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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루 Apr 29. 2024

서른의 감상, 낡고 지친 직장인에게 추천합니다

판타지 드라마 3편

지친다. 출근길 전철에서 내가 의지할 수 있는 건 품에 안은 백팩뿐이다. 아침에 사람이 가장 솔직해진다고 하던데, 눈만 겨우 떠서 회사로 향하는 동안 내가 하는 생각은 뻔하다. '아, 회사 가기 싫다…' 좁은 열차 안에서 누구라도 마주칠까 두려워 눈을 꾹 감는다. 통근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은 생각할 시간이 길어진다는 것. 잡생각을 떨치려 손에 든 핸드폰 속에는 연예계 소문들이 무성하다.


피곤하다. 누가 누구와 사귀다 헤어졌다느니, 누가 누구에게 무례하게 굴었다느니, 또 누구는 마약을 하고, 누구는 성범죄를 저질렀거나, 또 누구는 음주 운전을 했단다. 온 우주가 나를 멍청하게 만들기 위해 수작질을 하는 것 같다. 나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고, 또 불특정 다수에게 욕먹는 상황이 유쾌하지도 않은데, 낄낄거리며 상황을 관전하고 있는 내가 참 싫다.


질린다. 가뜩이나 치열하게 살아가느라 내 인생에는 온갖 갈등이 끊이질 않는단 말이다. 예전에는 기꺼이 소비했을 이런저런 가십이 꼴 보기가 싫다. 내게 필요한 건 잠깐이라도 조용히 혼자 즐거울 수 있는 시간이다. 그래서 다양한 판타지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 나를 현실에서 동떨어지게 해 줄, 심각한 사건이 없고 정말 유치하면서 말랑말랑하며 가볍고 산뜻한 그런 이야기들만이 나를 위로하는 요즘이다.



드라마 <Eye Love You>
아이 러브 유(일본, 속을 모르겠는 남자는 네가 처음이야)

일본 여성들의 한국 남성에 대한 판타지를 가득 담은 작품이다. 한국 남자 배우 “채종협”이 윤태오 역할로 출연한다. 태오는 대학원에 다니며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는 학생이다. 배달음식을 많이 시켜 먹는 “유리”는 초콜릿 회사 사장인데, 둘은 모종의 사건으로 안면을 트게 된다. 그 후 일사천리로 둘은 ‘썸’을 타게 되고, 이 과정에서 유리는 그동안 일본인에게서 느껴보지 못한 솔직하고 저돌적인 외국인 연하남에게 강한 매력을 느낀다.


태오가 갑자기 유리의 집 앞에 찾아가서 나오라고 하거나, 대뜸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거나(일본 문화에서는 친밀한 사람끼리만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집에 불러서 밥을 먹이는 등의 무례한(?) 행동들이 외국인이라는 설정 덕에 귀여운 매력으로 둔갑한다. 내가 일본 여성으로 살아보진 않았지만 “직진 댕댕 연하남" 캐릭터가 그들이 가진 한국 남성에 대한 환상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하고 쉽게 이해가 된다.


이 드라마를 이끌고 가는 중심적인 판타지 설정은 마음의 소리를 듣는 능력을 가진 여주인공이다. 선량한 마음을 가진 우리의 유리는 그 능력을 되도록 사용하지 않거나 회사의 이득을 위해서 주로 써 왔는데, 난생처음 마음의 소리를 알아들을 수 없는 상대방을 만나자 당황한다. 그녀의 썸남 태오는 생각할 때 한국어로 하니까! 태오는 자주 한국말을 쓰는데, 태오의 한국말은 일본에 방영될 때에 자막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 시청자들은 완전히 유리의 입장에서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한국 여성 입장에서는 태오의 행동이 ‘왜 저래?’ 싶을 때가 많지만, 드라마니까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마냥 귀여울 뿐이다. 마음을 비우고 감상하도록 하자.



드라마 <Ready Set Love>
레디 셋 러브(태국, 강한 여자만이 희귀종을 쟁취한다)

남성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어느 가상 세계가 배경인 이 드라마의 남성들은 보호 대상으로 간주되어 나라가 관리하는 "팜"이라는 공간에서 나고 자란다. 그중 잘생기고 재능이 많은 남자아이들은 "젠틀맨"이라는 아이돌이 되어 팜 바깥의 여성들에게 자신들을 어필하는데, 이들이 결혼 적령기가 되면 하나의 큰 행사가 열린다. 바로 국가에서 주최하는 서바이벌 "Ready Set Love"다. 그 서바이벌의 우승 상품은 무려… '최애와의 결혼권'이다. 정말이지 골 때리는 설정이 아닐 수 없다.


여동생의 계략으로 얼떨결에 저 황당한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데이'는 대중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다. 다른 여성들은 막대한 비용을 내고 출연했지만, 그녀는 우유회사의 "골든티켓"에 당첨되어 참가한 평범한 출신의 서민이기 때문이다. 여주인공의 성격은 "명랑하고 쾌활하며 억척스럽지만 어딘가 사연 있어 보이는 캔디 스타일" 이기 때문에 얼렁뚱땅 남주인공과 서브남주에게 사랑받으며 서바이벌을 진행한다.


말도 안 되는 유치뽕짝 전개가 재밌게 느껴졌던 이유는, 틀을 뒤집는 듯한 몇몇 장치들 덕분이었다. 만인의 연인이자 우상 같아 보였던 젠틀맨들이 사실은 기득권 여성들이 자신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 그들에게 결혼을 선택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표현되었지만 결국은 여성의 선택을 기다리는 입장이라는 것이 매우 흥미로웠다. 어쩌면 이 유치함과 황당함이 입헌군주제와 계급 제도가 있는 태국에서 문제적 발언을 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니 꽤나 몰입해서 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꿈보다 해몽일지라도 말이다.



드라마 <닭강정>
닭강정(한국, 네가 여자든 남자든, 닭강정이든 외계인이든 상관 안 해)

어느 날 외국인 강사가 물었다. 추천할 만한 넷플릭스 드라마가 있느냐고. 학생 한 명이 말했다. "닭강정"이요. 한국어에 서툰 강사는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다. "어떤 남자의 딸이 닭…으로 변해서…" 학생들은 어떻게든 설명하려고 했으나 영어로 표현하기 너무 어려웠다. 왜냐면 한국어로 설명해도 이상하니까! 그 사이 강사가 넷플릭스에 들어가서 검색을 하더니 비명을 질렀다. "Wait, The Chicken Nugget?"


동명의 웹툰이 원작인 이 드라마는 정말 이상하다. '민아'가 정체불명의 기계에 들어가 닭강정으로 변했다. 닭도 아니고, 닭강정이란 말이다. 민아의 아빠 '선만'과 선만 회사의 직원 '고백중'은 민아를 사람으로 되돌리기 위해 고군분투를 펼친다. 딸이 누군가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고, 닭강정이 살아는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상황이 어찌 보면 그로테스크하고 잔인하지만, 너무 황당해서 자꾸만 웃음이 난다. 각본이 어떻게 되든 연기 잘 하는 배우가 있으면 된다는 걸 깨달았다. 모든 게 말도 안 되는데 배우들이 연기를 잘해서 '이게 뭐지?'하면서 계속 보게 되는 희한한 매력을 가진 작품이다.


누군가에게는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이 시청자가 보기엔 마냥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란 말이 이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에게 이입하기보다는 '외계인'마냥 멀리 떨어져서 관망하게 되는데, 그래서 더 재밌고 가볍게 즐기기에 좋았다. 현실에서 벗어나 얼토당토않은 고민을 할 수 있게 하는 이 드라마를 보는 시간이 그리 아깝지 않았던 건 내가 낡고 지친 직장인이기 때문이겠지. 잠깐이나마 가벼울 수 있었으니, 이 드라마를 적극적으로 추천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보지 말라고 말리진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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