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할 것을 알면서도 매일 아침 질서를 세우는 투쟁
우주의 모든 법칙 중 가장 잔인하고도 절대적인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영화 <테넷> 덕분에 널리 알려진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이다.
간단히 말해 우주는 가만히 두면 무질서해진다. 뜨거운 커피는 식어가고, 잘 정돈된 방은 어지럽혀지며, 정교하게 짜인 코드는 낡아간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는 늙고 병들어 결국 흙으로 흩어진다.
자연의 화살표는 명백히 ‘붕괴’와 ‘죽음’을 가리키고 있다. 이것이 우주의 기본값이다.
개발자인 나는 매일 이 엔트로피와 싸운다. 새로운 기능을 추가하면 버그가 생길 확률이 늘어난다. 서버는 가만히 놔두면 트래픽을 견디지 못하고 뻗어버린다. 내가 키보드를 두드려 질서를 부여하지 않으면,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셧다운을 향해 달려간다.
삶도 마찬가지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집은 어김없이 어질러져 있다. 아이를 씻기고, 장난감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힘들게 원상 복구해 놓으면 내일 아침 다시 어질러질 것을 안다. 관계도 그렇다. 끊임없이 연락하고, 마음을 표현하고, 보수하지 않으면 관계는 소원해진다.
때로는 허무함이 밀려온다. 어차피 어지러워질 방을 왜 치우는가? 어차피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육체를 왜 이토록 열심히 관리하는가? 어차피 잊혀질 코드를 왜 밤새 리팩토링하는가?
우리는 거대한 우주의 섭리 앞에서 매일 지는 싸움을 반복하는 시시포스들이다.
하지만 물리학에는 흥미로운 예외가 있다.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는 증가하지만, 에너지를 투입한 특정 공간 내부에서는 일시적으로 엔트로피를 낮출 수 있다.
이것이 생명의 정의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라는 자연스러운 무질서에 저항하여, 에너지를 태워 고도의 질서를 유지하는 상태다. 심장이 펌프질을 하고, 세포가 재생하며 형태를 유지하는 것. 그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위대한 반역이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투쟁이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이불을 개는 행위, 출근해서 엉망인 코드를 정리하는 행위, 화난 아이를 달래서 다시 웃게 만드는 행위. 이 사소한 일상은 우주의 붕괴에 맞서 국지적 질서를 만들어내는 숭고한 작업이다.
브런치북 40개의 글을 관통하는 주제, 이성적 낙관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두 잘 될 거야"라는 막연한 희망이 아니다. 오히려 "결국은 무너질 것이다"라는 차가운 이성을 바탕으로 한다.
우리는 안다. 언젠가 이 서버는 종료될 것이고, 내가 만든 질서는 다시 무질서로 돌아갈 것이다. 나 또한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 패배가 예정된 결말일지라도, 오늘 하루치만큼의 질서를 기꺼이 세우겠다는 태도. 무너질 모래성인 줄 알면서도, 오늘 가장 아름답고 견고한 성을 쌓고야 마는 의지.
그것이 내가 정의하는 낙관이다. 비관이 지성이라면, 낙관은 의지다.
우주의 붕괴를 늦추고,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불어넣는 유일한 에너지원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랑은 비효율적이다. 내 에너지를 태워 남을 살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에너지가 투입될 때, 아이는 자라나고, 관계는 회복되며, 삭막한 세상 한구석에 따뜻한 질서가 생긴다.
우리는 앱이 아닌 플랫폼이 되기로 했다. 타인을 위해 나의 리소스를 내어주는 그 행위야말로 엔트로피를 거스르는 가장 강력한 코드다.
40일간의 여정을 마친다. 나는 다시 개발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모니터 앞에는 해결해야 할 버그가 있고, 거실에는 아이가 어질러 놓은 장난감이 가득하다.
세상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미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나에게는 혼돈을 질서로 바꿀 ‘코드’가 있다. 무너진 것을 다시 세울 ‘복원력’이 있다. 그리고 내 곁에는 서로의 버그를 안아줄 ‘사람’들이 있다.
우주는 무질서를 원하지만, 우리는 끝내 사랑을 할 것이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결론이다.
System.exit(0);
Process finished with exit code 0
⸻
내 언어 출력 장치에는 치명적인 버그가 있다. “부산 남자”라는 낡은 레거시 운영체제로 구동되기 때문이다. 이 시스템은 오글거리는 감정 표현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자꾸만 에러를 뱉어낸다. 한번은 아내와 함께 부모님께 스피커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마무리될 무렵, 부모님과 아내는 “사랑한다” 그리고 “저도 사랑해요”라는 따뜻한 데이터 패킷을 주고받았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수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고 아내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논리적으로 볼 때 나 역시 동일한 프로토콜로 응답해야 하는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그 단어를 뱉어내기 위해 입술을 달달 떨었다. 하지만 내 시스템은 이 과도한 감정 데이터를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전혀 엉뚱한 기본값을 리턴해 버렸다.
“네, 수고하세요.”
전화를 끊고 난 뒤 아내에게 등짝을 맞았다. 세상에 부모님한테 수고하라고 인사하는 자식이 어디 있느냐는 핀잔을 들으며, 다음에는 꼭 사랑한다고 말하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요즘 200일 된 아기를 품에 안고 있으면 불현듯 그 수고하시라는 인사가 떠오른다. 이 작은 생명체의 눈을 들여다보며, 30년 전 나의 부모님도 나를 안고 정확히 이런 기분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무거운 책임감과 깃털처럼 가벼운 행복을 동시에 느끼며 나를 키워내셨을 것이다. 자식을 낳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라는 존재의 백엔드를 이해하게 된다. 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행했을 수많은 예외 처리와 디버깅의 시간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고 있다.
내 출력 장치는 여전히 버그투성이라서 내 마음속의 데이터를 화면에 있는 그대로 띄워주지 못한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여전히 투박하고, 나는 앞으로도 무뚝뚝한 아들일지 모른다. 하지만 UI가 조금 불친절하다고 해서 그 안의 데이터까지 거짓인 것은 아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기에, 여기 소스 코드 깊은 곳에 주석으로 남겨둔다.
// 어머니, 아버지.
// 고생 많으셨습니다.
// 아니, 사랑합니다.
ta.f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