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엄마란 무엇인가.
문제집을 매긴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전쟁이 8일째다. 두바이로 여행을 간 한국인 딸이 어젯밤에 인천공항으로 입국해서 가족과 상봉했다는 기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다 잠이 들었다. 나이 오십이 가까워지면서 체력이 급하강하기 시작한 나는 아이들보다 먼저 잠들어서 아이들보다 5분 일찍 일어난다. 깨자마자 세계 정서를 살필 겨를도 없이 지난밤에 아이들이 풀어서 올려둔 문제집을 채점한다. 정말, 문제집 매기는 근 오 년 동안 다 맞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욕이 나온다. 아이들이 아직 자고 있어 다행이다.
선생님이 매몰차게 친 / 은 내 마음도 쓰라리게 한다. 나는 차마 가볍게 긋지 못하고, 꾹 눌러 그으면서도 쉽사리 손을 떼지 못한다.
밥을 차린다. 얼마 전에 교정을 한 첫째 딸은 지금 밥을 못 삼킨다. 남편이 끓여 놓은 소고기 죽을 데우고, 시어머니가 주신 시큼털털한 동치미 국물을 꺼낸다. 샐러드는 질겨서 못 먹지만, 스팸은 구워 달란다. 둘째의 밥도 차린다. 얘는 어릴 때부터 이유식을 주면 입을 다물더니, 입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다. 고기는 안 먹는다면서 장조림 같은 짭조름한 반찬을 식탁에 올려야 한다. 안 되면 김치라도 볶는다.
아이들 어릴 때 일이다. 큰 아이 키우는 옷 잘 입는 언니들이 간혹 맨투맨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을 때가 종종 있었는데, 그땐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아이들이 입던 맨투맨인데 왜 엄마가 입는 것일까 진정 몰랐다. 내가 언니들 나이가 되니 알겠다. 내 눈에 예뻐 보여 산 맨투맨에 아이들은 금방 싫증을 낸다. 금방 큰다. 엄마들이 멋모르고 가장 학생답게 사주는 티셔츠가 맨투맨이었다. 나 또한 바지는 진즉에 못 입지만 티셔츠 정도는 아까워서 억지로 입고 다닌다. 이젠 살이 쪄서 그마저도 어렵지만. 한창 티셔츠에 육중한 몸을 끼워 넣고 탈진 직전인 상태로 거울 앞에서 몸을 돌려 가며 입어도 될지 말지를 가늠하고 있을 때, 불현듯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가 그렇게 내 옷을 입었단 말이다.
맨투맨을 입던 그 언니들은 “엄마”라는 단어를 읊어도 눈물부터 글썽인다. 나는 아직 그렇진 않다. 엄마를 사랑한다면 오그라들고, 그보다는 엄마를 인간으로서, 인생 선배로서 존경한다. 아빠라는 한 사람을 어떻게 저렇게 사랑할 수 있을까, 경이롭게 생각만 하지.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나는 반평생 억울한 어린 시절을 보낸 축에 속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엄마의 말을 들어봐야 안다고 생각한다. 내가 드라마를 쓸 때 엄마가 당신 이야기를 써보라고 했는데, 감히 판도라의 상자를 열만 한 깜냥이 그때도 지금도 없다.
예전부터 엄마의 가장 훌륭한 점은 과거를 들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마가 학교 근처에서 백합 미용실을 할 때 2층이 우리 집이었는데, 시험을 망친 나는 시험지를 구겨서 책상 서랍에 처박아 두었다. 그날 하필 손님이 학부모였는지, 손님 머리를 말다가 위로 올라와서 시험지를 발견하고는 나를 엄청 팼다. 나로 인해 집에 냉기가 흐르는데, 저녁 즈음 벌써 다 잊은 듯 내가 하도 까불어서 오빠가 속도 없다며 경멸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엄마는 뒤끝이 없었다.
나는 애들을 혼낸 뒤에 특히 둘째가 언제 혼났냐는 듯 평소와 똑같이 먹고 마시며 기어오르면 약이 오른다. 아이는 민망해서 혹은 내 기분을 풀어주려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을 거라는 걸 나중에야 헤아린다.
그 외에도 난 가출을 하고, 결석을 했지만 엄마는 당시에만 죽지 않을 만큼 패고 두 번 다시 내게 그 일을 거론하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가출을 했을 때, 엄마는 사람 없는 데서 내 머리를 뜯었고, 아빠는 엄마의 이발기를 찾아 내 머리를 삭발했다. 난 오기로 가발을 쓰지 않고 학교를 열심히 다녔다.
물론 가출할 만해서 했다고 지금도 그때도 생각한다. 엄마는 그 일을 그때도 지금도 내게 얘기하지 않는다. 가슴 아프고 고단하게 살았던 시절은 추억하는 것조차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아마 엄마는 고모나 이모와 같은 하소연 할 상대가 있으므로 굳이 자식인 내게 티 내지 않을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온 데 다 하소연을 하지만 애들을 혼낼 때마다 옛날 일을 다 끄집어내서 윽박지르고 사설을 늘어놓다가 제풀에 지쳐 소파에 드러눕는다. 나도 나 같은 엄마가 질린다.
어쩌다 우리 집 훈육 담당이 하필 나라서 무서운 엄마인 척하기도 얼마나 버거운지.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제 ‘척’을 하지 않아도 된다. 알았어, 알았어, 봐줄게 이런 느낌으로 아이들은 나를 봐주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일명 이것들은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온 것이다.
나도 이런 어설프고 어수룩한 엄마를 꿈꾼 것은 아니었다. 사실, 엄마를 꿈꾼 적도 없다. 갑자기 엄마가 돼야지 하다가 엄마가 된 것이다. 다만, 엄마처럼은 살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내가 노력하면 정말, ‘다른’ 엄마가 될 줄 알았다.
지금은 천안에 계신 엄마가 이전에 양산에서 사실 때, 내가 결혼하고 처음 신혼집에 오시는 날이었다. 나는 남편과 서울역에 마중을 나갔더랬다. 엄마가 딸 집에 오는데 바리바리 뭔가 싸서 오지 않으려나 내심 염려했던 것 같다. 서울역 대합실에 엄마가 나타났을 때, 나는 정말 눈을 비볐다. 손바닥만 한 클러치를 겨드랑이에 끼고 게이트에서 엄마가 단출하게 나오는데,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다야?!
21세기를 사는 나는 전근대적인 ‘엄마’라는 프레임에 갇혀, 나보다 더 21세기적인 엄마를 보고 놀라고 말았다. 아직도 백팩에 반찬통을 한가득 넣어오시는 시어머니와 비교가 돼 그때는 남편을 보기가 참 민망했더랬다. 화끈대는 얼굴로 엄마를 맞았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뭘 그렇게 효도하는 딸이라고 바라는 게 많은지 참 염치가 없었다.
엄마처럼 차갑게 살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내가 두 딸을 십 년 키운 엄마가 되니, 이제야 엄마처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문득 들어서 놀라고는 한다. 안타깝게도 독설만 엄마를 닮아, 지금은 두 딸과 매일 자매처럼 싸우지만, 나도 조금만 더 크면 뼛속까지 엣지 있는 엄마로 변모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바라기까지 한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물론 여전히 나는 엄마처럼 안 살 거라는 환상 속에, 아이들에게 다정한 엄마이면서 끊임없이 나로 살고 싶다는 진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애들 학원비에 다 털어 넣지 말고 노후 준비하라던 명언도 이제야 공감한다. 아무리 좋은 깨달음도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아이들 교육비에 돈을 다 쏟아붓고 나니, 이제 남편의 고용 불안이 숨을 죄어온다. 마음 한편에 숨어있던 불안은 아이가 자라면서 다시 비교하며 깊어진다.
이번 설 연휴에 친정에 갔다가 올케 언니를 만나 조카네서 키우는 개와 함께 집에 들어갔는데 엄마는 우리보다는 개를 보고 반기며 달려갔다. 애견인들은 이 상황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였지만, 우리 집에서 80년대 가부장이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나는 그 상황이 마뜩잖았다. 친정에서 이제 나는 개보다 못한 존재다.
사교육에 헌신하는 수학 학원 원장인 오빠에게 정이와 밤이 상담을 좀 했더랬다. 아직 기타를 치고 있는 두 아이를 보고 오빠는 내게 돌았다고 했다. 곰곰이 듣고 있던 엄마도 거든다.
애들이 불쌍하다. 이래서 엄마를 잘 만나야 하는데.
저번처럼 거품 물며 대성통곡할까 봐, 욕 들어도 애만 잘 된다면야 하는 심정으로 겨우 삼켰는데, 엄마도 엄만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원망스러운 마음이 고개를 든다. 종국에는 자괴감에 빠졌다가, 과연 엄마란 무엇인가 원론적인 문제 앞에서 나의 물음만 덩. 그. 러. 니. 남았다.
훌륭한 어머니를 둔 조카는 할머니 차 안에서 숙제를 하며 학원에 가도, 학원에서 늘 칭찬을 받는다고, 우리 엄마는 말한다. 어째서 매일 게임을 하고, 학원 차 안에서 숙제를 하는데도 칭찬을 받는 것인가. 그러고 보면, 엄마를 잘 만난 조카는 태어나기를 다르게 태어난 것이 아닐까. 올케도 엄마를 잘 만난 것이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아직 조카의 픽드롭과, 개 초코까지 돌보는 엄마의 상황을 가만가만 생각하다, 오빠한테 받은 스트레스를 우회해서 내게 말하는가 싶다가, 아니다 엄마는 그냥 내가 하는 짓이 얄미웠던 게 아닐까. 왜 엄마(같은 존재)들은 나를 그렇게 얄미워하는 걸까? 정신이 늙어서 그런 걸까. 철이 없어서 그런 걸까.
내가 식탁 의자에 앉자마자 엄마는 개딸 왔냐며, 이재명 대통령이 군인 월급 미지급한 걸 나한테 따진다. (참고로 난 개딸 아니고, 남편이 개아들이다.)
왜 나한테 그래?!
내가 대변인인가요?! 생각도 못한 한 가지로 나를 드잡이 해서 불편해진 나는 남편을 불러 얼른 검색해 보라고 했다. 대통령은 왜 소상공인 지원금은 주는데, 군인 월급을 아직 안 줘서 나를 욕보이는 것인가?! 속 시원하게 기자회견 좀 해주셨으면. 후속 기사가 없다. 좋은 엄마도 안 되는데, 자유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민으로서도 불행하다.
몇 해 동안이나 고장 난 채로 깜박이는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서 갑자기 어지러이 앞이 캄캄해진다. 두 아이의 사춘기에 스스로 소용돌이에 빠져 만신창이가 된 지금 내 심정으로는, 정이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서 고군분투하지만 짜증을 내면 나도 엄청 고소해하면서 가시 돋친 말로 애를 긁을지도 모르겠다는, 무시무시한 예감이 드는 것이다.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던 어릴 적 결심은 드레스룸에 처박혀서 울다가 우리 딸들한테 들켰을 때부터 무너졌다.
때때로 내 성질 대로, 욕망 대로 애들을 부리다가, 제정신 들며 반성하고 자조하다, 이조차도 되풀이하며, 결국에는 애들한테 원망 들으며 이게 인생이구나, 인생의 뒤안길에서 지나온 인생과 화해해야 하지 않을까. 그까지 하는 것이 부모의 숙명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다. 자녀도, 엄마도, 인간도, 생도, 그저 다 안쓰러운 존재일 뿐.
햇살 좋은 토요일, 아이와 가끔 들르던 ‘비단 어린이 공원’ 앞 스타벅스에 홀로 앉아 미국이 이란에 오늘 최대 폭격을 할 거라는 뉴스에 월요일 주식 시장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먼 데 나는 비행기를 흐린 눈으로 좇으며 수학 학원에서 나올 첫째를 기다리는 삶.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점점 줄어드는 이 순간에도 나는 지금 내가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
어느 날은 문제집을 매기고, 늘 혼이 나는 아이를 나만은 안아 주어야 하고,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일이 늘어난다. 어느 때는 우는 애를 끌어안고 같이 우는 날도 있다. 어느 날은 달래주지만 어느 순간에는 화를 낸다.
“너도 너 같은 똑같은 딸 낳아서 살아봐라.” 어릴 때 지리멸렬해하던 그 말을 나도 들은 대로 되돌려주는 삶. 산다는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반복하는 일, 살수록 알다가도 모르겠는, 되는 대로 살고 싶지 않지만 버티어 보는 것. 오늘도 잇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