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0시 12분.
서림 빌딩 지하 3층 주차장.
그녀는 시동이 켜진 운전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계기판의 푸른 불빛만이 어두운 차 안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었다. 브레이크 페달에 올려둔 발끝으로 엔진의 미세하고 규칙적인 떨림이 전해졌다.
기어를 D로 옮기려던 찰나, 센터페시아 거치대에 꽂힌 휴대전화 화면이 밝아지며 긴 진동이 울렸다.
[ 문서 수신: 박광인 대표 (스튜디오 안개) ]
제수씨, 상중에 연락드려 정말 죄송합니다만 고인께서 생전에 제게 직접 약속하신 변제 건이 있어서요. 저희 회사도 지금 당장 도산 위기라, 남겨두신 각서대로 기한 내에...
그녀는 운전대에서 떨리는 손을 떼어 천천히 거치대 쪽으로 뻗었다. 메시지 전문을 다 열어보기도 전에 숨이 조금 가빠졌다.
지하 창고에서 플라스틱 상자의 뚜껑을 닫을 때까지만 해도 정리되었다고 믿었던 남편의 부채와 죄책감이, 몇 줄의 문자로 다시 현실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박 대표가 말한 약속과 각서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녀는 조금 전 1207호 안에서 이미 보았다. 남편이 붉은 펜으로 수백 번을 고쳐 쓰다 멈춘 문장들. 누군가에게 끝내 돌려주지 못한 책임과, 마지막까지 마무리하지 못한 사과들.
그녀가 땀이 밴 손가락으로 메시지 앱을 채 열기도 전에, 바벨이 먼저 화면 위로 조용히 치고 올라왔다.
[ 바벨 알림: 분쟁 사전 차단 ]
발신인 '박광인'의 메시지에서 재무 청구 패턴이 감지되었습니다.
준비된 대응 초안을 먼저 확인하시겠습니까?
[대응 초안 보기 및 발송]
그녀는 박광인의 장문을 끝까지 읽지 않았다. 대신 파란 테두리의 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매끄럽게 전환되며, 시스템이 남편의 과거 메일 내역과 법인 통장 기록을 조합해 작성한 문장이 메시지 입력창에 채워졌다.
[ 자동 응답 ]
"고인의 배우자입니다. 귀하께서 언급하신 '도의적 변제'와 관련하여, 고인의 생전 법인 계좌 및 개인 금융 기록상 귀하와의 법적 채무 관계는 존재하지 않음을 명확히 확인했습니다. 현재 상속 재산에 대한 법무법인의 실사가 진행 중이므로, 개인적인 감정에 호소하는 연락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이후의 모든 청구는 법적 효력이 있는 서류를 통해서만 접수합니다."
남편을 잃은 슬픔도, 남편의 죄책감에 대한 아내로서의 미안함도 모두 지워져 있었다. 오직 상대를 멈추게 만들 가장 합법적이고 건조한 형식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문장을 한 줄씩 눈으로 훑어 내리다가, 끝까지 다 읽기도 전에 전송 버튼을 눌렀다.
노란 말풍선이 화면 위로 휙 올라갔다. 전송 시각 10시 15분.
곧이어 숫자 '1'이 화면 옆에 떴다.
차 안에는 히터 모터 소리만 낮게 울렸다. 그녀는 화면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기계가 대신 써 준 저 문장이 절박한 상대를 더 자극할지, 아니면 여기서 멈추게 할지 아직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잠시 뒤, 노란 숫자 1이 스르륵 사라졌다.
화면 상단에 '박광인 대표 님이 입력 중입니다...'라는 작은 문구가 떴다가 허무하게 사라지기를 두어 번 반복했다.
액정 너머의 한 인간이 어떤 문장을 쓰다 지우고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방금 전보다 기세가 꺾이고 느려졌다는 것만은 보였다.
10시 18분.
마침내 수신된 답장은 맥이 빠질 정도로 짧은 두 줄이었다.
확인했습니다. 관련 서류를 정리해 다시 전달드리겠습니다.
상중에 연락드린 점은 거듭 송구합니다.
그녀는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졌던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꽉 막혀 있던 숨이 안도감과 함께 조금 길게 빠져나왔다.
남편이 몇 해 동안 붙잡고도 끝내 정리하지 못한 문제를, 바벨이 만들어 낸 몇 줄의 차가운 문장이 먼저 멈춰 세웠다. 그 기계의 문장은 남편이 지하 창고에서 실제로 느꼈던 책임감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아내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만큼 충분한 효력이 있었다.
화면 하단에서 바벨의 새 알림이 조용히 떠올랐다.
[ 대응 완료 ]
동일 발신인의 후속 연락 수신 시, 같은 기준의 법적 대응 초안을 유지합니다.
[확인]
그녀는 액정을 한 번 꾹 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굳은 손을 기어로 옮겨 D에 맞췄다.
남편이 찢어발긴 채 봉인해 버린 진심은 여전히 저 서늘한 지하 창고 어딘가에 남아 있었지만, 오늘 밤 지친 그녀를 집까지 데려갈 '정답의 문장'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