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장 위의 아침
이동의 고단함이 침대보보다 무겁게 아내를 눌렀던 모양이다. 밤 10시, 아내는 평소처럼 유튜브를 켜지도 내게 등을 내밀며 주물러달라는 부탁도 하지 않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여행이라는 설렘 뒤에 숨어있던 노곤함이 아내의 일상을 잠시 멈춰 세운 듯했다.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 곁에서는 종종 선잠을 자곤 한다. 좁은 더블침대에서 몸을 맞대고 누우니 아내의 숨소리가 평소보다 유독 크게 들렸다. 아내의 숨소리가 커질 때면 코를 고는 것인지 숨을 크게 쉬는 것인지 헷갈렸다. 이곳은 암막 커튼이 있어서 집에서보다 잠자리가 편안했다. 창가에 드리워진 두툼한 암막 커튼이 낮의 잔상을 완벽히 차단해 주었다. 그렇게 나의 여행 첫날밤은 깊어만 갔다.
보라카이에서의 아침은 집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휴양지에 올 때마다 아내는 주어진 시간을 남김없이 짜내어 즐기려는 듯 부지런해졌다. 어젯밤의 깊은 잠은 오늘의 활력을 위한 충전이었을까. 아내는 새벽 공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식사 전 호텔 실외 수영장을 다녀오겠다며 채비를 서둘렀다. 수영복과 물안경을 챙기는 분주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외선 때문에 피부가 상할지도 모르니 너무 오래 있지는 말라고 한마디 거들었지만, 아내는 이른 아침의 햇살쯤은 괜찮다며 웃어 보였다.
문득 1월의 한국을 떠올렸다. 칼바람에 강물도 얼어붙었을 그곳을 생각하니 마음껏 물살을 가를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수영을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낙원이겠구나 싶었다. 아내가 "다녀올게요"라고 말했다. 나는 아직 잠에서 덜 깬 얼굴로 "그래요. 다녀와요"라고 말했다. 아내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침대 위에서, 나는 여행이 주는 이 기분 좋은 나른함을 조금 더 만끽하기로 했다.
잠에서 깨어난 후 세면을 하고 TV를 시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자 수영을 마친 아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수영장 물이 너무나 맑고 깨끗하다는 아내의 자랑 섞인 권유에 나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반, 일상이었다면 분주히 출근 준비를 할 그 시간에 우리는 식사를 위해 느긋하게 1층으로 내려갔다.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의 이국적인 유니폼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되었음을 느꼈다.
"굿모닝!"
멀리서부터 시선을 붙드는 빨간 유니폼의 직원 두 명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이 밝은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넸고, 나 역시 그롤 보고 목례를 했다. 직원의 친절한 손짓을 따라 들어선 식당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어젯밤 보았던 헤난 가든 호텔 레스토랑의 화려함과는 또 다른, 소박하지만 깔끔하게 정돈된 차림새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식당 안은 이미 부지런한 여행자들로 활기가 돌았다. 아내는 주변을 살피더니 한국인이 적은 것 같다고 나직이 말했다. 그 한마디에 우리가 한국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진짜 여행이 시작되었음이 실감 났다.
식사를 마친 아내가 해변 산책을 제안했다. 가벼운 외출 차림으로 호텔 문을 나서자 눈이 시릴 만큼 투명한 파란 하늘이 우리를 반겼다. 해변으로 걸어가는 길, 문득 이 맑은 날 다른 여행자들은 어떤 하루를 구상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도착한 해변은 오전의 나른함 때문인지 무척이나 한산했다. 어젯밤 발 디딜 틈 없이 인파가 몰렸던 그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밤새 축제를 즐겼던 이들은 아마도 지금쯤 호텔의 하얀 시트 속에서 늦은 단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게으른 평화 덕분에 우리는 파도 소리만 가득한 아침 해변을 둘만의 속도로 거닐 수 있었다.
"밤에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해변이 길어 보여요"
"그러네요. 그런데 우리가 있는 이곳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글쎄 모르겠어요"
"이곳을 스테이션 2라고 한다네요"
아내는 우리가 현재 스테이션 2 구역에 서 있다고 일러주었다. 화이트비치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뉘는데, 우리가 있는 이곳은 쇼핑센터인 디몰이 있어 늘 사람들로 북적이는 활기찬 중심지였다. 아내는 손가락으로 해변 북쪽을 가리키며 저곳 스테이션 1은 고급 리조트들이 모여 있어 조용한 휴양을 즐기기에 좋고, 반대편 남쪽의 스테이션 3은 로컬 맛집과 가성비 좋은 숙소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아내의 설명을 듣고 나니 보라카이라는 거대한 도화지에 구역마다 다른 색깔의 여행이 그려지는 기분이었다.
아내의 안내를 따라 스테이션 3 방향으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곁에 펼쳐진 에메랄드빛 바다는 매우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 고요한 수면 위로는 섬 투어와 호핑을 떠나는 보트들이 수평선을 향해 긴 여운을 남기며 나아갔다. 시선을 높이자 푸른 하늘엔 알록달록한 패러세일링 낙하산들이 꽃처럼 피어 있었고 그 아래로 카약과 제트스키가 바다의 활기를 더하고 있었다. 정적인 평화와 동적인 에너지가 공존하는 풍경이 빛나는 아침이었다.
오늘 하루를 어떤 색깔로 채울까 고민하며 걷기 시작했다. 일단 더운 공기를 식혀줄 시원한 코코넛 음료를 마시자고 제안하자 아내는 그전에 따뜻한 백사장을 맨발로 마음껏 걷고 싶다고 했다. 아내는 고운 모래의 감촉을 즐기며 맨발로, 나는 익숙한 운동화를 신은 채 나란히 해변을 거닐었다. 스테이션 3의 한적한 끝자락까지 다다라 길의 끝을 확인한 후에야 우리는 다시 활기가 감도는 스테이션 2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적당한 휴식처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중, 스테이션 3 구역 내에 위치한 한 카페가 유독 평온해 보였다.
"여기 어때요?"
"좋아 보이네요. 날도 더운데 차 한 잔 마시러 들어갈래요?"
시곗바늘은 이제 막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살은 벌써 정오의 그것처럼 뜨거웠다. 1월 중순, 한겨울의 한국을 떠나온 우리에게 이 낯선 열기는 우리가 남쪽나라에 왔음을 확실히 느끼게 했다. 달궈진 모래 위를 걷는 아내가 걱정되어 서둘러 눈여겨둔 카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뜨거운 열기를 피해 들어선 그늘 아래서 창밖으로 펼쳐진 푸른 바다를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