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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다리 김밥 Jul 02. 2024

모르는 사람과 친해져 보기: INTJ의 도전

(고덕에서의 인생 후반 #5)

극도로 내향적인 나는 고덕에서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오전에는 근처 카페나 시민대학 도서라운지에서 책을 읽고, 오후에는 수영장에서 홀로 자유수영을 즐긴다. 올해 초 이사 온 고덕 아파트는 단지 내 수영장이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며칠 전 수영장에서 평화로운 일상에 금이 가는 순간을 맞이했다.


자유수영 입장권을 끊고 수영장에 들어가서 자유형 영법으로 레인을 몇 번 왕복을 했다.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옆 레인에서 한 여성분이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수영 자세에 대해 한 가지 알려드리고 싶은데요... 자유형 하실 때 손목이 너무 꺾이는 것 같아요. 중지가 앞으로 찌르듯이 하며 앞으로 뻗어야 하는데, 손이 꺾인 채로 물에 들어가더라고요."


낯을 많이 가리는 나는 순간 당황했다. 내 수영 자세는 고쳐야 할 점이 한둘이 아니다. 그걸 알려준 건 고마웠다. 그런데 수영장에서 여성과 대화하는 것은 몹시 어색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며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가 주제넘게 지적을 했네요..."

내가 별다른 리액션을 보이지 않자, 그 여성분은 대화를 끊듯이 마무리했다.


나도 대화를 자연스럽게 이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준비 부족이었다. 은퇴 후 좀 더 멋진 나를 알아가는 여정을 시작했는데, 이 좋은 기회를 날려 버렸다. 오호통재라~


나는 대학교 때 수영을 한 학기 수업으로 처음 배웠다. 그 이후로 한 번도 강습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수영 강습에서 사람들과 친해지는 것이 두렵고 어색해서 강습을 피해 왔던 거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는 사내 수영장도 있었다. 맘만 먹으면 아침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 수영을 할 수 있었지만, 아는 회사 사람과 마주칠까 무서워 수영을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과 하는 '수영장 대화'는 어떻게 하는 걸까? 바둑에서 훈수 두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은퇴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을 때, 막연히 해외여행이 가보고 싶어 졌다. 자비로 해외여행을 다녀온 적도, 여행 배낭을 내 손으로 직접 꾸려본 적도 없다.


'홀로서기' 훈련이 필요했던 나는 가까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으러 유명한 수제 햄버거 맛집, <댑버거>에 들어갔다. 러시아에서는 햄버거 집에 들어갈 때도 입구에서 외투랑 소지품을 먼저 맡겨야 했다. 어리둥절해하며 머뭇거리며 겉옷만 맡기고 둘러보니, 가게 안에 온통 러시아 사람들뿐이었다. 순간 현타가 왔다. 나는 여기 왜 온 거지.


"헉, 여기 햄버거 집에 나만 혼자야, 다 러시아 사람들이고. 나 어떡해?"

나는 당황해서 얼른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잘해봐~"

짧은 아내의 답변.


"햄버거를 주문했는데,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어. 나 너무 뻘쭘해 ㅠㅜㅜㅜ"

어디로 도망치고 싶은 심정에 아내에게 응원이라도 받고 싶어 다시 카톡을 했다.

"어쩌라고!"

짜증 섞인 아내의 답변.


"..."

나는 아내 치맛자락을 붙잡는 놀이를 그만했다. 세상은 어차피 나 혼자 헤쳐나가야 한다는 걸 실감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여행은 좋았다. 볼쇼이 발레 '지젤'도 관람하고, 루스키 섬 트래킹도 하고, 독수리 광장에서는 해지는 풍경을 5시간 동안 지켜보는 경험도 했다. 북한 젊은이들과 서로 사진도 찍어 주었다. 혼자 하는 여행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고 머물고 싶은 만큼 있다가 떠날 수 있어 좋았다. 혼자 다니는 해외여행에 재미 붙인 나는 조지아 같은 나라로 또 여행을 가보고 싶었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그리고 은퇴도 가까워지면서 조지아는 시야에서 멀어졌다. 대신 버킷리스트 후보로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몽블랑 트래킹에 관심이 갔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유튜브에서 순례길 영상을 보면, 함께 길을 걷는 동료 순례자들끼리 친해져서 음악 playlist를 서로 주고받는다든지,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든지, 인생의 꿈에 대해 대화한다는지 하는 상황들이 보였는데, 나는 이런 일에 자신이 없었다. 또다시 현타가 찾아올 것이 뻔했다. 순례길 도전은 포기했다. 대신 몽블랑 봉우리를 한 바퀴 도는 트래킹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혼자 묵묵히 걷고 또 걸으면 되니까.


낯선 이와의 대화가 무서워 혼자 걷는 여행만 선택하려는 건 어리석은 짓 아닌가? 오히려 길을 가다가 서로 어울리는 게 여행의 진정한 목적이 아닌가?




전 직장에서 임원 한분이 퇴임을 하면서 같이 일했던 후배들과 송별회 겸 술자리를 가졌다. 그분은 한 사람 한 사람 그동안의 추억을 되새기며 격려하고 아쉬움도 나누었다. 드디어 그분은 내게도 술을 따라주며 한마디 하셨다.


"솔직히 자네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

'저도 나 자신을 모르겠습니다', 나는 속으로 답을 했다.


내가 혼이 없이 나만의 색깔 없이, 마치 투명인간처럼 회사를 다녀서 그렇게 말씀하신 듯하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자기 검열이 강하고 속 생각도 많고 숨기는 것도 많은 듯하다. 나는 너무나 내성적이다. 나는 무엇이 두려워 그토록 남에게 자기표현을 하지 않는 걸까?




은퇴 후 지리산 종주(성삼재에서 출발해서 천왕봉 찍고 백무동으로 하산)와 설악산 공룡능선 종주(소공원 회귀 코스)를 다녀왔다. 남들은 그 위험한 코스를 혼자서 가다니 대단하다고 나를 치켜세운다. 은퇴 후 소일거리로 나는 왜 굳이 길고 험한 종주산행을 혼자 하려고 하는 걸까?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 아니면 자연과의 깊은 교감을 느끼기 위해서? 아니다. 그럴리 없다.


내가 글감을 얻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맨발로 검단산 오르기' 혹은 '예봉산-적갑산-운길산 연계산행'과 같은 고독한 것들이다. 힘든 산에 오르는 것은 내게 안전지대(comfort zone)와 같은 거다. 골프도 상당한 사교술과 말발이 있어야 하기에 어렵다. 나한테는 수영장에서 옆 레인 여성과 스몰토크를 주고받는 게 홀로 종주 산행을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그건 내가 극도로 내향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MBTI 성격 테스트를 해 보면 늘 외향성은 빵점이고 내향성은 만점이다. 나는 아직도 나 자신도 어색하다. 그러니 타인들과 일정 거리 이내로 가까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 힘들다.


내 인생 후반에 치명적으로 중요한 뭔가가 빠진 것 같다. 그게 뭘까?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섞고 친해져 보는 건 내 인생 최대의 골칫거리면서 동시에 도전 목표다. 생존경쟁이 벌어지는 세계에 살 때는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사는 투구게처럼 방어적일 필요도 있다. 나는 이제 은퇴했고, 더 이상 생존을 위해 살고 있지 않다. 그러니 그렇게 방어적일 필요가 없다. 지금은 진정으로 나 자신으로 사는 게 필요하다. 그런데 무엇이 나 자신으로 사는 걸 막고 있는 걸까?


내가 가진 많은 물음에 책 <인생은 혼술이다>이 답을 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쓴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책은 오랜 세월 '혼술'을 동경만 하다가, 방법을 알 수가 없어 무턱대고 수행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혼술 비법을 깨달은 작가의 경험담이다."


책에서 말하는 '혼술'은 그저 새우깡을 안주 삼아 혼자 소주잔을 들이키는 게 아니다. 이 책에서는 아늑한 선술집에 들어가 주인과도 말을 트고, 옆에 혼자 온 다른 손님과도 어울리는 인생 달관의 경지를 말한다. 백세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수행법이다. 많은 현대인들의 인생에서 결정적으로 부족한 무언가를 발견하고 기르고 갈고닦는 위대한 여정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맨몸으로 혼자 세계와 마주하는' 경험이다.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쓸쓸함 때문에 도망하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경험 말이다. 자신을 크게 보이려고 애쓰는 대신에 사람들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 지내는 것. 상대방과 호흡을 맞춰 춤을 추는 것이다.

그저 마음 내킬 때 가게에 혼자 불쑥 들어가 우연히 만난 사람들 속에 섞여 주위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무명의 한 인간으로 편안히 그 시간을 즐기면 그뿐이다.

비록 아무 말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에게 말을 걸거나 누군가가 불쑥 말을 걸어와도, 마음은 늘 열려있다. 혼자라는 것은 전방위로 열려있다는 뜻이다.


내향적인 내가 외향적인 열린 마음을 장착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나도 외향적으로 사는 게 더 재밌고 좋아 보인다는 거다. 그렇게 사는 게 더 좋아 보이면 그렇게 살면 된다.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수영장에서 옆 레인에서 쉬고 있는 사람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네보는 거다. 요즘 시민대학 수업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도 같은 길을 간다는 우정을 키워보자. 마음을 열어놓자. 모르는 사람과도 친해져 보자. 고독하고 지루한 종주산행 말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글감으로 삼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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