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초밥과 세 바퀴

-눈물이 났어

by 이애리

일요일 아침 8시, 집 앞 메가 커피에서 Ss와 오랜만에 회동이 있었다. 지난여름 S의 생일에 캔맥주 한 잔 이후 처음이었다. 몇 달째 밤에 한 잔 하자고 말만 하다가 체념하고는 아침에 커피나 한 잔 하자는 게 오늘이다. 그마저도 s가 일을 가야 해서 같이 본 시간은 2시간도 채 되지 않았다.

아이 셋, 육아 휴직 중인 S는 둘째 아들 축구 라이딩을 한 뒤 얼마 전에 펌한 듯한 머리에 ‘beauty’ 모자를 쓰고 뒤늦게 들어와, 다른 아이가 큰 아들에게 물려준 까만 점퍼를 입고 주말마다 일을 나간다는 s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내가 물었나, 기억이 사라졌다. 암튼 무슨 일이냐고 물은 이유는,

아이들 감시 안 하고, 밤낮 주말에 일을 가다니?!

감시란, 고등은 알아서 한다지만, 중등까지는 어떻게든 우리가 잡아보려는 발광이라고 해두자. 아이보다 소파에서 먼저 잠든 날, 아무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도리어 베개를 받쳐두고, 우리 집에서 제일 보드라운 데다 가벼운 모포를 덮어두면서 남편도 나를 깨우지 않아 새벽에 깼을 때의 심정이란, 난 새벽부터 루저인 것이다.

우리 중에 제일 막내지만 최고 어르신 같은 s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현자 같은 모습으로 빙그레 웃는다. 물론 웃는 게 웃는 게 아니다, 다 내려놓아서 웃는 게 아니라 ing 이기에 웃는다. (그런 것이라 믿는다.) 싸우지 않으려면 아이를 피해 일을 나가야 하고, 계속 우리는 트랙을 돌아야 하고, 목탁을 두드려야 하고, 울어야 한다. 암튼, s는 계속 듣는 게 편하다며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니, 우리는 아예 s 쪽으로 몸을 틀고 이야기를 한다. 사실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있는 엄마가 먼훗날에도, 계속 웃는 것이다.

그저 저번 만남과 데자뷔 되며 내 소중한 손목으로 아이들 등짝 스매싱을 하고 매를 드는 나를 보고 s는 정신과에 가보라며, 자신은 부모한테 맞은 적이 없단다. 안 맞고 산 엄마는 자식도 안 때리나 보다. s는 엄마한테 잘해야 한다. 아니다, 맞을 짓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감자빵을 먹고 얼그레이 쿠키를 먹은 s는 웃으며 먼저 떠났다. 남은 S와 L은 동네 한 바퀴 돌기로 한다.

5학년 아들 책가방을 찾으러 간다는 J를 지나간다. 신학기만 되면 담임교사한테서 전화가 걸려와 031 전화번호만 뜨면 사색이 되는 D도 지나간다. 공부머리가 아닌 첫째는 포기하고 둘째에게 올인하는 j도 지나간다.


안녕하세요오오.


인사하는 엄마, 반갑다. 황금 주말 아침에 저 엄마는 왜 뛰는 걸까... 엄마라 뛰겠지. 우리가 이렇게 걸어서 될 일인가 고민하다 체력도 부족한데 걸어야 하루, 또 버티므로 우리는 계속 걷기로 한다.

날씨가 좋죠오오오

우리를 두 바퀴째 지나가신다. 청량한 목소리에 나도 들뜬다.

세 바퀴도 지나가셨다.

S는 돌숲에 들러 밀린 결제를 하고 간단다. 물론 결제만 하지 않았다. 밀린 네버엔딩 수다를 푸는데 엄마 어디냐며 살피는 아이들과 남편 전화를 받고 우리는 무겁게 일어선다. 어두운 데서 밖으로 나오니 핑 도는데, 아까 세 바퀴째 돌던 엄마가 아직도 달리고 있는 모습을 본다.

많이 힘든가 봐. 우리도 같이 뛰어야 하는 거 하냐?!

또 만나면 같이 뛸 판이니, 저번 새벽에 절을 하고 탑돌이 했던 큰 바위 얼굴 앞에서 우리 그만 헤어지자고 했다. 보통 몇 바퀴 더 돌다, 주차장에서도 못 헤어져, 들고나는 차량들과 인사를 몇 번 해야 겨우 들어가는데, 오늘 한나절 살아야 하므로 이만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안녕. 손을 흔들며 큰 바위 얼굴을 물끄러미 본다. 올해도 큰 바위 얼굴에 때죽나무는 꽃을 피우겠지. 주변을 휘돌아보다, 아무도 없길래 합장하며 기도를 한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서니, 밤이에게 전화가 걸려온다. 이 달 말에 잡힌 피아노 콩쿠르 연습을 피아노 학원에서 11시에 하기로 했는데 11시에 일어났다며 불안한 듯 떨리는 목소리다. 앗 나도 잊은 것이다. 이미 시각은 11시 30분이다. 멀리 남편이 구시렁구시렁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일인지 짐작이 돼 밥 먹지 말고 얼른 지하로 나오라고 한다.

주차장 초입에서 왜 콩쿠르 연습 안 오냐는 이웃의 문자를 보며 답을 하던 찰나에, 나를 찾아 두리번 거리는 밤이를 본다. 나를 발견한 밤이가 울먹이며 뛰어온다. 나도 놀라 밤이에게 뛰어간다. 내 코만큼 자란 밤이가 내 품에 폭 안기더니, 운다.

괜찮아, 괜찮아.

귀신 같이 긴 머리를 쓰다듬고 등을 하염없이 쓸어내린다. 코와 코를 맞대어 비비며, 눈물을 닦고 진정이 되었을 때라야,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 있었다. 1시에 수학 학원 보강이 있는 것만 기억한 남편은 11시에 느긋이 일어나 갑자기 나가야 한다고 해서 밥을 급히 하는데, 아이 둘이 문제집까지 매겨 달라며 닦달을 했는 모양이다. 문제집은 내 담당이고, 아이들 훈육도 내 일인데, 요즘 고용 불안으로 심기가 불편한 남편이 엄청 화를 냈단다. 급기야 다투고 온 모양으로(?) 아빠가 너무 밉단다.

어젯밤에 오랜만에 천만 관객을 찍은 데다 12세 이상 관람가인 <<왕과 사는 남자>>를 온 가족이 보러 갔는데, 넷이 다 맞는 시간을 고려하니 밤 10시 20분 영화만 가능했다. 집에 오니 1시였다. 잠투정인 걸 알면서도 늦은 밤에 자매 둘이 싸우며 발광을 하길래 간신히 눌러놓은 인내심이 끊어지며 옷걸이를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부러진 옷걸이를 보자 민망하기도 하고 아직 분이 안 풀려 그대로 나가 트랙을 돌다가 Ss를 만나러 약속 장소에 바로 와버렸던 것이다.

엄마는 어딨는지 연락도 안 되고, 폰에 “도와줘” 앱으로 엄마 위치를 확인했으나 위치가 꺼져있는 것(내가 껐다.)을 확인했단다. 그 와중에 아빠는 바쁜데 핸드폰만 본다고 혼을 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내가 옷걸이로 때린 것은 그러려니 하면서 서열 6위(메리 입양으로)인 아빠가 혼을 내면 납득하지 못한다.

실컷 달래주고 나니, 수학 학원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마그네슘 부족으로 오른 눈 눈꺼풀이 부르르 떨리는데, 먼저 상가에 마트가 편의점으로 바뀌어 핫플이 된 지에스 편의점에 가서 둘째가 제일 좋아하는 컵라면에 삼각김밥을 먹자고 꼬신다. 밤이는 요즘 한창 빠진 ‘참치마요’ 삼각 김밥과 육개장과 빅육개장 사이에서 심혈을 기울여 일반 육개장을 고른다. 나는 더 심혈을 기울여 ‘대파명란마요’ 삼각김밥과 ‘참치마요’ 삼각 김밥 두 개를 고르고 양심에 찔려 칼로리가 낮은 ‘누들면’ 매콤한 맛을 덤으로 고른다.

컵라면 뚜껑 위에 삼각 김밥을 올리고 면발이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밤이와 나는 밥 안 먹냐고 문자를 보낸 남편에게 답장을 보낸다. ‘안 먹어! 바로 수학 학원.’ 밤이가 통쾌한 모양이다. 킥킥 웃는다. 엄마가 딸한테 좋은 거 가르친다. 살아가는 데, 특히 남자에게는 밀당이 필수란다. 우리에게 만만한 게 아빠다.

축축해진 뚜껑을 벗긴다. 뽀얗고 매콤한 훈기가 우리를 감싼다. 후루룩후루룩. 촙촙 촙촙.

사실은 엄마가 잘못한 거야. 어젯밤에 너희들 혼낸 거, 오늘 혼자 나간 거, 전화도 안 받은 거. 아침에 연습 있는 것도 까먹었잖아. 아빠는 T라 정해진 대로 일을 해야는데, 엄마는 삐져서 없지, 밥도 안 해놨지, 너희는 문제집 매겨 달라고 생난리지. 엄마는 연락도 안 되지, 그래서 아빠가 화가 난 거야. 다 엄마가 잘못한 거야. 엄마가 너무 미안.


그래도 막 무섭게 화냈단 말이야. 수학 학원 끝나고 스타필드 가서 돌아다닐래.


어떻게든 틈을 파고드는 고단수 앞에 나는 건곤일척의 마지막 수를 던진다.

피곤해 보여. 수학 학원 다녀와서 안방 들어가서 패드 보면서 뒹굴뒹굴 해. 아빠가 사과할 때까지 말이야.


간에 기별도 안 가는데 몇 안 되는 누들면발을 둘째에게 양보하고 나는 육개장 국물까지 다 들이켠다. 지하 주차장으로 뛰어가 같이 보강을 가야 하는 첫째를 기다린다. 첫째가 차키와 쇼핑백을 건넨다.

아빠가 유부초밥 쌌어. 엄마랑 유현이 밥 못 먹었다고.


쇼핑백을 받아 들고 차에 올라탄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각자의 상념 속에서 출발한다.


학원에서 끝나기를 커피숍에서 기다려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온다. 입이 댓 발로 나온 둘째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안방에 들어가 패드를 본다. 뉘 집 자식인지, 말 잘 듣는다.

유부초밥이 그대로인 걸 보고 남편이 왜 안 먹었냐고 묻는다. 초밥 하나를 입 안에 넣고 빵빵해진 볼로 우리, 편의점에서 거하게 먹었지. 자신도 그 사이에 집 청소를 했단다. 그러고는 안방에 슬며시 들어간다. 밤이가 빽 지르는 소리가 닫힌 방문을 뚫고 들려온다.

저녁이 되어 남편은 또 유부초밥을 싸는 사이, 나는 밤이와 피아노를 치러 다시 피아노 학원으로 향한다. 어둑어둑한 저녁에 나오니 아이가 안쓰러워, 문득 쓸쓸해진다. 부러 오버하고 싶은데 할 말이 그닥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수다. 수랑 이모가 있어.


밤이가 손으로 가리킨 데를 보니, 희미한 인영 둘이 어른어른거린다. 큰 바위 얼굴 가까이로 가서 보니, 수와 수 엄마가 맞다. 밤이 보다 한 살 어린 피아노 예비 전공자 친구네인데, 피아노 치러 학원에 가는 길에 우리를 만난 것이다. 그네들은 카메라 앱으로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바뀌는 사진을 찍는 중이었다. 우리도 합세한다. 할 수 있는 한 우스꽝스러운 얼굴 모양을 지어본다.

다 같이 한바탕 웃었다. 그렇게 한결 가벼워진 걸음으로 이러구나 저러구나 어울려 함께 걸어간다.

한밤에 수 엄마가 함께 찍은 사진을 카카오톡으로 보내온다. 자기 얼굴이 망가져 보내기 싫었는데 밤이가 환하게 웃어서 보낸단다. 나도 전송된 사진을 보며 밤이가 이렇게 예쁘게 웃었구나, 옆에 앉은 같은 얼굴을 보다가 사진 속 아이 얼굴을 확대해 본다.

사진 속 예쁜 아이 얼굴이 금세 어룽어룽해진다.

냉장고 끝자락으로 밀려나 잊혀진 반찬통을 꺼내온다. 푹 삭힌 파김치다. 맨입에 먹는다. 엄마는 또 스트레스받는가 보다, 남편이 아는 체한다. 밤늦게 짜게 먹는다고 잔소리할까 봐 나는 되받아치지 않고, 그저 맵고 짜고 신 맛을 와그작 와그작 즐긴다. 단맛이 다 빠진 파김치도 그럭저럭 먹을 만하다.

잠들 기전, 소파에 누워 책을 펼쳤다. 갑자기 내 코 만큼 자란 밤이가 내 위로 겹치더니 끌어안는다. 숨 막혀 떼내려는데, 조금 참아 본다. 책이 소파 아래로 떨어졌다. 주우려고 몸을 일으키는데 밤이가 나를 쓱 누르며 쑥스럽게 내 오른 귀에 뭐라 뭐라 속삭인다.


엄망, 오늘 아띰엥 편의점에성 위로해줘떵 고마웡.


이그, 참았으니 망정이지, 안 참았다면 이 귀여운 말을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까...

난 그렇게 아이들과 연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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