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14
어디에도 도착하지 않아도
나는 매 순간
조용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누군가는 걷고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결정을 종이에 새겼지만
나는 멈춰 있는 자리에
잎사귀 하나만큼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물었다
어디쯤 가고 있냐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대답은
머무는 동안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길은 언제나
먼 데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건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창밖의 나무 한 그루
가만히 앉아 있던 내 무릎 위의 고요한 고양이
마주치는 눈빛이 잠깐 머무는 틈새
그 어딘가에서 이미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머무는 걸
게으름이라 부르고
포기라 말하지만
머문다는 건
나를 거기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내 안에 들이는 일이었다
나는 언젠가
더는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걸 알았고
그때 비로소
모든 길이 나로부터 피어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어딘가를 향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바람이 쉬어가는 창턱에 기대어
한마디 말도 없이 머무는 중에도 자라는
나의 길을
가만히 껴안아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