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로 만든 보고서, 사람이 남긴 생각

기술의 속도와 생각의 리듬

by TaeZ


시작은 사내 플랫폼팀과 다른 팀이 함께 떠나는 1박 2일 워크숍이었다.

각자 발표 주제를 하나씩 정하라길래 내가 선택한 주제는

‘AI 시대, 개인과 조직의 성장 및 생존 전략’.


하지만 일정이 취소되면서, 행사는 플랫폼팀 단독 기술 세미나로 축소되었다.

나는 조직도상 플랫폼팀 소속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팀에 파견 중이었다.

그래서 정식 발표자로 포함되지 않았고, 예비 1번, 즉 비상대기조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꼭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있었기에, 틈틈이 자료를 만들었다.

주제도 플랫폼 팀에 맞게 바꿨다.

‘AI 시대, 플랫폼 팀의 역할과 핵심 역량’.


그러던 중, 세미나를 2주 앞두고

발표자 한 명이 불참하게 되면서 정식 발표자로 참여할 수 있게 됐다.

나의 자료를 본 담당자는 나를 마지막 순서로 배치했다.


그런데 당일, 다른 발표자들의 열의가 워낙 뜨거웠다.
발표 시간이 예상보다 길어졌고, 결국 내 차례는 사라졌다.


“기술이 다가 아니다”

내가 전하고자 했던 그 결론이,
기술의 열기로 가득했던 세미나의 공기와 조금 어긋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준비한 자료는 사내 위키에 올렸다.

얼마나 봤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발표를 하지 못한 대신 이 글을 쓰고 있다.

발표는 사라졌지만,

그 과정을 통해 남은 생각들은 여전히 내 안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AI와 함께 보고서를 만들며


세미나가 끝난 뒤에도, 나는 만든 자료를 계속 다듬었다.
발표하지 못한 아쉬움 때문인지, 특유의 완벽주의가 발동한 것인지
이상하게 손이 멈추지 않았다.


AI와 함께 만든 그 보고서는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사고의 기록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첫 번째 주제였던 ‘AI 시대, 개인과 조직의 성장 및 생존 전략’의 핵심 중 하나는

"AI를 업무에 적극적으로 사용해 보라."였다.


그래서 나부터 그 말을 실행해 보기로 했다.

리서치, 구조 설계, 초안 작성, 슬라이드 제작까지

의도적으로 모든 과정을 AI 도구로 진행했다.


정보 검색은 ChatGPT와 Perplexity,

구조 설계는 Claude,

슬라이드 제작은 SkyWork.


처음엔 단순히 “AI를 잘 써보자”는 시도였지만,

곧 그 과정 자체가 AI 협업 실험이 되었다.

AI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다음 단계를 제시했다.


하지만 속도가 빨라질수록,

나는 자꾸만 한 가지를 되묻게 됐다.

“이건 정말 내 생각인가?”


AI를 사용하면서 나는 오히려 ‘사유의 밀도’를 다시 배우고 있었다.
AI가 자료를 모아주고 문장을 다듬을수록,

나는 그 문장이 내 의도를 담고 있는지 끊임없이 점검해야 했다.


AI가 사고의 속도를 높일수록,

인간은 사고의 방향을 더 명확히 해야 했다.


결국 AI는 내 사고를 대체한 게 아니라,

내 생각의 흐름을 비춰준 거울이었다.



생산성을 결정짓는 것은 기술이 아니었다


보고서를 정리하며 인용했던 연구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Microsoft의 Time Warp(2024)였다.


이 연구에 따르면,

개발자는 ‘코드 작성’ 등 핵심 개발 업무에 전체 시간의 77%를 쓰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는 58%에 불과했다.

회의, 권한 요청, 협의 등 ‘비개발 업무’가 40%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연구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이상적인 Workweek와 실제 Workweek 간의 괴리는
개발자의 생산성과 만족도를 떨어뜨리는 주요 요인이다.” — Microsoft Research (2024)


이 데이터를 보고 나는 자연스럽게 내 하루를 떠올렸다.

기술은 점점 발전하는데, 몰입의 순간은 오히려 줄어드는 것 같았다.
그때 비로소, 무엇이 진짜 ‘생산성’인지 다시 생각했다.



기술보다 환경, 팀의 리듬이 먼저다


AI를 활용하며 가장 크게 느낀 건,

결국 일의 본질은 도구가 아니라 환경이라는 점이었다.
아무리 뛰어난 AI 도구를 써도,

몰입할 수 없는 환경에서는 생산성도 깊이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AI가 개인의 속도를 높여준다면,

조직은 그 속도가 제대로 흐를 수 있는 리듬과 관계의 틀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속한 플랫폼 팀도 그런 역할을 한다.
서버나 시스템을 관리하고, 공통 기능과 자동화 툴을 만드는 기술 조직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본질은 “개발자가 개발에 집중할 수 있게, 몰입의 시간을 복원하는 팀”에 가깝다.


세미나의 앞선 여덟 개 발표는 모두 기술 이야기였다.
신기술 소개, 클라우드 구성 전략, 자동화 방안.
물론 기술 세미나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흐름을 지켜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AI 시대에 정말 기술만으로 충분할까?”


AI는 이미 기술의 경계를 넘어

‘사람이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고 있다.
도구는 점점 똑똑해지는데,

정작 사람과 팀의 리듬은 더 쉽게 흐트러진다.



기술의 발전 속도가 유례없이 빨라진 시대에


AI 시대에 기술의 발전 속도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다.
매일 새로운 도구가 등장하고,
어제의 최적화가 오늘은 구식이 된다.


하지만 기술의 속도에만 매달리는 건, AI 시대에 가장 위험한 태도다.

AI가 바꾸는 것은 ‘기술의 종류’가 아니라, ‘일의 방식’이다.


속도만 좇는 조직은 방향을 잃는다.
도구보다 중요한 건, 그 도구를 문화로 연결하고 환경으로 확장하는 일이다.

기술에만 시야가 매몰된 조직은, 결국 AI 시대의 리듬을 잃는다.
AI 시대의 생산성은 기술적 효율이 아니라,

사람이 기술을 통해 몰입할 수 있는 환경과 관계에 달려 있다.



빠르게 완성했지만, 더 오래 남은 생각


AI 덕분에 보고서는 평소보다 세 배는 빠르게 완성됐다.
하지만 그 결과보다 더 오래 남은 건 ‘생각의 잔향’이었다.

완성의 순간보다, 그 과정의 되새김이 더 깊었다.


AI가 초안을 제시했지만,

그 문장의 방향과 의미를 결정하는 일은 여전히 내 몫이었다.

그 과정이 마치 플랫폼 팀이 만든 도구를

개발자들이 각자의 문화로 녹여내는 과정과 닮아 있었다.


AI가 제시한 문장들은 도구에 불과했다.

그 도구를 맥락화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였다.

AI가 속도를 높여줄수록,

나는 오히려 더 천천히, 더 깊이 생각하게 됐다.


발표는 취소됐고, 세미나는 끝났지만

그 과정을 통해 남은 생각은 지금도 내 안에서 천천히 흐른다.


기술은 속도를 바꾸지만, 사람은 방향을 지켜야 한다.



인용 출처

Microsoft Research (2024), Time Warp: The Gap Between Developers’ Ideal and Actual Workweeks in AI-Driven Era

Google Research (2019), What Predicts Software Developers’ Productivity?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음악으로 풀어보는 AI 시대 개발의 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