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8 - 독일 로만틱가도 1 (뉘른, 로텐, 뷔르츠)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2주 남짓한 기간 동안 고모네 식구들과 함께 유럽 패키지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외국이라곤 일본밖에 다녀오지 않았던 나에게 당시 유럽의 분위기는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고 정말 재미있는 시간이었지만, 내가 계획하지 않았던 여행이었기에 다녀온 나라들에 대해 생생한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그중에서 분명히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는데, 내가 2주 동안 방문한 6개의 국가 중에서 특히 동화 같은 분위기의 독일이 가장 좋았다는 점이다.
독일은 내가 유럽에 오기 전에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상상 속의 유럽과 가장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알록달록한 집과 뾰족하고 낮은 지붕들. 파스텔톤의 옷을 입은 그 기억 속의 도시가 나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었나 보다. 웅얼거리는 듯하면서도 날카로운 발음이 귀를 이따금씩 툭툭 건드리는 독일의 발음에도 호기심을 느껴 독일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핸드폰으로 기본적인 회화들을 외워보려고 할 정도였으니까.
이번 독일 여행이 현 거주지인 덴마크를 제외하고도 4번째 여행이다. 이제 여행에 도가 틀만 한데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덩그러니 내려진 나는 여전히 어리바리했다. 한 손에는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방법이 적힌 프린트물을 들고 열차를 타기 위해 무인 티켓발권기 앞에 섰다. 그래도 발권기가 덴마크에 있는 것과 비슷하게 생겨서 조금 안심이 되었다.
새로운 땅에서 모든 게 어색했던 나는 프랑크푸르트라고 쓰인 역들 중에 어디가 중앙역인지 확인하고, 생각보다 비싼 금액에 내가 일회권을 사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때 마침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 이렇게 하는 게 맞는지 확인하고 난 뒤에야 결제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기계가 카드결제 기능이 고장 난 기계일 게 뭐람. 큰 단위의 지폐밖에 없던 나는 결국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다른 기계에서 결제를 해야만 했다. 아, 언제쯤 아무렇지 않게 이런 걸 해낼 수 있을까. 여전히 처음은 너무 어렵다.
서울 노선도 못지않을 정도로 복잡했던 독일의 열차 노선도에 감탄하는 사이 어느새 프랑크푸르트 중앙역에 도착했다. 중앙역의 분위기는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진 않았지만 눈길을 빼앗는 것들이 많았다. 그러한 것들을 뒤로한 채 우선은 짐을 내려놓을 숙소를 찾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미리 저장해둔 지도를 보며 일단 숙소를 향해 걸었다.
숙소 앞에 도착한 나는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주소를 보고 제대로 찾아오긴 했으나 에어비엔비의 예약을 친구가 해주는 바람에 호스트의 이름을 몰랐다. 그리고 현관에 보이는 15개 정도 되어 보이는 수많은 이름들. 친구가 미리 보내준 메일에는 주소를 포함한 모든 정보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호스트의 이름만 없었다. 와이파이도 안 되는 그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며 이 어이없는 상황에 괜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문뜩 올려다본 하늘에,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엔 어색함에 서로 눈을 피했고 그 남자는 베란다에서 피우던 담배를 마저 피웠다. 딱히 갈 곳이 없던 나는 그냥 우두커니 그곳에 서 있었다.
하지만, 마냥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베란다의 남자에게 소리쳤다.
"혹시, 이 아파트에 사는 에어비엔비 호스트를 아시나요?"
"아니, 잘 모르겠는데...?"
"네..."
예상했지만 실망스러운 대답이 돌아왔고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이번엔 그쪽에서 나에게 소리쳤다.
"혹시 와이파이 필요하니?"
"오! 어떻게 알았어요? 필요해요!"
"그러면 이쪽으로 돌아서 올라와!"
내가 와이파이가 필요하다는 걸 바로 알아챈 이 아저씨의 센스에 감탄하면서 나는 굉장히 흥분되었다. 완전한 로컬의 집에 이런 식으로 방문한다는 사실이 너무 웃기기도 하고 그들의 친절이 너무나 고맙기도 했다. 그리고 정말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던 그 집은 아저씨의 친절만큼이나 따듯해 보였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매우 어색해하는 나를 보며 아저씨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짐부터 내려놓고 와이파이를 쓰라 하셨다. 그와 동시에 웃는 모습이 참 매력적이던 그의 부인께서는 내게 오렌지 주스를 권했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면서 나의 어리숙함으로 인해 빚어진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하자 두 분이 배꼽을 잡고 웃었다. 그리고 자기들도 다른 사람을 이렇게 집에 들인 건 처음이라며 너무 재미있다고 한다. 오전까지 기분이 안 좋았는데 나 덕분에 기분이 좋아졌다는 부인의 말에 나 또한 부담감을 덜 수 있었다.
Thomas와 Noureen, 이 두 분은 결혼한지 그리 오래된 것 같지 않았다. 장난스러운 부인의 목소리에는 애교가 가득 담겨있었고 Thomas 아저씨도 아내의 장난에 받아칠 때마다 귀여움이 묻어났다. 마음씨 고운 이 부부는 나에게 닥친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이곳에 있어도 된다고 하는데 어찌나 고맙고 감동스럽던지.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친절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누군가에게 꼭 돌려주고 싶은 친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곳에 오래 머무는 건 민폐가 아닐까 싶어 잠시 현관에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대책 없이 1층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맨 처음 벨을 눌렀다.
벨을 누르고 신호음이 들릴 때 묘하게 긴장되었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보진 않을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도 아무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계속해서 벨을 눌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열 번째쯤 되었을까, 누군가 처음으로 대답을 했다. 조심스럽게 호스트냐고 물었고 곧바로 맞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 드디어 숙소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숙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기쁘기도 했지만 이 부부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이제 가봐야겠다고 말하려 다시 그 집에 들어가니 부인께서 점심을 만들고 있다고 먹고 가라고 하신다.
아, 절대 잊지 못할 사람들이다.
식탁에 앉아 밥을 함께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부부가 다큐에서 봤다는 한국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 독일 사람들의 성격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아이슬란드에서 오로라를 보았던 나의 여행 이야기까지. 밥을 다 먹고도 아쉬워 커피를 마시면서 또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친김에 거실에 있던 TV에 핸드폰을 무선으로 연결해 아이슬란드 사진들을 보여주었더니 올여름에 꼭 가겠다고 하신다.
이 부부와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웠다. 하지만 만남처럼 헤어짐도 자연스러워야 할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독일에 있는 동안이라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번호를 교환하고 사진을 남겼다.
이 기묘한 만남은 내가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여행이란 게 원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또 그것이 이렇게 좋은 인연을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도.
잊을 수 없는 해프닝으로 나의 여행에 큼지막한 이야기가 채워졌다는 사실에 한껏 들떠버린 나는 프랑크푸르트가 참 좋아져 버렸다. 숙소에 짐을 놓고 나오니 때마침 하늘도 개었다. 길쭉길쭉 쭉 뻗은 도로와 다리에서 보는 마인강의 풍경이 정말 멋지다. 여행 첫날부터 너무 힘을 빼면 안 되니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들만 다니며 프랑크푸르트를 맛만 보는 정도로 구경했다. (본격적인 프랑크푸르트 여행은 여섯째 날에!)
유럽에서 정말 큰 땅을 차지하고 있는 독일이지만 독일의 도시들은 크지 않은 편이다. 작은 도시들이 이어져있어서 짧은 기간 동안 비교적 많은 도시를 여행하기에 좋고, 도시가 작아서 한 도시를 보는데도 하루면 충분한 곳이 많았다. 나는 그중에서 독일에서 가장 중세스러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로만틱가도와 고성가도의 도시들이 보고 싶었기에 바이에른 제 2도시라 불리는 뉘른베르크에 거점을 두고 그 주변 도시들을 매일 한 도시씩 당일치기로 다녀오기로 했다. 독일에서 가장 먼저 철도가 개설된 곳도 바로 이곳, 뉘른베르크라 한다.
버스를 타고 뉘른베르크 중앙역 근처에서 내려 처음으로 향한 곳은 쾨니히 문이다. 드나들 수 있는 커다란 문을 기대했는데 생각보다 문 자체는 작았다. 여기에 쾨니히 문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면 그냥 탑으로만 보고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바로 옆에 붙어있다는 수공예인들의 거리로 들어가는 문도 내가 도착한 시간엔 닫혀있었다.
뾰족하고 길게 뻗어있는 성 로렌츠 교회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작은 트럭에서 몇 명의 연주자가 신나게 음악을 연주했는데 어떤 행사가 진행 중이었던 건지 궁금했다. 분위기만 보아서는 우리나라 선거 유세하는 느낌이었는데 그런 건 아니었을 테고.
박물관 다리에서 바라본 성령 양로원. 날씨가 흐려서 기대했던 만큼의 운치는 없었지만 건물 아래로 흐르는 물이 독특한 그림을 만든다.
쇠너부르넨에 달려있는 황금 손잡이를 돌리면서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한다고 하여 기대를 하고 찾았지만 분수는 공사 중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발길을 돌리려 하는 순간에 바로 옆에서 한국인 가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은 공사 중이지만 황금색 고리는 만질 수 있게 해놨어요!"
그 말을 듣고 관광객들이 지나간 후 분수 주변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까 황금색의 작은 고리를 찾을 수 있었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듯한 조악한 모양의 고리였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고리를 만지며 소원을 빌었고, 나 또한 그걸 돌리며 작은 소망을 빌었다. 임시로 만들어 놓은 그 고리에는 소망을 이루어주는 힘 따위가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나의 소망을 한 번 더 생각했고, 그 생각으로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질 확률이 조금 높아졌을 테니까.
어떤 도시를 가더라도 가장 높은 곳은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향하게 된다. 한 곳으로 모여 흘러가는 듯한 길들이 그렇게 만들고, 위에서 내려다보는 도시의 풍경은 그 속에서 보는 풍경과 사뭇 달라서 그 도시에 대한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카이져 성도 뉘른베르크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해있다. 가파른 언덕이었지만, 가파른 언덕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걸어도 금방 높은 곳까지 오를 수 있었다. 우중충했던 하늘도 조금씩 개기 시작한다.
카이져 성이 위치한 곳은 전경을 내려다볼 정도로 충분히 높지는 않았다. 담장에 기대어 까치발을 들고 남의 집 마당을 훔쳐보는 듯, 붉은색 지붕들 사이로 간간히 '독일스러운' 풍경들이 새어나왔다. 성 자체는 유럽의 다른 성들처럼 화려하거나 규모가 엄청나게 크지는 않았지만 도시를 지키고 있는 듯한 견고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도시 주변을 둘러싼 길게 이어진 성벽도 도시에 편안함과 안정감을 부여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독일의 르네상스 회화를 완성했다고 하는 뒤러가 20년 동안 살았다는 뒤러하우스와 캐논으로 잘 알려진 파할벨이 오르간 연주자로 활동했었다는 성 제발트 교회도 가보았다. 성 제발트 교회의 문에는 교회와 어울리지 않는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문 아래쪽에는 한 손에 낫을 들고 음침하게 서서 죽은 영혼들을 거느리는 사신의 모습이 있고 위쪽에는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해골이 있다. 왜 이런 무서운 문양을 교회의 문에 새겨놓은 건지 의구심이 해결되지 않은 채 예쁜 골목이라고 알려진 바이스게르버 골목으로 들어갔다.
너무 예쁘기는 한데, 이곳에 살고 있는 듯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볼 수 없어서 조금 쓸쓸해 보였던 바이스게르버 골목. 심지어 관광객들도 거의 보이지 않아서 핸드폰으로 음악을 크게 틀고 걸어도 눈치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핸드폰에서는 'Dream'이 흘러나왔고,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날씨와 강한 햇살은 노래와 이 골목 모두와 잘 어울렸다. 화려한 유원지가 폐장하고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빠져나간 것처럼 이 적막 바로 전에는 골목에 모여 떠드는 주민들과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꼭 있었을 것만 같다.
아직도 왜 그때 이 골목에 사람이 없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처음으로 저 다리가 사형집행인의 다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에는 막연하게 사형수들이 지나다니는 다리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다리 이름대로 '사형집행인'들이 다니는 다리였다. 과거 독일에서도 사형집행인(우리나라로 치면 망나니)들을 매우 낮은 신분으로 여겼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사형 집행장으로 가는 집행인들을 볼 수 없게 폐쇄적인 구조로 되어있는 것이라 한다. 밝고 활기찬 다리는 아니지만 그 주변으로 보이는 풍경은 참 운치 있고 예뻤다.
뉘른베르크에 주요 명소들을 둘러본 뒤에는 잠시 지나쳤던 중앙 마르크트 광장으로 되돌아왔다. 아까보다 훨씬 좋아진 날씨 때문에 기분도 덩달아 좋아진다. 광장이 발달한 나라로 알려진 독일에서 처음 만난 광장이었다. 우리나라의 야시장이 열린 듯 시끌벅적한 사람들 소리는 이 넓은 광장에 에너지를 꽉 채운다.
수많은 스트릿 푸드의 유혹들을 이겨내고 광장 중심으로 이동하니 예쁜 기념품들을 많이 팔고 있었다. 사촌동생들에게 줄 작은 인형들을 고르는데 용기를 내어 아저씨에게 흥정을 제안하니 가슴이 아프다는 시늉을 하면서 값을 깎아주셨다. 얼마 안 되는 금액이지만 흥정에 성공하고 나면 기분이 정말 좋아진다. 세상을 슬기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달까.
로만틱 가도 주변의 도시들을 구글에서 검색하던 중에 특별히 나의 시선을 확 빼앗는 도시가 있었다. 바로 로텐부르크였다. 오늘은 이번 독일 여행에서 가장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로텐부르크로 간다.
시리얼로 아침을 먹고 부지런히 숙소를 나와 로텐부르크로 출발하기 전에, 뉘른베르크에서 마지막으로 더 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바로 나치 전당대회장이다. 여행을 오기 전에 참조했던 블로그에서 이곳에 대해 굉장히 인상 깊었던 곳이라 설명을 해 놓았다. 나치의 광기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곳이라고. 역사책에서만 본 히틀러의 광기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트램을 타고 나치 전당대회장 바로 앞에 내렸는데 내리자마자 그 큰 규모에 놀랐다. 광각렌즈를 가져왔음에도 온전히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콜로세움을 모티브로 한 듯한 디자인과 규모. 확실히 히틀러가 얼마나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부를 보고 싶어서 돈을 내고 입장했더니 나치의 행적에 관한 역사 자료들이 굉장히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독일어로 적혀 있어서 전혀 읽을 수도 없었고, 오디오 가이드를 듣고 있자니 너무 오래 걸려서 내용은 하나도 파악하지 못했지만 잘 가꾸어진 박물관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고 공부하고 반성하는 독일의 모습이 멋있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곳에서 기대했던 만큼 히틀러의 광기를 느껴오지 못한 것 같아서 아쉬웠다. 역사적 배경과 나치의 만행으로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훨씬 더 소름 끼치는 장소가 되었겠지.
나치 전당대회장에서 트램을 타고 다시 중앙역으로 이동하여 로텐부르크로 출발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작은 마을들의 풍경들은 기차 안에서의 시간을 빨리 흐르게 해주었다.
로텐부르크의 시작을 알리는 뢰더문. 문의 크기가 '여기서부터는 아기자기한 마을입니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아직까지 갔던 도시들 중에 가장 현실과 거리가 있는 도시라는 느낌을 받았다.
뢰더문을 지나 조금 더 나아가다 보면 담쟁이넝쿨이 얽혀있는 예스러운 성벽이 나온다. 뉘른베르크의 성벽은 올라가면 무장한 경비병들이 나타나 잡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여긴 아이들이 새총 놀이를 할 것 같은 성벽이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을 단숨에 올라 성벽을 걷는데 그 안은 참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한 사람 정도만 지나다닐 수 있는 폭에, 뛰어오르면 머리를 찧을 것 같은 얕은 천장. 독일 민속촌에 온 듯한 느낌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옛날 독일로 돌아간 느낌을 준다.
성벽에서 내려와 조금 더 들어가 보면 시야가 파스텔톤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뾰족뾰족한 지붕과 개성이 넘치지만 튀지는 않는 부드러운 파스텔 톤 색깔의 벽들이 환영 인사를 건넨다. 순간 이 그림 같은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저 차가워 보이는 차들을 모조리 없애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로텐부르크의 마르크트 광장은 다른 곳들에 비해 규모가 매우 작았다. 사실 이 도시에 광장이 이보다 컸다면 오히려 그게 더 부자연스러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기자기한 도시.
색이 다른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시청사는 마르크트 광장의 고만고만한 건물들 사이에서 혼자 위엄을 뽐내고 있다. 앞의 노란색 건물은 르네상스식, 그 옆의 하얀색 건물은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나는 이 시계의 이름을 '노잼 시계'로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매 정각마다 창문이 열리고 인형극이 펼쳐진다고 하여 정각이 될 때까지 기다렸는데 ㅡ 인형이 나오긴 하는데 움직이는지 안 움직이는지 잘 보고 있어야 알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인다. 영상까지 찍어가며 보고 있는 난 너무 답답했다. '거장의 술 들이킴'이라는 뜻의 '마이스터트룽크'라는 시계의 이름이 아까울 정도로 술을 천천히 마신다. 다도라도 하는 줄 알았다!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볼만한 곳들이 많았다.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장난감 가게인 케테볼파르트의 본사가 바로 이곳에 있다. 장난감 가게 주제에 사진도 못 찍게 하길래 얼마나 대단한가 하고 봤는데, 엄청 대단하다. 이곳에서 파는 장난감은 장난감이라기보다는 예술작품들에 가깝다. 로텐부르크에 왔다면 꼭 들러보시길.
우리나라에서는 망치로 부숴먹는 슈니발렌의 고향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부드러운 빵이었다.
판타지 소설 속에 나오는 마을 같았던 로텐부르크. 예쁜 골목을 지나 초록색 집으로 들어가면 마법의 물약을 살 수 있을 것만 같다. 작은 광장, 예쁜 색깔의 집들, 아기자기한 장난감들로 가득한 이곳은 정말이지 현실감이 떨어지는 곳이다. 누군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과 가장 다른 도시를 고르라고 한다면 이런 분위기의 또 다른 도시를 방문하기 전까지는 '로텐부르크'라고 대답하게 될 것 같다.
아직까지의 여행에서는 한 도시에 단 하루만 머무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 때문에 날씨가 달라짐에 따라 도시의 다양한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맑은 날엔 맑은 대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도시의 분위기가 그에 맞게 바뀐다. 그런데 작은 도시들로 연결되어 있는 이번 독일 여행의 경우는 당일치기로 도시들을 둘러보기 때문에 그 도시의 이미지에서 날씨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높을 수밖에 없다. 도시를 방문한 날 비가 오면 머릿속에는 비가 오는 도시의 모습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나에게 박힌 뷔르츠부르크의 이미지는 '비'가 되었다.
하루 종일 비가 온 탓도 있지만, 날씨뿐만 아니라 내가 본 풍경들도 '비'를 연상하게 했다. 뷔르츠부르크에 들어서자마자 보인 풍경 중 하나는 커다란 우산을 놓은 듯한 버스 정류장이었다. 비가 오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서있던 거대한 우산. 커다란 버섯 같기도 한 지붕 아래에서 사람들은 느긋하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산까지 준비한 도시라니, 왠지 비가 다른 도시보다 많이 내리지 않을까.
왼쪽이 대성당, 오른쪽이 노이뮌스터 교회.
뷔르츠부르크에는 유난히 교회, 성당, 수도원이 많다. 마리아예배당, 노이뮌스터 교회, 성 킬리안 대성당, 하우크 수도원. 전부 독특하고 각각의 개성이 있어서 멋있긴 한데 한 도시에서 종교와 관련된 건물들을 한꺼번에 보다 보니 내부와 외부가 잘 매치가 안된다. 사진만 봐서는 어디가 어디였는지 참 헷갈린다.
뷔르츠부르크 중심가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마리엔베르크 요새가 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옷이 조금씩 젖어가는 것도 감안하고 요새를 보기 위해 언덕길을 올랐다.
여행지에서 음악을 듣고 싶을 때는 스마트폰 스트리밍 서비스가 아닌 mp3 플레이어로 듣는다. 여행을 갈 때만큼은 중학교 때부터 애지중지 사용해온 mp3를 데려가 주고 싶었기 때문일까. 하나의 짐이 늘어나는 셈이지만 나의 작은 mp3는 여행 갈 때 항상 챙겨가는 물건 중 하나다.
이번엔 한 번도 들어보지 않았던 인디 음악들을 골라서 mp3에 잔뜩 넣어 왔다. 비 오는 날 기차에서 하나씩 차례대로 듣던 중에 비 오는 날과 정말 잘 어울리는 보석 같은 노래를 발견했다.
언제나 짐이 많았던 내가
비 오는 날 외출이
너무 싫었던 내가
요즘의 내가
기다려지는 날들이 있어
비에 젖은 나뭇잎에서
나는 향기가
"안녕하신가영 - 비를 기다려" 중에서
비에 젖은 나뭇잎에서 나는 향기, 젖은 풀에서 나는 향기는 오랜만에 맡았을 때 참 좋은 향기다. 비릿한 듯하면서도 신선하고, 씁쓸한 듯하면서도 상쾌한 향기. 이슬비 속에서 노랫말을 떠올리며 흥얼거리는데 기분이 괜스레 좋아진다.
마리엔베르크 요새 자체보다는 요새를 향해 오르내리는 길이 더 좋았다. 점점 축축해지는 옷들이 자꾸 가기 싫다며 어깨를 짓누르는 바람에 내려오고 나서는 체력이 방전되었지만.
다시 시내로 돌아와서는 뷔르츠부르크의 유명한 프랑켄 와인을 맛보고, 레지덴츠 궁전에도 가보았다. 와인을 별로 좋아하진 않았는데 프랑켄 와인은 정말 맛있었다. 친절하신 사장님께서 마시기 쉬운 와인을 추천해주신 것 같았다. 함께 시킨 까르보나라에도 정말 잘 어울렸고.
뷔르츠부르크에서 뉘른베르크로 돌아오는 것으로서 독일 여행이 벌써 절반이나 지났다. 이제 남은 곳들은 밤베르크, 프랑크푸르트, 하이델베르크. 독일의 도시들이 워낙 작긴 하지만 각각의 도시의 매력들을 하루 만에 느끼기는 어려운 것 같다.
한 나라 안의 도시들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로 개성이 강했던 도시들.
다음 도시들도 기대가 많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