다.


그리고 2월에 수습기간을 거쳐

3월부터 신경외과 소속이 되어

담당 환자를 받으며

주치의로 일을 하게 되었다.



사실 100일간

병원에 갇혀있는 거는

어차피 예상했던 거라

그렇게 힘든 건 없었다.


또 있다 보니까

그냥 병원에서 살면서

먹고 자고 하는 건

힘든 건 없었던 것 같다.


덕분에 돈을 아껴서

돈을 모으기도 했고..


그렇게 100일이 지나고

5월이 되자

스포츠 컷으로 자르고 온 머리는

어느새 길쭉해졌고


선배들에게

100일 당직이 끝난 후 에야

입국식이라는 행사를 통해

정식 신경외과의 일원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100일 당직이 끝났다고

집에 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5월 중순부터

나는 일주일에 하루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 오후까지

24시간의 외출을 허락받았다.


하지만

그 마저도

주말이 오기 전


월, 화, 수, 목, 금 요일에

내가 펑크를 낸 일이 있으면


선배들은

때리거나 꾸짖거나 하는 대신

나의 쉬는 날을 뺏어버렸다.


이를 우리는

"오프를 자른다"라고

하는데


1주일 동안

뭔가 펑크 난 게 있으면

그나마 있는 24시간의 휴식마저도

빼앗기기 때문에


정말 1주일 동안

정신 차려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좀 덤벙거리는 스타일이라

펑크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5월 마지막 주도

나는 그렇게 오프가 잘려서

집에 못 가게 되었다.


5월 마지막 주에

오프가 잘려 집에 못 가고

6월 첫째 주 월요일이 되어

새로운 1주일이 시작되었다


전 주에 집에 못 가서

절망에 빠져

신경외과를 그만둘까

고민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기 멀리서

"선생님!" 하며


어떤 여자 아이가

달려오는 것이었다.


중학생쯤 돼 보이는데

처음 보는

여자 아이라


누구지? 하며

당황했다.


몇 초 뒤

나는 그 학생의

뒤를 따라오는


학생의

어머니를 보고


그 아이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내가

처음 신경외과 전공의가 되었던

3월에


교통사고로 응급실로 온

여자 학생 하나가 있었다.


친구는

밤 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뇌출혈이 심하게 났고


응급 수술로

머리에 찬

핏덩이는 끄집어냈지만


중환자실에 계속

의식이 없는 상태로

누워 있었다.


생사를 오고 가면서

여자아이의 부모님 또한

하루하루를 지옥 같은 심정으로 보냈고


내가 주치의였기 때문에

내가 면담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중환자실에서

1달간 누워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겨우 눈을 뜨고

손 발을 움직여서

일반 병실로 올라갔고


이후 병실에서

부모님의 케어를 받으면서

아직 말은 못했지만

팔다리를 겨우 움직이자

추가적인 재활 치료를 위해

재활의학과로 전과를 보낸

여자 학생이 하나 있었다.


당시에는 응급실로 왔을 때

머리 수술을 하기 위해 내가

머리카락을 다 깎아가지고


1달 내내 까까머리였기 때문에

내가 기억하는 얼굴은

까까머리인 여자아이의 얼굴이었는데


그로부터 3달 뒤

"선생님!"을 부르며

내 앞에 나타난 친구가

바로 그 여자 학생이었고


머리가 꽤 자라서 내가 못 알아봤던 것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말도 못하고

누워만 있던 게 마지막인데

걸어서 내 앞에 왔기 때문에


더 알아보지 못했다.


그때

그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걸어와서

대뜸 말했다.


"선생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에는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도대체 누구길래

나한테 살려줘서 감사하다고 그러지?


그런데

그 아이의 어머니를 보고

나는 기억이 났다


설마 이 친구가 그때 그?


"아니 너 왜 이렇게 좋아졌어?

언제 이렇게 머리가 자랐어?

정말 잘됐다!"


아직은 온전히 걷지는 못했지만

쩔뚝거리면서라도

걸을 수 있는

아이를 보며


나는 너무 놀랐다.


그리고

나는 그 아이 덕분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아 그래도


내가 쓰일 수 있는 곳이 있구나


신경외과 의사가 할 만 하구나


라고 말이다.


그 이후로

나는

절대로 어린아이는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이론적으로는

살리는 게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도


어린아이들은 포기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살아갈 희망을 지켜주는 것


그것이 내가 인생을 사는 수많은 이유 중

한 가지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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