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11시 42분.
거실은 다시 고요했다. 남편의 4분 12초짜리 음성 파일을 보류 목록으로 옮겨 둔 뒤, 그녀는 식탁에 앉아 얼음물을 한 모금 마셨다.
장례식장과 서림 빌딩, 박광인의 빚 독촉 메시지, 1207호의 보관함까지. 오늘 밤은 너무 많은 것을 열어 본 뒤였다. 그리고 그만큼 많은 진실을 다시 덮어 두기로 선택한 밤이기도 했다.
짧은 진동이 식탁 위를 울렸다.
뒤집어 두었던 휴대전화를 다시 돌리자, 새 문자가 떠 있었다.
[ 문서 수신: 경기고양경찰서 교통조사계 ]
[웹발신]
고(故) 한정우 님의 유가족께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사고 조사 종결을 위해 유가족의 서면 진술서 및 현장 유품 인계가 필요합니다.
내일 오전 중 방문 가능 여부를 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녀의 미간이 좁혀졌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절차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다. 내일 당장 경찰서에 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차가운 조사실 의자,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사고 경위, 남편이 죽어가던 순간에 대한 질문들. 오늘 밤 기계를 통해 겨우 제자리를 찾은 평온이 다시 깨질 것만 같았다.
화면 하단에서 익숙한 회색 답변 블록이 천천히 밀려 올라왔다.
[ 바벨 제안: 수사기관 대응 보조 ]
"내 사고 당시 차량 로그와 블랙박스 기록을 바탕으로 제출용 진술서 초안을 정리해 뒀어. 내일 직접 가서 설명하기 전에, 먼저 보낼 문장을 내가 준비할까?"
바벨의 출력은 여전히 남편의 다정한 말투를 빌리고 있었다. '내 사고', '정리해 뒀어', '준비할까'.
그녀는 화면을 한참 동안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처음 이 거실에 앉았을 때만 해도 이 가짜 말투가 간절히 필요했다. 낯선 장례 절차와 남편의 빈자리를 견디게 해 주는 완충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하 보관함을 열고, 남편이 남긴 엉킨 흔적을 마주하고, 그 흔적을 다시 기계가 몇 줄의 건조한 정리본으로 눌러 버리는 과정을 겪고 나니, 저 다정한 흉내는 오히려 거추장스럽고 불쾌했다.
그녀에게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죽은 남편의 위로가 아니었다. 경찰의 귀찮은 요구를 가장 적은 말로, 가장 빈틈없이 처리해 줄 '완벽한 문장'이었다.
그녀는 제안 블록 아래의 승인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대신 화면 오른쪽 위의 작은 톱니바퀴 아이콘을 눌렀다.
[ 바벨 서비스 설정 ]
이용 기간: 등록 후 30일 (무료)
화면을 아래로 쓸어내리자, 출력 모드를 제어하는 핵심 항목이 나타났다.
[ 출력 페르소나 설정 ]
활성화 시 고인의 평소 말투, 화법, 감정적 뉘앙스를 정밀하게 재현합니다.
고인 말투 재현 [ON]
감정적 위로 모드 [ON]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첫 번째 스위치에 닿았다. 파란색으로 켜져 있던 표시가 잿빛 회색으로 바뀌었다. 이어 두 번째 스위치도 꺼버렸다.
화면 상단에 '설정이 변경되었습니다'라는 짧은 기계적 알림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다시 홈 화면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떠 있던 제안 블록이, 완전히 다른 문장으로 차갑게 재정렬되어 있었다.
[ 바벨 제안: 수사기관 대응 보조 ]
고인의 사고 당시 차량 로그 및 블랙박스 기록을 바탕으로 제출용 표준 진술서 초안이 작성되었습니다.
사전 제출 및 후속 문의 대응 보조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나'라는 주어는 완전히 사라졌다. '할까?'라는 다정한 물음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화면에는 더 이상 죽은 남편의 온기 잃은 그림자가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철저한 '절차'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기계적인 문장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어깨에 들어가 있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바로 이쪽이었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살아있는 자와의 대화가 아니라, 죽은 자의 흔적을 치워버리는 '처리'였다.
그녀는 화면 하단의 파란 [진행] 버튼을 꾹 눌렀다.
[ 안내 ]
공공기관 대상 문서 제출 보조 및 후속 문의 대응 기능은 '유가족 무료 지원(30일)' 범위를 초과하는 고급 기능입니다. 계속하시려면 [프리미엄 대리인 플랜]으로 업그레이드해야 합니다.
월 정기 결제: 55,000원
결제 수단을 등록하시겠습니까?
오후 11시 49분.
그녀는 식탁 위에 놓인 지갑을 조용히 열었다. 1207호 결제 수단을 변경할 때 꺼냈던 것과 똑같은 신용카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오늘 밤 바벨은 남편의 지저분한 흔적을 대신 읽었고, 빚쟁이 박광인에게 보낼 칼 같은 답을 대신 정리했으며, 이제는 경찰서에 제출할 법적 문장까지 완벽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금 당장 지불하려는 5만 5천 원은, 남편과의 아름다운 추억을 보존하기 위한 숭고한 비용이 아니었다. 죽음과 상실이 남긴 피로와, 인간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윤리적 판단의 무게를 외부로 밀어내기 위한 '마취 비용'에 가까웠다.
그녀는 카드 번호를 빠르게 차례로 입력했다.
[ 결제 완료 ]
프리미엄 대리인 플랜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경기고양경찰서 제출용 표준 진술서 초안이 등록되었습니다.
추가 요청 수신 시 검토용 대응 초안을 우선 생성합니다.
화면 맨 아래의 입력창 커서가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였다.
거실에는 남편의 재킷이 걸린 행거, 테이프로 빈틈없이 밀봉된 부의금 상자, 그리고 기계에게 자신의 다음 판단을 계속 넘길 준비가 된 그녀만이 조용히, 아주 평온하게 남아 있었다.
자정까지 3분 남짓.
바벨은 더 이상 죽은 남편을 흉내 내는 값싼 위로 장치가 아니었다. 공문과 양식, 문의와 회신 사이에 인간보다 먼저 서늘한 문장을 밀어 넣는 '유료 대리인'이 되어 있었다.
< 제1부. The Widow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