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북토크에 대한 책방 사장의 입장

by 이애리
사회심리학자 프랑크 리스만은 '조력자 치료 원리'라는 이론을 세웠다.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를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이라는 이론이다.

우리 일상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다. 지하철에서 교통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하면,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서 앉아 있을 때보다 기운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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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우리 앞에는 '윈윈'의 세계가 펼쳐진다. 우리는 타인에게 무언가를 줌으로써, 준 것 이상을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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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돌보는 것이 나를 돌보는 것과 같다면, 반대로 누군가의 돌봄을 받는 것은 그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통약자는 자리에 앉음으로써 양보한 이의 기운을 북돋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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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신기하게 뒤집힌 세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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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을 받음으로써, 돌본다.

<<사람들은 왜 내 말을 안 들을까?>>를 쓴 도하타 가이토의
있기 힘든 사람들 p225~231


북토크 신청자가 0명이다. 이런 날도 온다. 결국 북토크 전날까지 기다렸지만 아무도 신청을 하지 않는다. 어제까지는 정말 괜찮고 싶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중드를 틀다가 잠들었나 보다. 새벽 6시, 현실에서 눈을 떴다. 커피를 줄이기로 며칠 전부터 결심을 한 상태로 카페인 부족인지 마그네슘 부족인지 눈꺼풀에 경련이 인다.

어찌 되었든 오늘은 해결해야 한다. 나도 어떤 결말이 해결인지 아직 모른다. 이번에는 또 누구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다행히 새벽이므로, 아침 9시가 되기를 기다린다. 먼저 출근하는 남편에게 당신과 어울리지 않지만 내일 북토크에 참석하라고 말한다. 요즘 심신이 고단한 남편이 이번에는 쉬겠다고 강경하게 말한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 퇴짜를 놓는다면. 오늘 난항이 예고된다.

글을 쓰면서 마음을 진정시킨다. 이렇게 40년 넘게 살았건만 만만한 사람 하나 없다. 자꾸 생각이 글을 멈춘다. 큰 딸을 부를까. 아니다. 티가 나게 인상만 쓰고 있을 첫째는 우선 패스다.

결국 만만한 데다, 인정이 있는 막내가 기상하자마자 내일 북토크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잠결에도 절대 싫다고 한다. 가족도 안 오는데 누가 오겠니, 정말 눈물이 찔끔 난다. 나도 모르게(정말 몰랐을까) 내일은 엄마 밖에 없어 울먹이니, 내일 그럼 북토크 갔다가 스타필드에 간단다. 그렇게 참여자는 1명이 되었다.

주식 시장이 열리자마자 요동치는 9시, 참여비 없이 내일 북토크에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먼저 취한다. 줄줄이 올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이 미안하다고 말한다. 나는 전혀 괜찮지 않지만 괜찮다고 말한다. 주식 그래프마냥 내 마음은 다시 출렁인다. 그래도 예상한 탓에 예전처럼 절망적이거나, 살아갈 의미를 잃을 정도는 아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이유로 거절이 마련돼 있다. 거리가 멀다. 취향이 아니다. 자기만 바쁘다. 가족이 상을 당했다(난 최악이다). 아이가 아프다(난 죄인이다). 이사를 한다(눈물이 난다). 게임을 하다 잠이 들었다. 읽씹, 안 읽씹도 있다.

어떤 지인은 아무 일이 없지만 일어날 자신이 없어 못 온단다. 이제 나도 이런 데 참여할 짬밥은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빙글빙글 웃으며 퇴짜를 놓는다. 유익한 소식은 어찌 다 신청하면서, 급박할 땐 궁색한 이유로 내치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북토크는 유익하지 않은 것인가?!

나의 마지노선이랄까, 유머를 잃지 않고 다시 한번 오라고 했지만 그는 나의 초조함을 알아줄 만한 여유가 없다. 모르는 척하기도 하고, 회피하기도 한다.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가 갑자기 그러는 건 아니다. 이번에는 이 친구를 꼭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늘 자기중심적이었던 사람에게, 이번에는 혹시?, 하고 물어서 이런 수모를 스스로 당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매달리고 원망할 거면, 안 하면 된다. 돈만 안 빌렸을 뿐이지, 나는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빚쟁이와 다를 바가 없다. 혹은 내가 그동안 준 게 있으니 이제 갚으라고 으름장을 놓는 채권자가 되기도 한다.

또 한 아는 강사는 자신의 강의 모집에도 분명 난 이런 식으로 모객을 했건만, 매번 이런 식으로 물어보면 곤란하겠다는 말을 한다. 나를 배려하는 말인가 싶었는데, 몇 번의 권유를 받은 자신 같은 사람이 곤란하다는 말이었다. 그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식는다.

창문을 여니, 찬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책상 위에 내내 펼쳐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쥐가 하는 말에 나는 눈을 뗄 수가 없다.


"때가 되면 결국 모두 자기 자리고 돌아가더라. 그런데 나만은 돌아갈 자리가 없었던 거야"


나는 충분히 돌봄을 주었는데, 돌봄을 받고 있는 것인가. 나만 늘 손해 본다는 생각이 든다. “줬으면 잊는다.”가 신조지만, 내 마음속에 저장돼 있던 그때 그거, “give & take” 가 발현된다. 난 이렇게까지 했는데, 얜 한 번을 안 도와준다. 난 이럴 거 같은데, 얜 결국엔 이기적이다. 다 자기가 먼저인데, 내가 이렇게까지 남 생각해야 하나. 오만 가지 생각이 나를 괴롭힌다. 몰라서 그런 게 아닌다... 아무것도 모르니까 이런다.

그들도 내가 필요할 때만 연락이 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내가 메시지를 보내면 상대는 두려움에 떨지도 모른다. 나를 알아서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차단했을 수도 있겠다고 자조한다. 점점 날카로워지는 망상의 끝은 결국 나를 향한다.

사람들을 얼마나 더 원망해야 할까. 사람들에게 얼마나 더 미안해야 할까. 내가 너무 싫다.

저녁이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친한 작가님들이 차라리 취소하라고 조언한다.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들도 죄송하다고 연락이 온다. 나는 왜 사람들을 죄송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몸은 몸, 마음은 마음. 그렇게 나눔으로써 데카르트는 뭐가 뭔지 모르게 뒤죽박죽이던 세계를 깔끔하고 편리하게 정리했다.
그렇지만 몸과 마음이 깔끔하고 편리하게 나뉜 상태를 유지하려면, 실은 여유가 있어야 한다. 몸과 마음은 늘 나뉘어 있지 않다. 평소에는 깨끗하게 나뉜 듯한 몸과 마음에도 실제로는 뒤죽박죽 섞여 있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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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처럼 상태가 안 좋아지면 몸과 마음의 경계는 간단히 무너진다. 그리고 몸과 마음이 뒤섞인 무언가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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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가 나빠져서 ‘이상’해지면 마음과 몸의 경계선은 불타서 없어진다. 그때 마음과 몸은 ‘마몸’이 되어버린다.

있기 힘든 사람들 p.96-97


금요일 하루 내내, 내가 아는 모든 인간을 미워했다. 결국, 거울을 보며 네가 제일 문제야, 중얼거린다. 매번 느꼈지만 이제는 팬덤과 지인을 믿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북토크에 대한 다른 판로나 모드 전환, 혹은 가치관 변화가 필요하다.

한두 명은 보통 신청할 만한데 이런 ‘0명’의 사태까지 오게 된 원인이 뭘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그 모든 이유를 뭉뚱그려 보면 안일함이다.

방학에 일정을 잡은 탓이 제일 크다. 작가님께 돌숲은 초등학교 바로 앞, 아파트 안에 자리한 상가 건물에 자리한 책방이라 주 고객이 억지로 책을 읽는 학부모와 자녀 독서에만 관심이 있는 학부모다. 일상이 독서인 어른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책방에 잘 오지 않는다. 그들은 10분 거리에 일월 도서관에 가거나, 중고로 구매하거나, 혹은 포인트와 연관된 온라인으로 책 구매를 한다.

자연히 성인 책모임과 북토크에도 별로 흥미가 없다. 동네 안이라 조심스럽고, 한 마디라도 시킬까 겁이 난다. 게다가 방학 동안에는 어른들은 육아로 정신적, 육체적 여유가 없다. 차라리 잠이라도 자는 게 더 낫지, 어떻게 주어진 주말 아침인데 굳이 책방에 올 리가 없다.

지속적으로 책을 사고 북토크에 참여하는 것은 대부분 책과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다. 그림책으로 치자면 그림책 활동가나, 그림책과 관련된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도 방학에는 육아를 하고, 쉬어야 하고, 특강을 뛰고 있다.

연령대를 고민했을 때도 그림책 성인 북토크에는 매력이 없다. 지인 외에는 올 사람이 없다.

그동안 나의 권유와 독려로 책방 행사에 참여했던 내 또래는 이제 자녀가 중고등 학생이 되니, 그림책도 필요 없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기에는 일상이 너무 쪼달리고 바쁘다. 주말이지만 돈을 벌거나, 자녀의 학원 픽드롭을 챙겨야 하고, 돌봄이 필요한 양가 어른들을 챙겨야 한다. 그들도 돌숲을 이 정도 도와줬으면 이젠 자립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듯하다.

어린 자녀가 있는 학부모는 이미 여행 일정이 있거나, 아이가 아프거나, 필라테스는 가지만 본인 독서 관련 모임, 특히 그림책 북토크에는 일절 관심이 없다.

물론, 자녀 방학과 관련이 없는 선배맘들은 아예 다른 세상에 산다. 그들은 장구를 치고, 줌마 댄스 대회에 나가느라 짬이 없다. 숲 해설사나 요양 보호사 자격증을 따야 한다. 나라도 책이 아닌, 다른 세계를 경험해 보고 싶을 것 같다. 책을 읽고, 북토크에 참여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특히 그림책을?!

어떤 학부모가 스타필드에 <최소한의 삼국지>를 쓴 최태성 북토크에 다녀왔는데, 대기가 어마어마했다고 하면서 정말 유익했다고 연락이 온다. 여러모로 씁쓸하다. 나도 아이들을 데려가고 싶었는데 평일 낮이라 어려웠다.

게다가 텅 빈 돌숲이 있다면, 미어터지는 별마당도 있는 것이다. 돌숲 입장에서는 사실 화제성으로 최태성과 차인표도 모실 수 있다. 그런데 굳이, 나까지 보태고 싶지 않다. 물론 우리 동네 비독서인 문화 활동을 위해서 그분들을 섭외할 수 있다. 그러나 유명한 작가는 스스로 책에 1도 관심 없던 엄마를 자식을 위해서 작가 북토크에서 줄도 서 보게 하는 것이다. ‘그런’ 작가는 갈 곳이 많다. 나까지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 (물론 20만 원 이하의 강사료를 받고 그쪽에서 먼저 오겠다고 하면, 나도 좁은 돌숲에 책상마저 다 빼고 모실 의향은 있다.)

그림책 작가로 치자면, 이수지, 백희나, 권윤덕 정도의 작가는 북토크를 골라서 한다. 그림책도 책 중에 사이드 영역이니까 어쩌면, 이들도 오라는 데가 적을 수 있다. 그러나 돌숲에 이들이 온다면 미어터질 것이다. 아닐까? 아닐 수도 있다. 의외로 신청자가 적어, 나는 또 절망할지도 모른다.

작가의 신작이라 빠른 홍보가 필요했기 때문에 혹시 하는 기대감으로 방학에 잡은 일정에는 역시, 패배감이 남았다. 그림책도 문제였다. 나는 성인 북토크를 방학에 잡는 '혹시'는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책' 북토 크는 계속해야만 한다.


나는 거대한 이야기 말고, 일상을 받치고 있는 사사로운 이야기로 삶을 채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거대한 사람이 되지 않고도 자신의 일상을 담담히 살아가는 작가들을 보여주고 싶다.


우리 사회에는 개인의 작고 소소한 경험들이 너무 안 알려져 있구나. 특히 여성의 일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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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평범하지만 분명히 특별한, 같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할 법한 여성들의 서사를 들려주고 싶었다. 저 하늘의 멘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 위에서, 다른 일을 통해 다른 삶을 열어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참고 문헌처럼 들려주고 싶었다.

어떤 응원 p.8-9


언젠가 마을 운영 커뮤니티 관련하여 모임이 있었는데, 작은 도서관에서 봉사하는 한 분이 무료 프로그램을 마련하지만 모객이 너무 어렵다고, 이렇게나 좋은 프로그램을 유치하는데 왜 사람들은 안 오는지 모르겠다고 성토했다. 사람이 안 오는 이유는 부지기수다. 오는 것보다 안 오는 이유가 저항이 덜하다. 사람이 모이게 하려면, 결국 ‘다른’ 것 혹은 '비싼' 것을 해야 한다. 입소문이 날 시간도 필요하다. 그땐 그런 생각을 하며, 모객이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했다.

요즘 나는 그 자원봉사자가 자꾸 생각이 난다. 준 사람은 받을 생각도 갖고 있다. 타인이 요구한 것도 아닌데 선의로 공공적 가치를 선뜻 제공한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노력의 대가를 바라게 된다. 타인이 알아주지 않으면 분노가 쌓인다. 그런 것과 별개로 사기가 꺾이기도 한다.

내가 강사비 주는데 강사 눈치까지 봐야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가도, 막상 닥치면 사람을 모으지 못한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당근이든, 알바를 쓰든 모객을 하는 것이 나의 일인데, 너무 안일하게 일처리를 한 게 아닐까 죄책감이 든다. 결국 내 능력은 ‘0’ 명이었소, 인정하는 꼴이 된다.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작년에 어느 지역의 한 중대형 서점에 <<순례 주택>>을 쓴 유은실작가의 그림책 신작 <<전쟁과 나>> 북토크에 다녀왔다. 북토크에는 우리 가족 넷을 포함해 11명이 모집되었다. 나름 인지도가 있고, 관록이 있는 작가가 우리 동네에 오는데, 왜 신청자가 없을까.

전쟁을 겪었던 이가 사라지고 전쟁을 아는 이도 죽는다. 모르면 사라질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현실이 안타까웠고, 이야기가 아까웠다. 사실 이것은 끝나고 난 심정이고, 북토크 공지가 붙었을 때 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주말에 집콕을 하고 싶어서 신청을 하지 않았더랬다. 서점 대표로부터 모객이 어렵다는 전화를 받고서야 가족 넷을 신청했던 것이다. 다녀와서는 안 갔으면 어쩔 뻔, 이라는 후기가 남는다.

왜 모객이 어려웠을까. 물론 그때도 휴가철이었고, 서점에서 오랜만에 문화 활동을 하는 데다, 홍보가 부족했는데, 작가의 작품이 전쟁과 관련된 그림책이었기 때문도 있었다. 어떤 일에 원인은 동시 다발적이고, 복합적이다. 주된 원인이 있지만 그마저도 불분명하고, 다른 이유가 더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양한 알 수 없는 이유에도 불구하고, 서점 측은 작가에게 죄송한 마음으로 취소 여부를 여쭈어야 했고, 유치하는 능력의 한계와 동네의 오래된 중대형 서점의 오명과 홍보 의지 부족의 낙인까지 신경 쓰고 책임져야 하는 등 입장이 불편했을 것이다.

수원에 어느 책방지기가 진심으로 수익도 안 나는 북토크만은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아마 내가 북토크에 넌덜머리를 내니 그런 것 같은데, 아무튼 하등 도움 될 것이 없는 북토크는 안 하면 되는 것이다. 책방에서는 왜 북토크를 (특히 그림책) 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 후 유은실 작가의 북토크를 유심히 지켜봤는데, 꾸준히 독서모임과 북토크를 하는 곳에서는 기본 팬덤이 있어서인지 조금 더 모집이 되긴 했다.

최근에 근처 <책방 마음이음>에서 이미경 작가의 북토크가 있어서 신청했다. 나도 기획자가 아닌, 참여자로 북토크에 참여하니 무척 행복했다. 이렇게 행복한 행사가 내 동네에서 일어나는데, 왜 사람들은 안 오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스트레스를 받으며 북토크를 여는 것인가.

대표님이 보통 북토크를 열면 마이너스인데, 처음으로 손익분기점이 넘었다고 한다. 한 단체에서 와 주신 데다, 작가의 책을 많이 구입하셨고, 강의료는 yes24와 연계해서 분담이 되었기 때문이다. 손익분기점을 고려해야 한다면, 동네 책방과 상생하는 프로젝트나 나라나 시에서 하는 지원 사업에 도전하면 된다.

어떤 일이든 우리는 잘 되는 방법, 돈 잘 버는 방법을 알고 있듯이, 모객이 잘 되는 방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가장 쉬운 방법은 돈을 쓰면 된다. 독자가 원하는 강사를 초빙하면 된다. 또, 시간을 들여 기획하고 모집하면 낫다. 그렇게 되면 서점에 마케팅 부서도 필요하고 기획부서도 필요하다. 가장 깔끔한 방법은 북토크를 안 열면 된다.

지원 사업을 찾아 지원하는 것부터 내게는 일이다. 무언가를 다각도로 잘하기에는 무리다. 그것도 1인 체제는 에너지와 시간을 잘 분배해야만 무너지지 않는다. 결국에는 책방지기가 할 수 있는 한, 책방지기의 결대로 해야 가늘고 길게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아직도 과정에 있다. 내가 하려는 일은 돈이 덜 되는데, 수익이 나게 하려니 고군분투해야 한다. 수익을 포기했지만 가치 중심적인 일로 선택한 ‘북토크’는 마이너스이면서도 오라고 빌기까지 해야 한다.

나는 동네 독자의 니즈와 돌숲의 수익성을 고려해서 돌숲의 주 수입원인 ‘돌숲 멤버십’을 운영한다. 돌멩이 수프가 이웃인 <책방 마음이음>과 비슷하다고 생각도 하지만, 기업과도 비슷하다고도 생각한다. 기업의 모든 계열사가 수익을 창출하는 것은 아니다. 현대 그룹 중에서도 자동차의 부품을 만드는 현대모비스의 주 수입원은 모듈, 램프도, 전장, 새시도 아닌 a/s 사업부다. 일부가 전체를 이끈다. 나머지는 미래 먹거리로서, 개발로서, 가치로서 운영되는 부서가 태반이다. 일부를 위해 전체가 밑에서 채우고 있다.

나도 멤버십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다르게, 다양하게’ 운영을 하고 싶다. 여러모로 어려운 창작자를 후원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들고, 무척 잘 되기란 힘들지만 계속해야 한다는 의지도 필요하다.

독자가 오롯이 독자일 필요도 없다. 창작자와 서점끼리 서로 힘이 되어야 하고, 그 연결을 하는 방법도 있다. 이번에도 나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매월 작가 북토크를 여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 작품이 좋아야 하고, 한 번만 모신다는 기준이다. 왜냐하면 세상에 작가는 많고, 책을 좋아하고, 판매하는 일을 하는 나는 책이라는 물성으로 독자에게 다양한 경험을 선사해야 하므로 좋은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고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작은 책방이 신작 북토크를 열면서 모객이 어려운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북토크'라는 행사에는 책방 사장과 창작자의 입장만이 아닌, 독자의 입장도 당연히 있다. 나는 한때 오롯이 독자였다.

내가 수원으로 이사를 와서 동네 사람을 사귀지 못하고 있었을 때 집 밖으로 처음 나간 곳이 행궁동에 있는 <브로콜리숲>이라는 동네책방이었다. 그림책 소모임이 있어서 용기를 내어 참여를 했고 그곳에서 강이랑 작가님과 동백문고 관계자(?)를 만났고 그림책을 더 폭넓게 배우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좋은 사람들을 만나 이어지며 그림책을 쓰고 지금은 그림책방까지 열게 되었다. 책을 사고파는 행위만이 아닌 그때 그 동네책방에서 맺은 소통과 관계는 10년 가까이 나를 지탱해 주는 뿌리 같은 존재가 되었다.

또 그때 맺은 인연으로 동백문고가 확장을 하고 여러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자릿수를 채워야 하거나, 관심이 있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수원에서 용인까지 거의 매일 가다시피 한 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운전을 하다가 도로 터널만 들어가면 땀이 나면서 게임 속 세상에 온 듯 어지럽고 졸린 듯한 가벼운 공황발작 같은 증상이 있었는데, 매일 동백문고를 습관적으로 오가며 치유가 되었다. 그때 맺은 인연은 당연히 돌숲까지 이어지고 있다.

실제로 돌숲 북토크 후에 나처럼 드라마틱한 순간을 맞이한 이들이 꽤 있다. 앨범을 듣는 것과 공연을 보는 것의 차이가 확연하듯 , 북토크도 작가와 독자, 책방지기의 교감이 이루어진 선물 같은 현장감이 확실히 있다.

그 현장감을 제공하고 싶고, 함께 누리고 싶다. 모객의 괴로움 따윈, 사실 감사와 충만감으로 대체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북토크는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고독해지면 ‘마음과 몸’을 나누는 얇은 막이 타버리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누군가와 함께 ‘있는 것’이 필요하다. 그들은 타인을 향해 열려 있으며, 동시에 타인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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균형을 잃고 제어할 수 없게 된 마몸은 다른 마몸과 함께함으로써 안정을 되찾기 때문이다.

있기 힘든 사람들 p.99



해거름이 질 때 우리 아이 둘, 다른 엄마와 자녀, 일찍 가야 하는 한 분, 또 섭외한 한 분이 다른 한 분을 모시고 와 총 7명이 모집되었다. 마음이 푸근해진다. 이 중에 밤새 무슨 일이 생겨서 내일 메시지가 올까 봐 두렵지만, 우선 안도할 수 있는 지금을 누리고 싶다.

오늘 내 상담이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러 나간다. 내일을 준비하고 싶지만 시간이 비는 때를 어렵게 맞춘 지라 취소하지 않는다. 어쩌면 내일 나올 수 있는지 물어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안고 나서게 된다. 새벽 12시가 다 돼서 들어왔지만 당연히 모객 이야기를 할 틈도 없이 자녀 욕을 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막상 내일이 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이다. 이미 많이 괜찮아졌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하다 정말 괜찮아진다. 서운한 이들은 며칠 피해 다니다 보면, 또 괜찮아질 것이다. 북토크가 내 인생의 다가 아니다. 훈훈한 멤버십도 있다. 모든 일은 지나갈 것이고, 괴로워하면서 ‘다시’ 치러낼 것이 자명하다.

이제야 내일 북토크를 어떻게 열면 좋을지 진지하게 생각한다. 과연 북토크에서 우선되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모객 생각에 정작 챙겨야 할 본질인 관계-정성과 감사-를 놓친 것은 아닐까.

부족한 인원만큼 다른 훈기로 채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오랜만에 다른 머리가 일을 한다. 작가님 책을 든다. 책에 집중한다. 글을 읽고 그림을 보는데 눈물이 어린다. 책이 너무 좋다.

마음을 전해야 한다. 책을 반복해서 읽는다. 펜을 들고 엽서를 쓴다. 작가님을 그렸다가 찢는다. 잔치에 꽃과 먹거리가 빠져서는 안 된다. 작가에게 주는 꽃다발은 하지 않는 대신에 오는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으로 꽃 한 송이씩 나눠주기로 한다. 인원이 적어 가능한 이벤트다.

아침에 꽃과 케이크를 픽업해 돌숲에 들어오니, 작가님이 나를 맞이한다. 작가님을 보자마자 우리는 부둥켜안았다. 그 마음으로 북토크를 잘 마무리했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뒤섞인 기억은 시간의 힘으로 성숙과 의미를 선사한다. 북토크 베스트 5에 들 정도로 이번 북토크는 웃음이 저절로 나고, 고개도 만 번은 끄덕인 시간이었다.

작가님은 우리 두 딸에 고마워했고, 개의치 않아 하셨다. 거의 끌려오다시피 한 독자들도 '소모임'만이 주는 다정함으로 시종일관 웃음을 터트리고, 말을 건네며 특별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애초에 사람이 적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다음엔 모두가 괜찮다면 1명(나)만 있어도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들었다.

역시나 큰일이 끝나면 실의에 빠지는 대신, 각오를 다진다. 다양한 북토크를 시도해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안일했던 태도를 반성한다. 수원의 <아뮤 컨셉>이라는 오래된 책방 대표님이 책방은 기획을 담당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일부 맞다고 생각한다. 책방지기의 다양한 정체성 중에 나는 많은 부분을 기획하고 실현하는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박만 바라지 말고, 소소한 북토크를 진행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1인 1 악기를 두드리는 북토크도 해보고 싶고, 음악, 연극과 연계한 북토크를 열고 싶다. <<청동 부동 명왕>>을 차용해 <1:1 독대 북토크> 도 괜찮을 것 같다. 1명이라고 하면 아무도 안 올 것 같다. 오지 말라고 사정하는 듯한 북토크도 나쁘지 않다. 정말 기묘한 북토크가 될 것 같아, 고개를 흔든다. 그러나 <기묘한 북토크>도 나쁘지 않다. 일반적이지 않은 북토크를 여는 것이다. 그걸 감당할 수 있는 작가만 받겠다는 북토크다. 감당할 작가만 와라! 그렇다면 책 판매는 포기하는 것인가? 지원 사업과 연계해 본다면 재미있을 것 같다.

북토크에 대한 나의 입장은 그렇다. 작가에게는 괜찮다는 당부이고, 나에게는 다짐이었다. 독자는 마음대로 하라고!

이 글을 쓰는 동안, 북토크에 참여했던 한 작가님이 행사를 여는데, 돌숲 어린이들 올 수 있냐고 물어보신다. 우선 나는 어린이가 아니므로 제외다. 돌숲 단체 공지방에 홍보해 드리겠다고 답장한다. 인생사, 상부상조, 품앗이다. 서로 돕고 도와야지. 안 되면 나라도 출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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