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12. 존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흐름 속에서 저절로 피어난다
나는
결과를 내려놓는다
마치 긴 여행 끝에
편지를 접어, 물 위에 띄우는 마음처럼..
그것은 아무런 무관심도 아니다
내 안의 모든 바람들이
한 줄기 바람으로 녹아드는 방식일 뿐..
나는 나를 다해
삶을 닦았다
빛바랜 손끝으로 하루하루를 쓸고,
꽃잎처럼 겹친 시간들을
한 장씩 바닥에 펼쳐두었다
그리고 이젠
우주의 숨결이
그 위를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불안은 어느 저녁,
햇살이 스며든 잿빛 안개처럼 다가와
내 어깨를 쓰다듬고
두려움은 파도가 창문을 두드리듯
가슴 속을 잠시 물들인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감정을 밀지 않는다
그저 앉혀두고,
찻잔처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뿐
왜냐하면
나는 감정을 ‘깨끗이 비우기 위해’
이 생을 택한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이 머물다 갈 자리를 만들기 위해
이 세계에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나는
바람과 물, 별과 숨이 되어
존재하기 위해,
그리고
깊이 사랑하기 위해 여기 왔다..
결과는 목적이 아니었다
그건
강물 위를 지나가는 한 점 빛이었고
내가 그 위에 머물다 간
한 겹 흔적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결과를 향해
몸을 던지지 않는다
이제는 흐름을 따라
내 그림자가
햇빛에 닿는 방식으로 존재할 뿐..
흐름 속에 나는 있다
그리고 그 흐름 위에서
내게로 몰려드는
모든 감정의 결들을
나는
하나의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 사랑,
사랑이라고
그러니 지금,
심장이 떨릴 만큼 두려워도
나는
이 삶을,
이 모양, 이 빛깔 그대로
가만히 껴안아주기로 했다..
왜냐하면
삶은
단 한 번도
나를 잘못된 길로 데려간 적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