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카이에서의 첫날밤
호텔 방에 입실한 지 삼십 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캄캄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열대 지방이라 낮이 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해가 금방 저물었다. 시장기를 달래려 아내와 함께 서둘러 호텔을 나섰다. 이곳의 밤거리는 어떤 분위기일까. 화려한 네온사인과 인파가 가득한 활기찬 거리일까, 아니면 파도 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바닷가일까. 호텔 문을 나서며 기분 좋은 상상에 빠져들었다.
낯선 거리를 걷자니 방향 감각이 마비된 듯했다. 어느 쪽으로 가야 음식점이 밀집한 거리가 있을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거리가 딱히 어두운 건 아니었지만, 워낙 길눈이 어두운 탓에 눈에 들어오는 것이 별로 없었다. 내 시야를 메운 것은 어딘가를 향해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영어로 도배된 간판들, 매연과 소음을 내뿜으며 승객을 태우고 지나가는 개조된 오토바이 '트라이시클'들이었다.
"지금 여기가 어디예요?"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도 이곳이 처음이라서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찾아보았다. 아마도 구글 맵 같은 지도 앱이나 방향을 알려주는 나침반 앱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 듯했다. 아내는 잠시 후 나에게 말했다.
"해변으로 가려면 이쪽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아내를 따라 메인 도로를 걷다가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골목은 그리 길지 않아 가볍게 산책하며 걷기에 딱 좋았다. 호텔 입구마다 제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꼿꼿이 서 있었고, 그 사이로 여행객을 불러 세우는 호객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의 끄트머리에 다다르자, 마침내 탁 트인 바다와 하얀 백사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해변이네요"
아내에게 말했다. 어두워서 바다 위에 무엇이 떠 있는지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지만 모래 위로 밀려드는 바닷물과 파도 소리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파도는 철썩거리며 모래사장을 덮쳤다가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백사장에는 하늘 높이 솟은 야자수들이 늘어서 있어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풍겼다. 모래 위에 서서 바다를 보며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과 우람한 야자수 밑에서 쉬고 있는 현지인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는 첫날 숙소로 홀리데이 호텔을 택한 이유로 가성비와 위치를 꼽았다. 비용이 저렴하면서도 보라카이의 중심 쇼핑센터인 디몰(D'Mall)과 가깝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우리는 해변에 온 만큼 백사장을 따라 걷기로 했다. 메인 도로와 달리 해변의 음식점과 술집들은 백사장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 있어서 길눈이 어두운 나에게도 기억하기 훨씬 쉬워 보였다.
평일 저녁임에도 해변은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 사이로 여행객을 겨냥한 호객꾼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들은 음식점이나 술집 앞에서 전단지를 흔들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니하오'나 '안녕하세요' 같은 인사말을 툭툭 던졌다. 한편에서는 '마사지, 마사지!'를 연신 외치며 발길을 붙잡으려는 이들도 보였다.
해변을 따라 걷던 중 헤난 가든 리조트 앞을 지날 때였다. 아내가 리조트 1층에 있는 '가든 카페'라는 레스토랑 앞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입구에 세워진 배너 속 메뉴들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해변 쪽에서 바라본 레스토랑 내부는 훤히 들여다보였는데, 한창 디너 뷔페가 운영 중인 모양이었다.
"가격은 좀 있네요. 그래도 여기서 식사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시계를 보니 어느덧 오후 7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더 이상 지체했다간 저녁 식사가 너무 늦어질 것 같아 아내의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자 직원이 우리를 친절히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실내는 은은한 오렌지색 조명이 비치고 재즈 음악이 흐르는 분위기 좋은 곳이었다. 우리는 짐을 내려놓고 음식을 담기 위해 뷔페 코너로 향했다.
음식이 차려진 곳으로 가니 가장 먼저 라이브 그릴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요리사가 즉석에서 구워내는 고기와 해산물의 고소한 향이 식욕을 자극했다. 그 곁으로는 필리핀 현지 요리와 달콤한 열대 과일들이 풍성하게 놓여 있었다. 특히 반가웠던 것은 한국인 여행객의 입맛을 달래줄 한식 코너였다. 정갈하게 담긴 김치와 매콤한 고기 요리는 타지에서의 긴장을 살며시 녹여주는 듯했다.
옆으로는 신선한 회와 초밥이 놓인 일식 코너가 깔끔하게 자리 잡고 있었고 딤섬과 볶음 요리 같은 중국 음식들도 식욕을 돋웠다. 입구 쪽 샐러드 바에는 아삭한 채소와 드레싱이 싱그러운 색감을 뽐내고 있었으며 디저트 코너의 망고와 달콤한 푸딩, 케이크들이 예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음식을 담기 위해 뷔페 라인 시작점에 수북이 쌓인 커다란 접시를 하나 집어 들었다. 수저는 이미 우리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었지만, 혹시 몰라 일식 코너 옆에 비치된 젓가락을 따로 챙겼다. 가져온 음식을 다 먹어갈 때쯤 배가 부르기 시작했지만 뷔페에서 한 그릇만 먹고 끝내기엔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새 접시를 들고 음식을 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맞은편에 서 있던 여직원이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이었다.
주변 손님들은 가벼운 반팔 티셔츠와 반바지 차림의 여름 복장이었다. 반면에 나는 긴팔 티셔츠에 겨울 바지, 심지어 점퍼까지 걸치고 있었으니 누가 봐도 주변과 어울리지 않는 차림이었다. 호텔에서 쉬다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그냥 나온 탓이었다. 밤이라 별로 덥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걷다 보니 몸이 덥고 둔하게 느껴졌다. 다른 손님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지만 그 여직원의 눈에는 내 복장이 꽤나 생경해 보였던 모양이다.
"나만 겨울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요"
"발리에서 샀던 옷 시원해 보이던데, 그 옷으로 갈아입고 오지 그랬어요?"
아내의 말에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샀던 옷이 생각났다. 열대 해변이 그려져 있는 얇고 시원한 소재의 반팔 티셔츠이다. 여행할 때 입고 다니기에 좋을 거라 생각하고 가방에 넣어두었는데 아직 꺼내지 않았다. 낯선 타국이지만 곳곳에서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주변에는 한국 여행객 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꽤 보였다. 뷔페에서 음식을 먹게 되면 음식에 대한 욕심에 생겨서 과식하게 된다. 하지만 과식의 유혹을 참아야 했는데, 식사 후 아내와 해변을 거닐며 오붓한 첫날밤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