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중간즘] 왜 일하는가 (1)
나는 어릴적부터 정말 만화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장난감이나 놀이기구가 다양하지 않았고, 조밀조밀 다가구들이 몰려 살던 달동네 시절이라 몸으로 주로 놀았다. 도서관도 주변에 거의 없었기에 책을 읽고 싶다고 해도 책을 찾아보기 힘든 때였다. 그러한 그때, 만화책은 미지의 세계와 통하는 게이트이자 엄청난 유희거리였다. 조금이라도 용돈이 생기면 학교 앞 문방구에 깔린 불법 미니 만화책들을 사서 집앞 계단에 앉아 하루종일 보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엔 해적판이라고 불리우던 일본 유명 만화의 불법 버전이 문방구마다 쌓여 있었고, 친구들끼리 수업시간에 돌려가면서 읽던 추억도 있다. 또한 어머니는 아들이 원하면 언제든지 만화가게에 가서 만화책을 맘껏 볼 수 있도록 조치해 주셨다. 아무래도 자식에게 책을 많이 읽히고 싶으셨지만 책을 사기엔 비쌌고, 만화책을 통해서라도 글을 많이 읽히고 싶으셔서 그랬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물만난 물고기 마냥 만화가게를 학교처럼 드나들면서 당시 유행했던 만화는 모두 섭렵했던 것 같다. 확실한 것은 만화책 빨리 보기는 전교 1등이었다.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를 수집하고 만화를 그렸다.
신기한 것은 내가 용돈이 어디서 났는지 모르겠지만 엄청난 코믹스들을 수집한 것이다. <드래곤볼>부터 <북두칠권>, <명견 실버>, <철완 아톰>, <마징가 시리즈> 등 엄청난 수의 코믹스를 모았다. 친구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서 방과 후에 친구들이 우리 집으로 놀러와 만화책을 쌓아놓고 읽기 시작했다. 내 방이 만화방이 된 것이다. 나는 그때 매우 즐겁고 뿌듯했던 마음이었다. 만화가 보고 싶은 친구들의 성지가 된게 기뻤고 자랑거리였다.
또한 그림 그리기에 소질이 있었던 나는 시간이 될때마다 만화를 따라 그리기 시작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드래곤볼>과 <권법소년 한주먹>을 짬뽕한 만화를 그려서 친구들에게 연재했던 경험이 있다. 50~60페이지 정도 여기저기 유명 만화 장면을 그대로 모방하고 따라그린 짜집기 단편만화였다. 지금 그 만화를 꺼내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고, 그림 수준도 정말 부끄럽다. 만화를 사랑하는 마음에 내가 직접 창작물을 만들어 봤다는 부분에 의의를 두고 있다.
나이가 드니 만화를 그린 작가의 삶에 관심이 깊어졌다.
내가 만난 만화 중에 최고를 꼽는다면 단연 미우라 켄타로의 <베르세르크 berserk>다. 다크 판타지쪽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이다. 판타지 작품의 최고봉으로 서양엔 <반지의 제왕>이 있다면 동양엔 <베르세르크>가 있다는 말도 있을 정도이다. 놀라운 사실은 이 작품이 초등학교 4학년때부터 <베르세르크>를 보았으니, 약 30여 년간 연재와 휴재를 번갈아가면서 이어온 만화라는 것이다. 다년간 연재되는 작품들이 일본에는 꽤 있지만 <베르세르크>는 한 작가가 거의 평생을 올인하고 있어서 더 놀라운 작품이다. 성인이 되어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서점에 가면 그의 최신 호가 발행되었는지 늘 확인하고 기다리는, 그러한 작품이다. <베르세르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봤지만 다소 폭력성이나 선정성도 높고, 굉장히 다크한 세계관을 다루고 있어서 미성년자들이 읽기엔 적합하진 않다. 그러나 <베르세르크>는 인간의 욕망과 신념, 다양한 인간성과 절망 속에서의 꽃피우는 희망을 표현한 깊이 있는 작품이다. 미우라 작가는 이러한 요소를 나약한 주인공에게 투영시키며 절대적 힘을 가진 초인들에게 운명을 휘둘리지 않게 도전하는 스토리를 풀어왔다. 거기에 매회 한컷 한컷마다 예술 작품 수준으로 끌어 올린 그의 작가 정신이 전세계적인 인기를 가져다 주었다. 중반 이후의 화면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는 퀄러티를 보여 준다.
그러던 그가 작품을 완결하지 못하고 소천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이 여러 미디어를 통해 전해졌다. 작가 특유의 완벽성 때문에 연재 동안 몇번의 과로로 몸이 크게 망가졌다는 소식이 있었고 애독자들은 종종 그의 경향에 건강 문제를 지적하곤 했었다. 작가의 삶까지 존경하는 독자들은 연재가 늦어져도 좋으니 작가가 건강하길 바랬고, 그가 그의 스토리를 직접 완결짓길 원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우려가 결국 현실이 되었다. 그의 작품을 즐겼던 나는 그의 실제 라이프가 끝났다는 것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곤 그는 죽음 앞에서 그동안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은 일과 경력을 어떤 시각으로 보았을까라는 점이 궁금해졌다. 작품도 작품이지만 무엇이 그를 그렇게 자신을 혹사하게 만든 것일까.
밤새 스토리를 구상하고, 한 페이지마다 고된 노동의 작화를 완성해 온 그의 작품 스타일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휴가도 없이 개인적인 여가도 없이 쓰러질때까지 작품을 연재해 온 그의 삶은 정말 행복했을까. 일설에 의하면 주말이나 휴일도 아까워하고 운동하는 시간도 없이 작업에 몰두했다고 한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쫒기게 한 걸까. 독신으로 온전히 <베르세르크> 올인을 해 온 그는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끝내야 한다는 소명이 있었던걸까. 자신에게 시간이 많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매진한 걸까. 그에게 다양한 질문이 마음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작품에만 매진했던 그의 삶을 곰곰히 곱씹게 되었다.
함께 일을 해 온 사람들에게 그가 남긴 것
그러던 중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미우라 작가가 생전에 지인 모리 코우지에게 베르세르크 스토리에 대해서 완결 부분까지 얘기하고 논의해 왔었다고 한다. 모리 코우지는 이에 스토리를 감수하고, 미우라 작가의 제자들이 그림을 이어 그려서 그의 작품을 계승, 이어간다는 소식이었다. 이에 대한 소식을 알리는 영 애니멀 글과 모리 코우지의 인터뷰가 정말 감동이었다. 30여 년간 미우라 작가는 혼자서 일한 게 아니었다. 생각과 방향을 나눈 지인이 있었고, 작품이라는 일의 여정 속에 함께한 동료가 있었다는 것을 공식 어나운스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또한 생전 그의 인터뷰들도 회자되었는데 '괴로운 만화의 작업이지만 본인은 정말 즐거워했기에 그 고된 작업들을 감당했다'는 내용이다. 그렇구나. 그는 정말 자신의 일을 즐거워한 사람이었구나. 그리고 이렇게 그의 소천 후에 지인과 제자들이 나서서 일을 완수하려는 사안은 다 같이 이 일을 즐거워한 부분이 분명히 작동한 것이구나를 알았다.
이나모리 가즈오의 책 <왜 일하는가>에 보면 "천년을 생각하며 집을 짓듯이"라는 챕터가 있다.
"일은 고생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일이 얼마나 즐겁고,
일이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얻을 수 있는지 깨닫기를 바란다.
순수한 마음으로 일에 전념하길 바란다."
<베르세르크>의 재연재가 미우라 작가 및 그의 제자들, 출판사 등 함께 일한 동료들이 이 일을 즐거워한 결과라고 나는 믿는다. 미우라 작가의 유산을 모두 함께 한 것이고, 공유된 즐거움이 함께 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내가 현재 일하는 일의 영역은 다르지만 왜 일하는지를 개인마다의 시각으로 돌아보면 분명한 인사이트가 있다. 어떤 일을 하던 내가 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어렵지만 반드시 일궈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