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에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 재벌그룹들은 수십 개의 계열사(系列社)를 소유하였고 자산 규모가 상당히 컸다. 그 그룹들은 계열사들의 정보화를 담당할 회사를 설립하여 지원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삼성 SDS나 LG CNS와 같은 회사는 그룹의 정보화를 담당하는 IT서비스 회사였다.
내가 근무했던 회사도 이러한 회사였다. 우리 회사는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첫 번째 방법은 업계에서 SM(System Management)이라고 부르는데, 고객사의 IT실에 파견근무하여 전산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이다. 고객사의 인사, 재무, 생산, 구매, 품질 등 전산과 관련된 모든 일을 지원하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SI(System Integration)라고 부르며, 공공기관, 은행, 대기업 등에서 발주한 정보화 사업을 수주하여 프로젝트 기한 내에 구축하는 것이다. 세 번째 방법은 회사가 보유한 데이터센터와 같은 기반시설이나 교육 등을 통해 수익을 올리는 것이다.
나는 그룹의 A계열사 IT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하는 일은 고객사의 생산 업무가 잘 돌아가도록 전산 운영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려면 두 가지가 중요했는데, 전산시스템이 잘 구축되어 있어야 하고 고객사 직원과의 관계가 원만해야 했다. 여기서 고객사의 직원을 현업이라고 불렀다.
현업은 파견근무하는 타회사 직원인 IT실 직원에게 갑(甲)의 위치에 있었다. 내가 일했던 생산파트도 현업이 갑이었으므로, 우리 파트는 현업의 요구사항에 대해 원만한 협의 및 조율을 하여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현업과의 관계가 원만하면 현업의 요구 범위를 줄이거나 기한을 늘리거나 때로는 없앨 수도 있었지만, 관계가 좋지 못하면 인정사정없이 요구조건을 내걸며 일정기한 내에 완료해 줄 것을 요구받았다. 현업의 요구사항에 대해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있다면 현업과의 관계라고 할 수 있었다.
신입사원 시절 현업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선, 컴퓨터 프로그래밍(코딩) 능력이 부족하였으므로 현업의 요구사항에 대한 납기 완료 기한을 맞추기 어려웠다. 현업과 함께 업무 회의를 할 때에도 그들의 요구 내용이 무엇인지 왜 이러한 요구를 하는지 이해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또한 비흡연자이며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하고 싫어하여 퇴근 후 현업과의 술자리에 함께 하는 것도 즐겁지가 않았다.
이러한 내가 보기에 존경할만한 직장 선배가 있었다. 그는 나와 같은 팀이었다. 그는 현업과 업무 회의를 할 때나 전화통화를 할 때 의견 차이로 인해 목소리 톤이 올라가거나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고 조리 있게 설득했다.
어느 날 그는 현업과의 회의를 마치고 기운 없어 보이는 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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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뿐만 아니라 내년 후년에도 계속 이 회사(고객사)에서 운영해야 하지? 우리가 하는 일은 개발이 아니라 운영이잖아. 우리는 논과 밭에서 농사짓는 농부라고 생각하면 돼"
논과 밭에서 농사짓는 농부? 그는 IT개발팀원이 새로운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농토로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와 같은 IT실을 운영하는 사람은 농토에서 식물을 잘 경작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이라로 비유하여 말했다. 그러려면 현업의 요구를 잘 경청하고 파악하며, 그들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의 말에 공감했다. 내 부족함이 무엇인지와 현업과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