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ght Off

-봄밤은 시작되었다.

by 이애리

친구 아버지 부고 소식에 우리는 울산으로 향했다. 올 것이 왔다는, 예감 같은 필연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급작스레 떠나게 되었다. 친구 아버지의 여행 가는 길이 뜻하지 않게 우리한테도 순박한 여정이 되어 주었다.

장거리에 능숙한 그녀가 운전대를 잡고 우리는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달렸다. 그날은 오전에 내린 비로 오후 내내 대기가 온통 희뿌옇고, 멀리 충청도 산등성이는 회색빛 겹겹이 이어진 연봉과 골짜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며칠 간의 불면증으로 피곤이 무색하게, 조수석에 앉은 나는 내려가는 4시간, 올라오는 4시간 동안 전혀 졸리지 않았다. 대체로 그녀의 말을 들었다. 우리가 만난 이래로 그녀의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어떤 죽은 이의 방을 치웠단다. 그러고 나서 어떤 스님을 알게 되었단다. 다음 주에는 그 어떤 스님을 만나러 또 울산에 온다는 근황까지 듣고 나자, 그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노는데 집중한 그녀가 안쓰러우면서도 어이없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큰 일 나겠는데.


아마 안 날 것이다.

그녀와 나는 수원 행궁동 작은 책방에서 진행하는 한 프로그램에서 만났다. 우리는 많은 말을 나누지 않아도 웬만큼 친밀감이 형성돼 있었는데 그 저변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고, 사회생활에 일찍 눈을 떴기 때문에 현실적인 ‘감’과 이른 결혼과 육아까지 더해져 예술적 감성과 계속 충돌하는 삶을 살아온 데칼코마니 같은 면이 일부 있다.

또래와 일반적으로 조금 다른, 첫째를 보통의 잣대와 욕망대로 키우며 실은 나조차도 젊은 날에는 순수한 완벽함을 향한 꽤 기울어진 삶을 살았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경계를 잘 모르고, 분별없는 이상만 꿈꾸며 나는 많이 실패했고, 누군가의 지지가 없는 잦은 좌절은 무엇을 하든 간에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어 결국 단칸방에 누워 잠만 잤던 적이 있었다.

그러다 어떤 순간은 친구가, 어떤 날은 계절이, 어떤 때는 꿈이 혹은 결핍이 나를 현실 속으로 도로 넣어 주었다. 끌어올려진 미약한 힘으로나마 저 너머, 현실 속에서 잘 살고 싶어지곤 했다. 살고 싶은 의지에 기대어 현실 속 나의 이상을 버무려 마음의 균형을 맞추려고 애썼다. 40년이 흐르는 동안 실패와 방황, 상상력과 화해가 없었다면. 아니.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나는 여전히 기울어진 삶을 살다가, 일찍이 소멸했을 수도 있다.

잘은 모르지만, 그녀도 그러했으리라고 내 마음대로 혼자 짐작하고는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지금 웃는 그녀와 다른 방황하는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대안학교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살기 위해 살았던 날들이라고 생각한다. 이 또한 나의 생각이다.


그럴 때 가만히 눈을 감고 유키코를 생각했다. 나는 유키코가 방금 전에 한 말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눈을 감고 내 몸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에 귀를 기울였다. 아마 나는 변화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환상은 더 이상 나를 구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나를 위해 꿈을 빚어내주지 않았다. 공백은 어디까지나 공백 그대로였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313쪽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를 살아가는 해법을 제시하지 않는 그의 전작들과 달리 이 소설에서 환상 속의 완벽한 시마모토를 묻고 아내 유키코와 화해하며 국경의 남쪽을 꿈꾸되, 죽음뿐인 태양의 서쪽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실 그녀와 내게 충돌하는 삶은 무너지는 이상과 저 너머 현실 사이에서 균형감을 찾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쉽게 말하면 계기였지만 과정에서는 크나큰 균열과 무기력함으로 점철된 고통이었다.

결혼과 동시에 육아를 하며 터득하며 발달한 책임감과 사회성은 살아가는 길을 그나마 좀 더 편하게 닦아 주었다. 나만이 아닌, 남편과 아이들을 고려하게 되었고 그조차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마음이 괜찮아지는 지점을 끊임없이 생각하며 생활을 조율해 갔다. 완벽하지 않고 늘 부족했다. 그럴 때 현실과 이상이라는 극단 사이로 도망치며 버텼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적당한 지점을 어슴푸레 맞이하게 되었다. 시간을 도구 삼아 통찰할 수 있었기 때문일 거다. 환상만 쫓았다면, 현실만 살았다면, 삶을 이만큼이나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에서 남자 주인공 필립은 독일로 유학을 갔지만 되돌아와 예술적 자아를 찾기 위해 화가를 지망하지만 실패한다. 곧 밀드레드와의 파괴적인 사랑에 매달리다 결국 의대에 진학하며 실용적인 길과 평범한 사랑을 선택한다. 인생은 복잡한 무늬가 있는 양탄자 무늬처럼, 무늬 하나하나에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선택한 삶 속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말한다.

줌파 라히리의 <저지대>에서 나는 끝까지 가우리를 응원했다. 가우리 같은 삶도 있는 것이다. 같이 살지만 살지 않는 상태로 살아야만 했던 가우리는 딸과 가족을 떠나 모성을 버리고 완전히 자기 세계로 들어간다. 가우리는 나의 분신이었다.

나는 가우리로 살다 필립 같은 삶을 선택했고 그를, 그녀를 온전히 이해한다. 나는 삶에서 솔직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대체로 솔직하고, 타인이 보는 나의 다정함은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부분이다. 나의 과거가 없었다면 다정이라는 외피를 입지 못 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삶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불합리한 면에서 나는 사회성을 인간다움이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아이를 기르는 것, 책방을 하는 것 모두 내가 더욱 인간답게 사는데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내 옆에서 운전하며 끊임없이 말을 하는 그녀는 결혼 전후로 아름다움과 욕망을 쫓으며 자신의 바닥을 경험했다. 자신의 마음이 괜찮아지기까지 수많은 시도 끝에, 지금에야 자연과 몸, 마음의 순환과 단련을 기반으로 ‘나’에 집중하는 삶을 산다. 글씨와 호흡을 배우며 농사와 공동체를 배우고, 차와 악기를 다룬다. 몸에 대해 알고 싶은 욕구는 춤을 배우는 데까지 확장이 되었다. 타인의 긍정적 반응으로 진정한 예술가로 칭송받고, 자칫 아니 종종 놀기 바빠 팔자 좋은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물론, 스스로 자신도 잘 놀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이제야 그녀가 왜 노는지, 왜 놀아야 하는지 이해한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맺어온 사회적 관계에 짓눌린 자신을 해방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조율을 그녀는 감으로 해내고 있는 것이다. 그 막연한 감에 의지해 자신과 타인과 고군분투하더니, 이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명확한 언어로 구현해 낸다.

자신도 괜찮고, 남편도, 자녀도 괜찮은 지점을 찾아 조율하며 나아간다. 그녀가 ‘핸드팬’이라는 악기 하나로 새로운 인연을 맺고 잼을 하며 무엇보다 즐기며 음악으로 확장했다. 그 음악은 다시 생활에서 타인과 이어준다. 아마 그것이 또 그녀의 끝은 아닐 것이다.

시내 운전만 카레이서 수준으로 운전하는 나는 고속도로는 달리지 못하므로 조수석에 앉아 그녀의 말을 경청하며 가만가만 생각한다. 그녀는 울산까지 가는 고속도로에서 혼자 운전하며 말을 보태기까지 하는 데다, 그 와중에 손을 뻗어 계속 몸을 움직였다.

잘 놀고 있었지만 성년이 된 딸들을 챙길 일은 끊임없이 있어 이제는 틈틈이 노느라 더 빠듯한 그녀는 오십이 되더니 필립과 가우리를 적당히 섞고 오갈 수 있는 유연함을 장착했다.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돌보며 지켜나가야 한다.

나는 기울어진 본성을 다듬어진 사회성으로 계속 융화시켜 왔다. 그렇게 생존에 맞춘 균형감각이 얼마 전부터 미묘하게 불편한 기분이 들게 나를 찔러온다. 남편은 고용 불안의 기로에 서 있고, 아이들은 당연히 엄마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현실이든 이상이든 욕망은 끝이 없었다. 그 찝찝함이 무엇일까, 짐작조차 하지 못하다가 그녀를 보며 나는 알아차렸다.

내 안의 가우리가 꿈틀거렸다. 현실과 분리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그때 친구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성년의 아이들과 아픈 남편을 돌보는 친구의 아버지로서, 인간으로서의 동질감으로서 나는 그를 잘 보내고 싶었다.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돌아가신 친구의 아버지께 절을 했다. 셋이 앉아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아직 잘 모르겠다. 그저 친구 얼굴만 보면 되었던 것이리라.

옆에 앉은 그녀가 장례식장 소고기국밥이 제일 맛있다고 말한 나를 떠올리고는 시래기국밥이라서 어떡하냐고 묻는다. 이것도 맛있네. 밥을 말아 맛있게 다 들이켜고 과일을 먹고 떡을 먹고 셋이서 웃다가 나왔다. 여기까지 온 우리에게 미안했던 친구는 근처 바닷가에 꼭 가보라고 한다. 사실 우리는 친구가 바람 쐬고 싶을 수 있다고 생각해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다행히 친구는 가족들 틈에서 밝아 보이고, 손님을 치르느라 바쁜 듯해 우리는 일찍 일어나기로 했다.

남편이 에어비앤비에서 예약한 하얀 집으로 가기 전에 친구가 말해준 근처 밤바다에 들른다. 아담하고 얕은 바다가 남해 은모래비치를 닮았다, 크레인이 즐비한 형형색색 조명이 바다를 물들이는 모습이 여수 밤바다를 닮았다, 하며 작은 해변을 왔다 갔다 몇 번을 걷는다. 늦게까지 연 해변 커피숍에서 커피를 뽑아 들고 다시 걸었다. 봄밤 바다는 조용하고 지루하지 않아, 밤새도록 바다만 보고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파도가 뿜는 흰 포말은 바다가 큰 소리로 웃거나 우느라 튀어 오른 방울들 같다고 생각했다. 포말이라는 단어의 뜻은 물거품. 거품은 일시적으로 기체 상태를 품은 액체이다. 그러니까 영원한 거품 같은 건 없다.
다 웃거나 울고 난 포말은 다시 바닷물로 돌아가니, 포말의 근본은 어쨌든 바다다. 잔잔한 채로 수평선을 그렸던 바다의 근본적 지루함과 고단함은 다 잊기라도 한 듯이 씩씩하게 솟구쳐버리는 파도를 보면서, 생활이 어지럽게 물들었을 때 바다에 오고 싶어지는 이유를 알아냈었다.
한자의 기분, 68쪽


죽음과 거품이 참 닮았다. 삶은 바다를 닮았고. 그녀는 그녀 대로, 나는 나 대로, 제멋대로 걸어 다니다 뛰어다니다 신발에 잔뜩 묻은 모래를 탁탁 털고 차에 올라탄다.

숙소는 바닷가 앞이라더니 아파트 사이에 낀 주택 1층 하얀 집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겨우 찾아 들어가니, 없어도 될 만한 철 지난 인조 트리가 한 켠에서 우리를 맞이한다. 깨끗하고 넓은 거실 겸 주방에 자리한 식탁이 닿은 한쪽 벽에는 인조 담쟁이덩굴이 네모 안에 가득하다. 식탁 위에는 19세기 유럽 귀족풍 디자인을 모티브로 한 로코코 빈티지 스타일의 꽃병에 형형색색 미니로즈 조화가 잔뜩 꽂혀 있는 데다, 스위치만 켜면 발광하는 인조 초가 얹힌 촛대까지, 우리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우리는 이 모든 게 없었으면 더 나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하나라도 빠지면 어색할 것 같은 조화로움이 뭔가 끌려 우린 식탁에 둘러앉아 차에 킵해 둔 맥주 한 캔씩 딴다. 안주는 없다. 내일 낮에 각자 일정이 있는 우리는 아침에 근처 어디를 가볼까 얘기를 나눈다. 그 사이 술을 안 마실 것 같은 그녀는 이미 한 캔을 다 마시고 무늬만 술을 잘 마시는 나의 남은 맥주를 탐낸다. 그거마저 다 마신 그녀는 이제 씻으러 욕실로 향했다.

나는 집에서 챙겨 온 책 <한자의 기분>을 펼친다.


근본적 슬픔을 눈감고 포말들이 얼굴에 튀는 해변에 앉아 있을 때의 기분처럼, 맥주도 잠깐 생활의 얼룰을 닦아주니까. 큰 소리로 웃고 싶은데 웃지 말아야 할 때, 혹은 엉엉 울고 싶은데 눈물을 참아야만 할 때, 물거품이 부서지는 파도를 보거나 뽀얀 거품이 뜬 맥주를 마시는 일에 얼룩진 기분을 잠깐 맡겨두는 것이다.
한자의 기분, 69쪽


글자에 노래가 스며든다. 욕실에서 Night Off의 ‘잠’ 이 흘러나온다. 하나의 목소리가 더 겹쳐 흐른다. 그녀는 자유롭다. 나를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의 템포에 따라 움직이는 그녀. 오십 살 그녀는 점점 자유로워진다. 우리는 한 공간에 있지만 다른 공간에 있다. 지금 이 타이밍이 왠지 내게 자연스럽게 전환점이 되어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다시 식탁 앞으로 와 앉은 그녀는 남편과, 나는 아이들과 돌아가며 통화를 한다. 갑자기 아이들이 보고 싶은 나는 아이들과 오래 통화를 했고, 그녀는 최선을 다해 배려가 넘치는 어투와 톤으로 남편과 통화를 마쳤다. 이 모습 또한 볼 때마다 경기 일으킬 만큼 놀랍다. 그래, 나이가 드니 남편에게 감사하게 된다고 그녀도 나도 말한다.

뒤이어 화장실에 들어간 나는 그녀가 해결하지 못한 변기물을 내렸다. 누군가는 현실을 거둬줄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른 밤 내내 가르랑 거리는 고양이 울음소리는 점점 옅어졌다.

아침에 씻고 나오니 그녀가 거실에서 몸을 움직이고 있다. 짐을 싸고 현관문을 나선다. 마당에 조성된 작은 화단에도 역시나 조화가 한가득이다. 독특한 집이라고 중얼거리며 동백이 흐드러지게 핀 담벼락을 지나 내리막길에 주차된 차를 타고 근처 몽돌 해수욕장으로 차를 몬다. 그녀가 어젯밤에 샤갸락 샤가락 이랬나, 샤가걀 샤가걀 이랬나. 몽돌이 움직이는 소리가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 표현이 어딨어, 알 듯 말 듯한 그 몽돌 소리를 확인한 후에 올라가기로 한다.

그녀가 운전하는 창밖으로는 리본처럼 주렁주렁 달린 검붉은 동백이 뒤로 지나간다. 전면 창으로 보이는 ‘하청 노동자 노동 조건 개선 원청교섭이 시작이다.’라는 현수막이 붙어있는 담벼락이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그 위로 푸른 하늘을 찌를 듯이 솟은 거대한 크레인도 금세 스쳐 지나간다. 살고 죽고, 꽃이 피고 크레인이 올라가는 인생은 끝까지 단짠단짠 웃프려는 모양이다.

주전 해변에 다다랐다. 바다에는 크레인 바지선이 떠 있고, 아침 태양빛은 우리를 향해 찬란하게 쏘아댄다. 윤슬은 어디에나 있네, 그녀가 말한다. 우리는 태양빛에 비친 잔물결을 보며 친구 윤슬을 함께 떠올렸다. 윤슬이라는 이름을 참 잘 지었다. 그녀가 말한다.

정말, 샤가걀도 들리고, 샤갸락도 들린다. 샤가걀 샤가걀 파도는 몽돌을 계속 끌어내고 당기는데, 샤갸락 샤갸락 밀물에 또 끌려 온다. 그녀는 바다 앞에서 뛰어다니다, 등을 구부려 몽돌을 바라보다가, 바닷소리를 녹음한다. 바다 앞에서 한껏 아양을 떠는 아이 같다. 나는 이 모든 게 빠짐없이 조화롭다고 생각했다.

어머, 돌 하나를 주운 그녀는 돌이 젖으니까 제 무늬를 드러내네, 말한다. 그렇구나. 파도에 젖으면 돌멩이도 제 무늬를 드러내는구나. 그녀의 말을 따라 하며 계속 상념에 빠져드는데, “출근하자아아아아” 그녀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생각을 비집고 들어온다. 그녀는 참 잘 빠지고 잘 빠져나온다.

우리는 맥드라이브에서 맥모닝을 먹으며 돌아간다. 종이에 싸인 버거를 까서 주고, 집에서 챙겨 온 물티슈를 코트 주머니에서 꺼내어 주니 그녀가 놀란다. 이 정도 수발로도 놀라다니, 나를 뭘로 보고. 이게 놀랄 정도로 대단한 일인가, 내심 기쁘다. 커피까지 다 마시고 나니 용인이다.

그녀와 헤어져 쏘렌토를 끌고 북수원 ic로 통과해 천천동으로 향하는 도로로 진입했다. 양쪽 가로수 길에는 겨우내 이파리 하나 달리지 않은 잿빛 은행나무가 이제 가지 끝까지 물이 올라 하늘에서 둥글게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성대역을 지나 좌회전을 해 우회전을 하러 가는 길목 우측에 불이 꺼진 ‘연기 학원’을 지나간다. 코트 주머니에 몰래 넣어온 젖은 몽돌 하나가 집에 다다르니 다 마른 몽돌이 되었다. 내 지난 시간 뒤로 펼쳐진 바다에서 몽돌 소리가 파도를 타고 샤가걀샤가걀 밀려온다.

내일이 되면 쏘렌토는 남의 차가 된다. 마지막으로 혼자 쏘렌토를 탈 수 있는 데까지 잘 다녀왔다. 상황은 여전히 우리를 어떤 선택을 하게끔 압박하지만 쉰을 바라보는 우리는 필립과 가우리를 오가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내일이 있다면, 우린 내일도 살아간다. 글을 쓰고 고치는 사이에 그녀는 이미 둥근 춤을 추러 다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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