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 <겨울 꿈> 박호산 배우의 목소리로 듣고
2026년 1월, 밀리의 서재를 켜고 배우 박호산의 목소리로 피츠제럴드의 단편 <겨울 꿈>을 들었다. 묵직하고 씁쓸한 내레이션이 시작되자마자 문장 하나가 가슴에 박혔다.
"많이 사랑했기에 많이 고독해야 했고,
큰 꿈을 꾸었기에 크게 상실해야 했다."
이 문장은 1920년대 미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21세기의 주디 존슨, 그리고 서울의 아파트
소설 속 주인공 덱스터는 세탁업 집안의 아들이지만 상류사회의 ‘빛나는 것들’을 갈망한다. 그 정점에 있는 여자가 주디 존슨이다. 덱스터는 그녀의 변덕과 냉담함에 상처받으면서도 맹목적으로 매달린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덱스터의 모습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가 원했던 건 주디라는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최상위 포식자의 전리품. 덱스터는 주디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녀가 상징하는 ‘압도적인 반짝임’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는 2026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다. 지금 우리에게 ‘주디 존슨’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서울 상급지의 신축 아파트’ 혹은 ‘경제적 자유’라는 이름의 트로피일 것이다. 덱스터가 주디를 쫓듯, 우리는 닿을 듯 말 듯 한 자산 가치의 상승을 쫓아 청춘을 불태운다. 그 과정이 때론 비참하고 고독할지라도.
성공한 덱스터는 왜 울었나
소설의 결말은 잔인하다. 성공한 사업가가 된 덱스터는 어느 날, 주디 존슨이 늙고 시들어버렸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녀는 더 이상 빛나지 않았고, 남편에게 구박받는 평범한 아내가 되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덱스터는 비웃거나 안도하지 않는다. 대신 안락의자에 무너져 내리며 짐승처럼 오열한다.
"내 안의 무언가가 죽어버렸어... 그 꿈은 지워져 버렸어.
나는 이제 늙어버렸다고!"
피츠제럴드는 가난 때문에 첫사랑 지네브라 킹과 이어지지 못했던 자신의 상처를 이 작품에 투영했다. 작가는 덱스터를 통해, 총에 맞아 죽는 육체적 죽음보다 더 잔인한 ‘영혼의 죽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덱스터가 흘린 눈물은 낡아버린 주디가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맹목적일 만큼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수 있었던, 그 뜨겁고 찬란했던 자신의 시절이 영영 사라져 버렸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환상이 깨진 순간, 그 환상을 먹고 살던 ‘꿈꾸는 자(Dreamer)’로서의 생명도 끝난 것이다.
꿈이 변해도, 나는 살아가야 하기에
책을 덮고 생각한다. 우리가 쫓는 ‘겨울 꿈’의 대상은 언젠가 변한다. 주디의 미모가 시들 듯, 우리가 목매는 부동산의 가치나 사회적 지위도 세월과 함께 퇴색하거나 내 안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 내가 쫓던 꿈이 더 이상 빛나지 않는 순간이 오더라도, 덱스터처럼 무너져버리지는 않기를 바란다. 대상이 변했다고 해서, 그 대상을 향해 달렸던 내 열정까지 부정당하는 것은 아니니까.
뜨겁게 원했던 기억은 그 자체로 두고, 변해버린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이는 것. 안락의자에서 오열하는 대신, 식어버린 차를 마시며 "그땐 참 치열했지"라고 말할 수 있는 어른이 되는 것.
그것이 피츠제럴드가 덱스터의 눈물을 통해 우리에게 남긴, 역설적인 과제가 아닐까 싶다.
When the dream fades, we weep not for the object lost, but for the dreamer within us who has died.(26.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