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정지된 목록

by TAFO

오후 7시 8분.


거실에 남은 사물들은 명확히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당장 오늘 밤 손을 대어 치워야 할 것들과, 며칠쯤 더 모른 척 내버려 두어도 좋을 것들.


검은 상복이 구겨진 채 담긴 종이 상자 두 개, 낯선 이름들이 빼곡히 적힌 부의금 봉투 두 묶음, 장례식장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대형 서류 봉투와 부의금 정산표. 반쯤 채워진 50리터 종량제 쓰레기봉투 입구에는 근조 화환에서 떼어낸 검은 띠지 한 줄이 위태롭게 걸려 있었고, 식탁 한쪽에는 그녀의 휴대전화와 죽은 남편의 휴대전화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상자 밖으로는 검은 넥타이 끝이 삐져나와 있었고, 정산표 아래에는 신용카드 크기의 안내문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소파 팔걸이에는 남편이 마지막으로 벗어둔 짙은 회색 재킷이 아직 그대로 걸쳐져 있었다. 텅 빈 스탠드 행거 아래, 맨바닥에는 철사 옷걸이 두 개만이 나란히 굴러다녔다.


그녀는 식탁 의자에 주저앉아 정산표 위에 얹혀 있던 봉투 묶음을 옆으로 툭 밀어냈다. 팽팽한 고무줄에 눌린 자국이 맨 위 봉투 가장자리를 따라 깊게 파여 있었다. 두꺼운 정산표를 들추자, 가려져 있던 빳빳한 안내문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냈다.


[ 유가족 정리 지원 ]
서비스: 바벨
이용 기간: 등록 후 30일 (무료)
가능 항목: 대화 복원 / 기록 확인 / 정리 제안
필요 서류: 가족관계 확인, 사망 확인, 데이터 이용 동의


그녀는 안내문을 뒤집어 뒷면의 작은 글씨들까지 훑었다. 장례식장 접수번호와 접속용 QR 코드 아래로, '지원 불가 항목'이 먼저 냉정하게 적혀 있었다. 법률 분쟁, 상속 비율 조정, 의료 판단은 지원하지 않음. 그 아래에는 유품 정리의 우선순위 설정, 물품 보관 여부 결정, 연락처 정리는 지원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다. 등록은 유가족 본인의 기기에서 시작하며, 배우자 인증을 거친 뒤 고인의 기기를 직접 연결해야 한다는 건조한 절차가 마지막에 붙어 있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오열하지도, 위로해 줄 다른 이의 이름을 찾지도 않았다. 그녀는 안내문을 식탁 오른쪽 끝으로 밀어 두고, 묵묵히 자기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카메라를 켜고 QR 코드를 화면 한가운데에 맞췄다. 노란 인식 테두리가 코드를 붙잡자 브라우저 연결 문구가 떠올랐다. 링크를 누르자, 지나치게 새하얀 바탕의 등록 화면이 열렸다.


[ 등록 시작 ]
바벨 서비스는 유가족 본인의 기기에서 시작됩니다.
고인 기기 연결 및 데이터 이용 동의가 완료되어야 서비스가 활성화됩니다.


화면 하단의 파란 [등록] 버튼은 길고 반듯했다. 그녀는 엄지손가락을 그 위에 올린 채 잠시 숨을 참았다. 식탁 위에는 아직 뜯지 않은 부의금 봉투 묶음이 쌓여 있었고, 상자 밖으로 삐져나온 넥타이 끝은 바닥을 향해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었다. 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웅웅 소리가 한 차례 커졌다가 이내 잦아들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뗐다가 다시 버튼 한가운데에 올렸고, 그제야 꾹 눌렀다.


첫 단계는 배우자 인증 서류 제출이었다. 화면에는 제출 서류 예시와 함께 촬영 팝업이 떠 있었다. 그녀는 장례식장 로고가 박힌 대형 서류 봉투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꺼운 마분지가 식탁 바닥을 긁으며 서걱거렸다.


봉투 안에서 가족관계증명서와 사망진단서 사본을 한 장씩 꺼냈다. 한 인간의 영구적인 부재를 증명하는 그 종이들은, 구겨지거나 접힌 자국 하나 없이 지나치게 빳빳했다.


그녀는 부의금 봉투와 정산표를 한쪽으로 밀어버리고 식탁 모서리에 빈 공간을 만든 뒤, 가족관계증명서를 먼저 펼쳐 놓았다. 휴대전화를 들어 촬영 버튼을 누르자 카메라 프레임이 열렸다. 문서 네 모서리를 맞추자 테두리가 초록색으로 바뀌려다, 펜던트 조명의 그림자가 문서 오른쪽 아래를 스치자마자 붉은 오류 표시가 떴다.


종이 끝을 손가락 두 개로 집어, 그림자가 닿지 않는 쪽으로 조금 당겼다. 다시 프레임이 고정되고 [촬영] 버튼이 활성화되었다. 셔터 소리 대신 짧은 진동과 함께 '저장됨' 문구가 스쳤다. 이어 사망진단서를 같은 자리에 놓은 뒤, 남편의 이름과 사망 일시가 중앙에 오도록 렌즈 각도를 맞췄다. 손안에서 짧은 진동이 한 번 더 울렸다.


서류 업로드가 끝나자 화면이 부드럽게 전환되었다.


[ 고인 기기 연결 ]
이제 고인의 휴대전화 잠금을 해제하고,
화면의 연결 승인 버튼을 눌러 주세요.


그녀는 자기 휴대전화를 식탁에 내려놓고, 그 곁에 미동 없이 누워 있던 남편의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측면 전원 버튼을 누르자 액정 왼쪽 상단의 미세하게 금이 간 틈새로 서늘한 불빛이 배어 나왔다. 배터리 잔량은 18퍼센트였다.


잠금 화면 중앙에는 부재중 전화 두 건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고 당일 저녁 6시 41분, 그리고 6시 43분.


둘 다 그녀가 걸었던 전화였다.


그녀는 액정 위에 멈춰 있는 그 시간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저녁 6시 41분. 사고가 난 곳은 집에서 차로 고작 이십 분 거리의 교차로였다. 그 시간에 남편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끝내 전화를 받지 못했는지, 그녀는 아직 알지 못했다. 알림을 지우지도 않은 채, 익숙한 비밀번호 여섯 자리를 하나씩 꾹꾹 눌렀다.


배경화면이 나타나기 무섭게 화면 전체를 덮는 팝업창이 떠올랐다.


[ 바벨 기기 연결 요청 ]
배우자 기기에서 데이터 접근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승인하시겠습니까?


그녀는 팝업 하단의 [승인] 버튼을 눌렀다. 남편의 휴대전화에는 '연결 대기 중'이라는 문구만 남았다. 기기를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 다시 자기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은 이미 다음 단계의 입력을 요구하고 있었다.


[ 불러올 데이터 범위 설정 ]

말투와 대화 기록

생활 패턴과 동선

판단 습관


기본적으로 활성화된 항목은 첫 줄뿐이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향했다. 팔걸이에 걸쳐진 남편의 재킷을 들어 상복 상자 위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왼쪽 어깨에는 며칠 새 옅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고, 안주머니 쪽은 무언가 든 듯 조금 불룩했다. 소매 끝 단추는 한쪽만 채워진 상태였다.


그녀는 재킷의 앞섶을 손끝으로 길게 쓸어내린 뒤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둘째 줄, '생활 패턴과 동선' 옆의 빈 원을 눌렀다. 파란 체크 표시가 채워졌다. 손가락이 셋째 줄로 내려갔다. '판단 습관'. 마지막 체크가 생기자 화면 하단의 안내 문구가 바뀌었다.


[ 안내 ]
생활 패턴과 판단 습관을 함께 불러오면 유품의 정리 순서, 보관 여부, 일정 조정까지 제안받을 수 있습니다.


그녀는 그 기계적인 문장을 끝까지 읽은 뒤 [다음]을 눌렀다.


[ 기록 연동 및 데이터 수집 동의 ]
메시지 / 통화 기록 / 사진첩 / 결제 내역 / 위치 정보 / 수면 및 건강 데이터 / 일정표


각 항목 오른쪽에는 세부 수집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꺾쇠 메뉴가 접힌 채 붙어 있었다. 그녀는 어느 하나 펼쳐 보지 않았다. 화면 맨 아래의 [전체 동의] 버튼을 눌렀다. 파란 체크 표시가 위에서부터 한 줄씩 빠르게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한 인간의 내밀한 삶의 궤적이자 사적인 기록이었던 것들이, 버튼 하나에 오늘 밤 유품 정리 순서를 묻기 위한 행정 데이터로 바뀌어 버렸다.


[ 데이터 동기화 및 분류 중 ]
기록을 불러오고 분석하는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화면 정중앙의 얇은 진행 막대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메시지, 통화, 결제 내역, 위치 정보가 차례로 깜빡이며 시스템으로 넘어갔다. 막대는 절반에 못 미친 지점에서 한 차례 멈칫했다. 손바닥에 닿은 휴대전화는 연산열로 인해 서서히 달아올랐지만, 거실의 공기는 여전히 차갑고 무거웠다.


그녀는 상복 상자 쪽으로 몸을 틀었다. 밖으로 늘어진 검은 넥타이를 집어 들었다. 구겨진 끝단을 손바닥으로 펴려다 멈추고는, 그대로 상자 안으로 쑥 밀어 넣었다. 쓰레기봉투 입구에 걸린 근조 화환 띠지도 손끝으로 한 번 건드려 보았지만 굳이 떼어내지는 않았다. 시계 초침이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집 안의 사물들은 조금도 제자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사이 진행 막대는 두어 번의 멈춤과 재개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끝에 닿았다. 화면 상단의 시각은 7시 22분을 지나고 있었다.


로딩 막대가 사라지고, 화면 하단에서 텍스트 입력창이 미끄러지듯 올라왔다.


[ 바벨 ]
질문을 입력해 주세요.


그녀는 첫 문장을 적었다.


왜 그날, 내 전화 안 받았어


화면을 잠시 내려다보던 그녀는, 백스페이스 바를 길게 눌렀다. 글자들이 하나씩 지워지다 마지막 글자 하나까지 깨끗하게 사라졌다.


비워진 입력창 위로 두 번째 문장이 들어왔다.


이제 뭘 먼저 치워야 해


그녀는 휴대전화를 든 채 거실을 다시 둘러보았다. 상복 상자 위에 얹힌 재킷, 식탁 위의 대형 서류 봉투와 부의금 봉투 묶음, 바닥에 나뒹구는 철사 옷걸이 두 개와 텅 빈 행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막막한 사물들이 시야에 턱턱 걸렸다.


그녀는 다시 백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이윽고 세 번째 문장이, 가장 사소하고 가장 건조하며 구체적인 질문이 입력창을 채웠다.


재킷은 이제 어떻게 할까


입력창 옆의 전송 버튼이 파랗게 불을 밝혔다. 그녀는 그 위에 손가락을 올린 채 다시 멈춰 섰다. 화면에 드리운 손가락 그림자는 정지해 있었고, 상복 상자 위의 재킷과 쓰레기봉투에 걸린 띠지도 미동 없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녀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뒤, 마침내 버튼을 눌렀다.


[ 처리 중 ]
답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건조한 문구가 뜬 뒤에도 그녀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손바닥 아래쪽이 뜨거워진 단말기 하단을 꽉 감싼 채, 그녀는 화면 오른쪽 아래의 점 세 개가 일정한 간격으로 명멸하며 거실의 긴 침묵을 조금씩 메우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