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27
며칠 후, 김지훈 씨는 자신이 10년 전 창업에 실패하고 사라진 친구 최인규라고 말했다. 최인규 씨는 김지훈 씨의 대기업 입사 동기이자, 한때 창업을 함께 꿈꿨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부산 출신인 그는 언제나 자신감 넘쳤고, 회사를 그만두고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다가 3년 만에 모든 것을 잃고 잠적했다. 안 그래도 당시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김지훈 씨는 그의 실패 소식을 들으며 남 일 같지 않아 며칠을 뒤숭숭한 마음으로 보냈다.
그러니까 거의 15년 전, 비가 쏟아지던 여름밤의 일이었다. 세 사람은 종로의 허름한 술집에서 미래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술에 취한 최인규 씨가 냅킨 위에 사업 계획을 미친 듯이 그려가며 김지훈 씨에게 함께 회사를 나오자고 설득했다. 그의 눈은 대기업 신입사원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지훈 씨 역시 그의 말에 설득되어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때, 결혼을 앞두고 있던 정다현 씨가 그 냅킨을 가리키며 말했다.
"인규 씨, 그 종이 한 장에 지훈이 인생을 걸 수는 없어."
그녀의 차가운 한마디에 최인규 씨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그는 냅킨을 구겨 쥐고는 아무 말 없이 남은 소주를 들이켰다. 그날 이후로 세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겼고, 2년 후 최인규 씨는 혼자 회사를 떠났다.
주말 저녁, 아이들을 재워놓고 부부가 오랜만에 거실 소파에 마주 앉아 맥주를 마셨다. TV에서는 젊은 스타트업 대표의 성공 신화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나오고 있었다. 화면 속 대표의 모습이 꼭 그 여름밤의 최인규 씨 같다고, 정다현 씨는 생각했다. 한 캔을 거의 비웠을 즈음, 아내 정다현 씨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병원에 가보는 게 어때? 대표님도 그렇게 말했다며."
김지훈 씨가 돌아봤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정신과 다닌다는 게 회사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멘탈 약한 팀장'이라고 낙인찍힐 거야."
"그게 뭐가 중요해? 당신 건강이 먼저지."
"당신은 모를 거야."
김지훈 씨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공무원은 안정적이잖아. 스타트업은 성과 못 내면 바로 쫓겨나는 곳이라고."
정다현 씨는 할 말을 잃었다. 남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김지훈 씨는 멍하니 TV 화면 속 성공한 젊은 대표를 바라봤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는 갑자기 아내의 어깨를 툭툭 치며, 전혀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말했다. 억센 부산 사투리였다.
"다현 씨, 지훈이 요새 많이 힘들지예? 갸는 원래 그런 놈 아입니더. 마음은 저 태평양에 가 있는데, 몸뚱아리는 책상 앞에 묶여 있으니... 답답할 낍니더. 잘한다, 고생한다, 그런 말 말고 그냥 '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한마디 해주이소."
"갑자기 왜 그래? 부산 사투리는 또 뭐야. 잠꼬대하는 거야?"
정다현 씨는 남편의 이마를 짚어보려 손을 뻗었지만, 김지훈 씨가 정색하며 그 손을 피했다. 그는 마치 그 여름밤처럼, 테이블 위의 냅킨 한 장을 집어 들더니 아내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다현 씨. 아직도 내한테 그 냅킨 쪼가리 한 장이 지훈이 인생보다 못하다고 말할 낍니꺼?"
정다현 씨는 잠깐 얼어붙었다. 까맣게 잊고 살았던 15년 전 그날 밤의 기억이, 남편의 입을 빌린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통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여보.."
정다현 씨가 조심스럽게 불렀지만, 김지훈 씨는 멍하니 냅킨을 내려다보며 대답하지 않았다. 정다현 씨는 한동안 남편을 바라보다, 더 묻지 않고 조용히 맥주 캔을 내려놓았다. TV에선 여전히 성공한 창업자의 인터뷰가 흘러나왔다.
사실 다들 실패를 두려워하잖아요. 저도 그랬어요. 하지만 정말 무서운 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시간이더라고요.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아 아무런 표정도 없이 화면을 바라봤다.
그날 밤, 김지훈 씨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꿈속에서 그는 다시 종로 허름한 술집에 앉아, 젖은 냅킨 위에 누군가의 손이 자꾸 덧그려지는 장면을 반복해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