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만 지낸 지 26일째.
수퍼 몇 차례 후다닥 가서 장본 거 빼놓고는 온종일 집에 있다.
다행히 아이들 덕에, 특히나 막둥이 때문에 하루가 바삐 지나간다.
아침에 화상수업하는 아이들에게 토스트를 만들어주고, 난 발코니로 향한다. 아침 일찍부터 쏟아지는 햇살로 이미 따뜻하게 데워진 발코니에 운동 매트를 돗자리 삼아 깔고,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커피 한 잔이랑 책가지를 들고 소풍 가는 기분으로 나선다. 막둥이는 레고 장남감을 들고 따라 나왔다가 이내 지루해지면 닌텐도를 갖고논다.
하늘은 늘 그렇듯 맑고 파랗다.
로마는 구름이 참 예쁜데 요즘은 날씨가 너무 좋아 구름도 한점 없다. 햇살을 등 지고 앉아있자면 금세 노곤해져 쿠션하나 들고나와 누워버리게된다. 그렇게 오전 내내 나만의 시간을 갖는다.
내가 언제 발코니에 이리 오래 머문 적이 있던가? 햇빛 따가와서 서둘러 빨래만 널고 들어왔지, 반 시간 이상 머문 기억이 없다.
처음에 로마에 왔을 땐 해가 너무 강해, 얼굴도 상하고, 팔은 햇빛 알러지 때문에 늘 가렵고, 덥기는 말도 못하게 덥고, 도무지 적응이 안됐다. 오자마자 큰아이를 임신하고, 8월에 출산했으니 만삭일 때는 한 여름이었다. 만삭이라 그렇잖아도 몸이 더운데 날씨까지 뜨거우니 외출할 때는 한국에서 가져온 양산을 썼다.
지나가는 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신기한 듯 쳐다본다. "piove?( 비 와?)" 대놓고 묻는 이도 있다. 하긴, 해가 쨍하면 옳다구나 얼굴을 하늘로 쳐들고 일광욕을 즐기는 이들이니...굳이 해를 가리겠다고 알록달록한 양산을 쓴 동양여자가 별 종으로 보일 수 밖에.
그 후에 아이 유모차 밀고 다닐 때는 손이 부족해서 양산을 못썼고, 애들이 크고나서도 나만 너무 튀는 거 같아 안 쓰게 되고, 그렇게 이태리 사람들처럼 선글라스만 쓰고 다녔다.
그러다 몇 해 전 막둥이 태어날 때 엄마가 산후조리 하러 오셨을 때다. 아기가 생 후 한달쯤 지나 외출하려니 초여름이라 역시나 해가 따가왔다. 양산이 없으니 엄마는 어디선가 기다란 자동우산을 사오셨다. 그래봤자 집 앞에 주차한 차까지 가는데 뭐하러 우산을 쓰냐. 엄마를 만류했다. 더구나 작은양산도 아니고 장마철에나 쓸법한 커다란 우산을...
"왜, 유모차도 가리고 해야지..잠깐이라도 엄청 탄다 너..여기가 보통 햇빛이니? 얼른 일루 들어와봐"
처음엔 됐다고 엄마 혼자 쓰시라고 했다가 마지못해 한 번 우산 밑으로 들어가봤다. 근데 웬 걸, 정말 머리부터 시원해지는 느낌이라니... 지글지글 내리쬐는 해가 사라지니 온몸에 열기가 식는 것 같았다.
로마는 여름에 비가 오지 않고 건조해, 아무리 뜨거워도 나무 그늘에라도 몸을 피하면 참 시원하다. 장우산이 그늘 역할을 톡톡히 해낸 셈이다. 그 후 여름부터 나는 다시 우산, 즉 양산용 우산을 쓰고 다닌다. 남의 시선이 뭣이 중하랴, 내가 살고 봐야지.
요즘 같은 봄엔 햇살 온도가 딱이다.
이태리 여인들은 온 얼굴로 햇살을 흡수하며, 따사로움을 만끽한다. 나는 감히 그들처럼 해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못하고, 등 지고 앉아있다. 너그러운 햇살은 내 등을 감싸고 나른함을 안겨준다.
이렇게 좋은 날, 나들이는 둘째치고 동네 공원에도 못가다니...집 앞에 산책도 못나가다니..잠시 억울한 기분이 스친다. 그래도 살아 있어 봄햇살을 누린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가, 싶어 바로 숙연해진다.
온 지구가 떠들썩한 사이, 꽃은 피고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지금 지구 상에 일어나고 있는 말도 안되는 일 따윈, 아무 상관도 없는 듯, 해는 뜨고 지고 계절은 바뀐다.
워밍업을 끝 낸 태양이 이글이글 타오르는 계절이 오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여름이 오면,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장갑도 벗고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을까.?
그렇게만 된다면야 양산도 벗어 던지고 작열하는 태양을 맘껏 누려줄텐데...
실 낱 같은 희망이라도 품어보지만
봄이 가면 여름이 온다,는 사실 외에는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고, 어떤 기대도 품을 수 없는 날 들이다.
그저 오늘 하루, 내게 쏟아지는 햇살에 몸을 맡기고 감사할 뿐..
2020년4월6일,로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