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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호진 Mar 24. 2023

무명화가의 삶과 죽음

중증장애인 화가 고(故) 김지태 1주기 추모 예배

▲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핀 전남 광양시 다압면은 슬픈 소년의 고향입니다. ⓒ 이원규


섬진강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은 고향이 슬펐습니다. 겨울이면 섬진강 모래톱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이고 봄이 되면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광양시 다압면은 아름다운 고향입니다. 그런데 소년은 슬펐습니다. 엄마가 떠나지만 않았으면 소년은 흐르는 섬진강물처럼 해맑게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는 어릴 적에 떠났고 아빠는 엄마가 떠난 뒤에 삶을 비관했습니다. 슬픔에 잠긴 소년은 눈물 흘리면서 엄마가 돌아오시길 빌고 빌었으나 엄마는 끝내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절망의 술에 취해 살던 아빠는 어린 아들의 곁을 영영 떠나고 말았습니다.      


하늘은 소년에게 무심할 뿐 아니라 가혹하기까지 했습니다. 슬픔만으로 부족했던 것일까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소년의 몸이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근육의 힘이 너무 약해지면서 물건을 집었다가 떨어뜨리기 일쑤였고 걸음마저 뒤뚱뒤뚱 걷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봐도 소년은 잘못한 게 없습니다. 버림받기 위해 태어난 적도 없고 이상한 병에 걸리기 위해 어떤 짓을 한 적도 없었는데도 소년은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손꼽아 기다리던 엄마는 오지 않고 괴상한 병이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소년은, 돌봐줄 부모도 없고 의료시설도 없는 시골 마을에서 원인 모를 병에 시들어가던 소년은 슬픈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병상에 누워 ‘천장 예배’ 
드리는 중증장애인 김지태  


▲ 중증장애인인 김지태 청년의 백만 불짜리 웃음. ⓒ 조호진


2010년 봄, 서른 살 청년 김지태를 중증장애 아동시설인 ‘홍파복지원’(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1266)에서 처음 만났습니다. ‘하름교회’(한국기독교장로회) 교인이던 저는 ‘홍파복지원 쉼터’ 정기 봉사팀인 하름교회 ‘청년부’(부장 오연근 장로)를 따라갔다가 지태 청년을 만났는데 그는 쉼터 중증장애인 동료들의 대변인이었습니다. 쉼터 장애인들은 매우 심한 중증장애인들이어서 의사 표현이 어렵습니다. 그래서, 지태 청년이 동료 장애인들의 의사를 자원봉사자들에게 전하면서 동료의 욕구 해소와 봉사자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합니다. 지태의 성격은 섬세하면서도 밝습니다. 직원과 자원봉사자에게 나누어주는 환한 웃음은 백만 불짜리 웃음입니다.      

    

지태는 웃음만 선물하진 않았습니다. 중증장애의 불편한 몸으로 수많은 날밤을 새우면서 접은 종이학 수백 장을 하름교회에 선물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CD 또는 USB에 담아 하름교회 청년들에게 선물했고,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외출해 영화를 관람하고 영화가 끝나면 햄버거 가게에 가서 햄버거를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라포’(친밀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이 주는 물은 마시지 않을 정도로 경직될 때도 있고 간혹 삐지기도 했으나 그것은 괴팍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삶의 악기를 연주하다 내는 작은 음(音) 이탈 같은 것에 불과했습니다. 


지태의 병은 치료가 어려운 유전성 질환으로 병명은 ‘듀시엔형 근이양증’입니다. 근이양증 환자들은 대부분 20대 전후로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태는 서른 살 청년이 됐습니다. 열두 살에 홍파복지원에 온 지태는 엄마처럼 따뜻한 김순영 선생님을 비롯한 직원들과 친형보다 더 친절한 자원봉사자 원석이 형 그리고, 지태를 형과 오빠라고 부르는 ‘하름교회’ 청년부 동생들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받으면서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와 질병의 고통을 달랬습니다. 지태의 생명이 연장된 것은 지태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과 정성과 기도가 삶의 기쁨을 선물했고 그 기쁨이 삶의 소망을 낳았고 그 소망이 쌓이고 쌓이면서 생명 연장의 축복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 하름교회 본당에서 예배드리는 김지태 청년과 오연근 장로(맨 왼쪽), 김순영 선생님, 하름교회 박은정 청년 그리고, 지태의 머리맡에서 성경을 읽어주고 있는 친형 같은 양원석 씨. ⓒ 조호진


홍파복지원 직원인 김순영 선생님은 지태에게 엄마나 다름없었습니다. 건강 악화로 사경을 헤맨 적이 여러 번이었는데 중환자실에 실려갈 때마다 지태의 병상을 지킨 사람이 순영샘이었으며 지태 또한 순영샘이 곁에 없으면 불안에 떨었습니다. 2014년 가을, 슬픈 고향이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1박 2일 일정으로 다녀올 수 있었던 것도 순영샘의 동행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가 순영샘과 갈등이 생겼습니다. 순영샘 생일에 맞춰 용서를 빌고 싶었던 지태는 하름교회 오연근 장로님께 부탁해 향수와 꽃과 스카프를 준비했고 하름교회 청년들과 함께 순영샘을 찾아가 생일 축하 노래와 선물 전달을 통해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는 찬송가 중에서 특히 ‘샤론의 꽃 예수’라는 찬송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샤론의 꽃 예수’ 가사 중에서 3절 ‘샤론의 꽃 예수 모든 질병을 한이 없는 능력으로 고치사 고통하며 근심하는 자에게 크신 힘과 소망 내려주소서’를 간절히 부르는 것은 자신의 병이 치유되는 기적이 일어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원치 않는 고통에 시달리면 세상을 원망하면서 처지를 비관하기 마련인데 그의 마음에는 사랑의 꽃이 핀 것은 샤론의 꽃 예수 덕분이었습니다. 24시간을 누워 지내는 지태 청년은 병상에서 예수를 찬양하며 예배드렸습니다. 그런 지태 청년을 위해 시를 썼습니다.      


청년아, 병상에 누운 청년아

그대가 온몸 누운 채 천장 예배드릴 때

샤론의 꽃 예수는 그대와 마주하기 위해

엎드린 채 두 팔 벌려 말씀과 찬양을 나누었다.

청년아, 산소호흡기로 버겁게 숨을 쉬는 청년아

그대가 온 숨을 다해 간구의 기도를 드릴 때

그대와 사랑을 나누기 위해 피 흘리신 예수는

아픈 이들을 위해

누운 이들을 위해

슬픈 이들을 위해

날마다 찔리고 날마다 상하고 날마다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므로 청년아, 병상에 누워 천장 예배드리는 청년아

일어서지 못한 그대가 선 채로 쓰러진 이들을 중보 하라

병든 이들을 외면한 이 세상을 용서의 눈물로 씻어주어라

지상에서 흘린 눈물로 인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이니

아픈 그대는 신령과 진정으로 주기도문을 외우고 외울 것이요

눈물의 축도로 천장 예배를 마친 예수를 오래도록 묵상하여라.     


(병상에서 드리는 천장 예배 _ 샤론의 꽃 예수를 찬양하는 김지태 청년에게)     


크리스천 청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 하름교회 청년들이 김지태의 예배를 위해 병상에 누운 지태 청년을 예배당으로 옮겼습니다. ⓒ 조호진


그해, 오월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교회 마당에 모인 하름교회 청년들의 표정이 몹시 긴장돼 있었습니다. 병상에서 천장 예배를 드리던 지태 청년이 하름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홍파복지원’과 ‘하름교회’는 지태의 교회 예배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그날, 주일 오전 예배 30분 전에 장애인 이동 특수차량이 교회 입구에 도착하자 교회 청년들이 이동용 병상에 누운 지태 곁으로 모였습니다.  

  

예배 장소인 하름교회 본당은 3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있긴 하지만 산소호흡기가 달린 이동 병상을 싣기에는 좁았습니다. 하름교회 청년들이 모인 것은 지태 청년을 3층 예배당으로 들어 올릴 용사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지태의 교회 예배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긴 했으나 만일의 돌발 사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이 가볍지 않기에 긴장했습니다. 지태 예배를 위해 헌신할 하름교회 청년들이 많았습니다. 청년뿐 아니라 교인들도 중증장애인 청년의 예배 동참을 환영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필요한 용사는 병상을 옮길 청년 여섯 명이었습니다.  


지태를 계단으로 옮기는 장면에서 이스라엘 ‘가버나움’이라는 도시에서 있었던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예수가 가난한 병자들을 치유해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가버나움을 방문한 예수에게 치유받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중에 중풍에 걸린 친구를 낫게 해주고 싶었던 네 명의 친구가 중풍 걸린 친구를 예수께로 데려가 치유받게 하려 했으나 모여든 무리에 막혀 갈 수 없자 지붕에 구멍을 뚫은 뒤, 병상에 줄을 달아서 예수 앞에 내렸고 예수는 네 친구의 믿음에 감동해 중풍 병자를 치유했다는 일화를 떠올리면서 예배를 통해 치유의 기적이 선포되길….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중풍 병자가 사지를 휘저으며 걷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병상에서 누워 천장 예배를 드리던 장애인 청년이 교회 청년들의 헌신으로 그토록 소망하던 교회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기적이고, 쉽고 편하게 예배드리던 교인들이 지태로 인해 예배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기도 드린 것이 기적이고,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세상에서 영혼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청년들과 달리 사랑의 행함을 통해 달라진 교회 청년들의 삶이 기적이며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인생길에서 이날을 떠올리며 삶의 고난을 이겨낼 믿음을 간직했다면 그것이 기적 중에 기적이요,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 하름교회 청년들이 예배를 마친 김지태 청년을 힘을 다해 내렸습니다. ⓒ 조호진


장애인 쉼터 봉사의 책임자이자 하름교회 청년들의 든든한 멘토이신 하름교회 오연근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지태의 병상을 3층 본당까지 옮긴 6명은 하름교회 청년부원 오우주, 김민수, 전병주, 이민혁, 장현수 그리고, 지태의 친형이나 다름없는 원석 씨입니다. 원석 씨는 비기독교인이었지만 지태의 머리맡에서 예배 순서에 따라 찬송가를 불러주고 성경을 읽어주었습니다. 지난해, 지태 청년이 코로나19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자 가족이 되어 장례 참여와 유골 안치 등의 궂은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쉼터 중증장애인에게 행한 원석 씨의 사랑은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고귀한 것으로 고난에 처한 이웃에 대한 크리스천의 책임을 새삼 돌아보게 했습니다.      


1998년에 시작된 하름교회 청년들의 홍파복지원 장애인 봉사가 어느덧 20년이 넘었습니다. 주말이면 다른 청년들처럼 놀러 다니고 싶을 텐데 하름교회 청년들은 휴일을 반납한 채 장애인들을 섬기는 자원봉사를 하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란 뜻을 깨닫기도 했고 교회 청년공동체 일원으로 사랑을 실천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컸습니다. 하름교회 청년들이 지태를 비롯한 쉼터 장애인들에게 사랑을 나누었으나 사실은 그보다 더 큰 사랑을 장애인들에게 받았습니다.


쉼터 봉사를 통해 교회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작은 자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지태 청년의 교회 예배와 쉼터 봉사에 참여했던 하름교회 20대 청년들이 어느덧 30~40대가 되면서 결혼하고 부모가 되었습니다. 청년의 시절은 지나갔으나 청년의 때에 행한 장애인 쉼터 봉사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을 것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삶의 목적이 흔들릴 때마다 장애인의 아픔을 통해 깨달은 사랑의 힘으로 삶의 고비를 이겨냈으면 좋겠습니다. ”     


사랑을 먹고살다 떠난 김지태 
고통 없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길   

 

▲ 장애인 무명화가 김지태 1주기 추모 예배가 지난 3월 18일(토) 오전 11시 중증장애 아동시설인 ‘홍파복지원’ 쉼터에서 진행됐습니다. ⓒ 조호진


장애인 무명화가 김지태 1주기 추모 예배가 지난 3월 18일(토) 오전 11시 중증장애 아동시설인 ‘홍파복지원’ 쉼터에서 진행됐습니다. 이날 추모 예배에는 홍파복지원 쉼터 김대석 원장님과 김순영 선생님을 비롯한 직원들과 추모 예배를 인도한 하름교회 심훈 목사님 부부와 오연근 장로님 부부 그리고, 지태 청년을 친동생처럼 돌봐준 보컬리스트 양원석 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습니다. 고(故) 김지태 작가는 열두 살에 입소한 홍파복지원 쉼터에서 29년 동안 지내다 2022년 3월 18일 코로나 감염 후유증으로 향년(享年) 41세를 일기로 본향인 천국에 갔습니다.      


김지태 작가는 비록 무명작가였지만 중증장애를 극복하면서 인간승리를 증거 한 작가였습니다. 전신이 마비된 ‘근이양증’ 환자에게 그림 그리기는 무리한 도전이었지만 그는 도전했고 성공했습니다. 삼육재활학교가 쉼터에 파견한 강사에게 지도를 받은 그는 세필화, 민화, 파스텔화, 색연필화로 그린 작품 17점으로 2001년 2월 24일부터 28일까지 5일간 노원역에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런데, 첫 전시회를 앞두고 폐렴에 걸리면서 중환자실로 이송됐고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느라 전시회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김순영 선생님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들려주었습니다.      


▲ 노원역에서 첫 전시회를 연 김지태 작가의 작품.  ⓒ 홍파복지원


▲ 노원역에서 첫 전시회를 연 김지태 작가의 작품.  ⓒ 홍파복지원


▲ 노원역에서 첫 전시회를 연 김지태 작가의 작품.  ⓒ 홍파복지원



“지태에겐 부모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있었으나 자원봉사자를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아픔이 많이 치유됐고 그 힘으로 그림에 도전한 결과 수준급의 그림 솜씨를 보이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지태는 첫 작품 전시회에 대한 설렘으로 잠을 설치기도 했는데 ‘근이양증’ 환자에게 치명적인 폐렴에 걸리면서 사경을 헤매느라 자신의 전시회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김순영 선생님은 추모 예배 내내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랑하는 지태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지태가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받으면서 행복한 웃음을 지었습니다만 중증장애인의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지태가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면서 “생사를 오가는 위급한 상황마다 지태 곁에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해 면회마저 차단되면서 지태의 마지막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너무 가슴 아픕니다. 지태가 장애의 고통이 없는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지내면 좋겠다”라고 엄마의 마음으로 말했습니다.     

 

지태의 유해는 파주에 있는 통일로 추모공원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무연고자나 다름없는 지태 유해가 추모공원에 안치될 수 있었던 것은 보호자를 자처한 아름다운 사람 양원석 씨로 인함입니다. 보컬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원석 씨가 그 어떤 음악보다 아름다운 소리로 짐지태 작가의 삶을 이렇게 들려주었습니다.  


“홍파복지원 쉼터에서 식사 보조와 목욕 봉사를 하다가 2002년에 지태를 처음 만나서 22년 동안 친형제처럼 지냈습니다. 지태는 오래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2008년이었나? 3년 이상 살기 어렵다고 했는데 마흔 넘게 살았습니다. 의학적인 판단을 뛰어넘은 지태의 생명 연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기적의 배경에는 사랑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생전의 지태는 사랑을 먹고살았습니다. 장애인의 삶은 고통스러웠겠지만 많은 사랑을 먹고살다가 떠난 지태의 삶은 불행한 삶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 김지태 청년의 교회 예배를 위해 수고한 하름교회와 홍파복지원 관계자들이 예배를 마친 후, 인근 공원으로 이동해 봄날을 즐긴 후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김지태 청년은 그 이후에도 한 차례 더 하름교회 본당에서 예배드렸습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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