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민충! 흐르게 두거라.
yin 은 한글로 음, 음과 양 중에 음을 다스리는 요가인데 수업 소개는 대충 이랬다.
우리는 살면서 음과 양 중에 1프로 정도도 되지 않는 음의 기운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한다.
양은 무엇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들, 활동적인 에너지들, 가지고자 하는 욕심들이고,
음은 아무것도 가지려고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흐르게 두는
아무것도 마음속에도 머릿속에도 없는 그 순간의 아주 작은 기운인데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본능 때문에
음양을 다스리는 기운 중에 의외로 후자를 다스리는 훈련이 훨씬 어렵다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수업을 하자마자 별 동작을 하지도 않고 눈만 감고 있으니 힘들고 지루하고 짜증이 올라오다 못해 화가 났다.
도대체 이걸 왜 돈 내고 하는 거지? 아 돈 버렸다. 하는 생각
그런데 30분 정도 지났을까
어느 순간부터 화는 온데간데없고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멍~ 해졌고, 심지어 잠이 올 지경이었다.
잠이 오는 것도 막 사정없이 쏟아져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괴로운 잠이 아니라
그저 평온하게 느끼지도 못할 만큼 코 끝을 간질이며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찾아오는 휴식이었다.
그렇게 거의 2시간 동안 고작 한 여섯 동작을 한 것 같다.
대부분이 누워서 하는 동작이었는데 한 동작을 하면 그렇게 가만히 30분 정도를 있었다.
스르르 잠이 올 때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리면 슬쩍 눈을 뜨고 다른 동작으로 바꾸고
또 스르르 오는 잠을 느낄 때 즈음 또 바꾸곤 했다.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내 속의 화들이 빠져나갔다.
어떠한 유익한 동작도 배운 것 같지 않은 그 수업이 오히려 다른 요가 수업들 보다 더 기억에 남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기를 모아 장풍을 날리는 중국 영화의 한 장면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름값 할만한 역동적인 동작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기 수업 또한 멍하게 코끝에 불어오는 바람, 귀를 간지럽게 하는 새소리를 들으며 허벅지에 힘을 주기보다는 균형을 맞추어 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는
사실은 그 자세를 힘과 인내로 버텨 내는 것이 아니라 힘을 쓰지 않고도
가볍게 같은 자세를 유지하도록 몸의 균형을 잡고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수련하는 수업이었다.
발리에 오면 나도 모르게 변하고 있는 나를 느낄 수 있다.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남편 이상순 덕분에 자존감을 높이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을 본 적이 있다.
두 사람이 함께 나무 의자를 만드는 과정에서
상순이 남들이 보지 않는 의자의 아랫부분을 계속 사포 질 하고 있자 효리가 물었다고 한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의자 아랫부분을 왜 그렇게 열심히 사포질하고 있냐고
그러자 상순은 “자기가 보니깐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고 한다.
발리도 그렇다.
며칠 지내다 보면, 오? 내가? 하는 스스로 기특한 순간이 하루에도 여러 번 있다.
아무것도 아닌 소소한 행동들이라 주절주절 하다 보면 또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잠깐 나로 말하자면
갱상도 가스나 아니랄까 봐 누구보다도 급한 성격을 자랑하는 나, 욱하는 성질 하면 바로 나,
목소리 큰 사람들 그룹에 끼지 못하면 섭섭할 사람도 바로 나,
몸도 마음도, 내 건강도 세상 예민한 사람도 바로 나이기 때문에,
이런 나에게 찾아오는 작은 행동의 변화들이 특별한 것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선크림도 발리풍 드레스도 없이 달랑 요가복 수영복 대충 생겨먹은 잠옷만 챙겨 온 내가
그러면서 설거지 세제와 수세미를 바리바리 챙겨 온 예민충이 (결벽)
내 베개 위에 기어 다니고 있는 도마뱀을 보고도 '어! 도마뱀이다' 하고 넘긴 사건
샤워기에 물이 찔끔찔끔 나오는데도 별 불만 없이 그저 느긋하게 샤워를 하고 있는 지금,
세상에 급할 일 하나 없이 느린 걸음으로 다니며 느긋하게 주문을 받고
고작 아사이볼 한 그릇에 이십 분 이상 걸리는 서비스에도
'아사이를 지금 따서 오나 보지 뭐' 하고 웃고 있는 나,
케첩을 조금 더 갖다 달라는 요청에 꾸덕꾸덕한 미고랭 소스 같은 것을 가져다준 직원에게도
웃으면서 괜찮다며 쉽게 케첩을 포기하고 미고랭 소스와 오믈렛을 먹는 나. (맛없다)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지만 앞 서 섭섭하게나마 살짝 소개했던 한국에서의 나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에게나 싸움을 걸거나 하루 종일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그런 되바라진 사람은 아니지만^^
돈을 소비한 만큼의 합당한 서비스는 충분히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할 상황이 오면 따져야만 할?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 부끄럽다)
하지만
그랬던 내가 이렇게 느긋하고 여유롭고 온화하게 변하니 몇 날 며칠을 있어도 큰 소리 낼 일이 하나도 없다.
중간중간 입 꼬리가 내려간 느낌이 들면 아침에 했던 요가 수업에서처럼 의식적으로나마 입 꼬리를 다시 올리고 해피 부다 조각상처럼 온화한 표정을 지어보기로 소소한 노력도 덧붙여 본다.
발리에 오면 사방에 있는 자연을 느끼고 자연에 감사하게 된다.
내 주위에 불어오는 바람, 뜨거운 햇살, 새소리, 벌레소리, 떨어지는 꽃잎, 아침에 활짝 핀 꽃들,
그리고 발리에 오면 느긋해진다.
인내하고 기다리고 불편한 상황과 시간에도 웃으며 기다린다.
또 발리에 오면 더 이해하고 인정하게 되고 그래서 행복해진다.
그저 자연스럽게 모든 것들이 흘러가도록 1 퍼센트의 틈을 내어 주는 yin yoga 인가 보다.
내 속에 살짝 공간을 내어 보니
달콤한 바람도 통해가고 따뜻한 햇살도 다녀 가고 행복한 마음 포근한 여유도 채워진다.
그저 그렇게 있는 그대로 두면 그리고 좀 내려놓으면
내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예민하게 굴지 않으면 그냥 그렇게 흐르나 보다.
아름답게 고요하게 평온하게 흐른다.
그리고 나는 바쁜 삶 속에 의식 조차 하지 못했던 세상의 작고 소소한 것들에서
위대함을 느끼고 소중함을 느낀다.
그리고 나면 겨우 힘이나 잠깐 빼는 것으로 찾아온 그 감사함으로
나 스스로가 더 행복해지고 단단해진다.
힘겹게 용을 써서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뒷 벅지가 당겨서 곧 주저앉을 것만 같은 힘든 자세를 해도 무조건 버텨내는 것이 아니라
몸의 균형을 잡고 머리와 마음을 비워 장시간 동안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자세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Qi gong 시간에 배운 삶의 롱런 법이다.
그저 흘러가고 자연스럽게 행복과 여유가 찾아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