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남의 보라카이 7박 8일 여행기(7)

코코넛 한 잔의 여유

by 선명이와 지덕이

아내와 함께 들어간 곳은 화이트비치 스테이션 3에 위치한 카페였다. 내부가 넓게 트여 있어 개방감이 좋았으며 정면으로는 스테이션 3의 해변과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카페 입구 파라솔 아래에는 몇몇 여행객들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었고, 오전 시간이라 실내 좌석은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테이블마다 놓인 브런치 접시와 음료 잔들을 보니 식사가 가능한 카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바다와 가까운 쪽 좌석에 자리를 잡았다. 곧이어 종업원이 다가와 메뉴판을 건넸다.


"오빠. 뭐 마실래요?"

"코코넛 주스 마실게요"


메뉴판을 살필 필요도 없었다. 아내의 물음에 나는 망설임 없이 코코넛 음료를 선택했다. 시럽이나 첨가물을 넣지 않은 코코넛 열매 그대로의 맛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전 태국 여행에서 맛보았던 그 시원하고 담백한 갈증 해소의 기억이 강렬했던 탓인지 동남아에 오면 항상 코코넛부터 찾게 된다. 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아내도 메뉴판을 덮으며 같은 것을 마시겠다고 말했다.


아내가 손짓으로 종업원을 불렀고, 우리는 코코넛 음료 두 개를 주문했다. 주문을 마치자마자 나는 곧 마주하게 될 코코넛의 생김새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유리컵에 담긴 가공된 주스가 아니라 열매가 통째로 나올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딱한 껍질 윗부분을 깎아내어 구멍을 내고 그사이에 빨대를 꽂아 마시는 동남아 특유의 투박한 방식이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이윽고 종업원이 코코넛 두 개를 가져와 테이블 위에 놓았다. 양손에 든 열매의 크기가 꽤 큼직해서 한눈에도 양이 많아 보였다. 빨대를 타고 올라온 액체는 달착지근하면서도 결코 과하지 않은 맛이었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당도였다. 평소 설탕이나 시럽이 듬뿍 첨가된 음료는 혈당을 갑자기 높여 몸에 좋지 않은 반응을 일으키곤 했다. 그래서 국내외 어디를 가든 맛이 조금 심심해지더라도 시럽을 빼달라고 종업원에게 요청하곤 했는데, 이 천연의 코코넛은 그럴 염려가 없었다.


'음... 이 맛이야'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아내를 바라보았다. 아내 역시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빨대로 음료를 깊게 들이켰다. 탁 트인 해변과 카페 안의 평화로운 풍경을 번갈아 보며 코코넛 음료를 즐기고 있을 때였다. 커다란 개 한 마리가 느릿한 걸음으로 아내 옆에 슬금슬금 다가왔다. 카페에서 키우는 개인지 사람을 피하지 않았고 흰 바탕에 어두운 색 무늬가 섞인 비교적 덩치가 있는 녀석이었다. 낯선 손님 곁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는 품새가 이곳의 터줏대감 같았다.


260402-보라카이 카페 속 개-KakaoTalk_20260402_204240871.jpg


녀석은 아내가 마시는 코코넛 음료가 탐나는지 앞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내도 그 시선이 못내 신경 쓰이는 눈치였지만 과자 같은 간식도 아니고 빨대로 마시는 음료를 개에게 나눠주기란 애매한 일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소득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개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켜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녀석은 먹을 것을 달라는 듯 점잖게 자리를 잡았다. 어떤 손님은 개와 눈을 맞추며 다정하게 말을 걸기도 했고 어떤 이는 익숙한 풍경인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다 종업원이 근처를 지나가면 개는 반갑게 꼬리를 흔들며 그 뒤를 졸졸 따라갔다. 역시 누가 진짜 먹을 것을 줄 사람인지 잘 아는 눈치였다.


카페에 앉아 있으면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흐른다. 특히 다양한 국적의 여행객들이 한데 어우러진 휴양지의 카페에서는 더욱 그렇다. 낯선 이들의 움직임을 구경하고 먼바다를 감상하다 보면 한 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가 버린다. 창밖 해변은 내리쬐는 햇살에 모래알이 하얗게 타오를 듯 뜨거워 보였지만 사방이 트인 카페 안은 바닷바람이 적당히 머물다 가 기분 좋게 선선했다. 아내와 나란히 앉아 핸드폰으로 한국 뉴스를 확인하기도 하고 잠시 깊은 상념에 빠져들기도 했다. 평온한 분위기 속에 몸을 맡기고 있으니 어느새 달콤한 졸음이 슬슬 밀려왔다. 주변의 나지막한 말소리와 가끔씩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멀어지더니 아내와 나는 어느새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지금 몇 시인가요?"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깜빡 잠에서 깨어난 나는 아내에게 지금이 몇 시인지 물었다. 배가 고프든 아니든 제때 삼시 세끼를 챙겨 먹어야 하는 나에게 몸 안의 배꼽시계는 벌써 점심시간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아내는 핸드폰을 확인하더니 정오가 거의 다 되었다고 답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화이트비치의 중심가인 디몰(D'Mall) 근처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곳에 가면 식당도 많고 가볍게 쇼핑센터를 구경하기에도 좋을 것 같았다.


아내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의 선선한 그늘을 벗어나자마자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감쌌다. 우리는 내리쬐는 햇살을 피하기 위해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밖으로 나왔다. 해변을 따라 디몰이 있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정오가 다 된 시간이었지만 이곳의 분위기는 식당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한국의 점심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해변 길은 오히려 한산했고 사람들은 저마다 그늘을 찾아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길을 따라 곧게 뻗은 야자수들이 파란 하늘과 대비되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두를 것 하나 없는 여행지의 나른한 정오, 우리는 그 이국적인 풍경의 일부가 되어 천천히 디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카페에서의 달콤한 휴식 끝에 맞이하는 또 다른 활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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