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참회록] 기독교 잡지 <빛과 소금> 2025년 4월호 기고문
#. 1
내 몸을 떠난
신장 한쪽이 잘 지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서 신장이식 수술을 진행한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 연락했더니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신다.”라고 안부를 전해주었습니다. 마흔여섯 해 동안 내 몸의 건강을 지키는 임무를 완수한 왼쪽 신장이 만성신부전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스물다섯 살 청년에게 2007년 5월 31일 오전 8시경 아산병원 수술실에서 이식됐습니다.
18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마흔셋의 중년이 된 그분은 이식에 따른 부작용 없이 건강하게 지내다 결혼했으며 행복하게 지낸다고 했습니다. 부모 형제끼리 주고받은 경우를 제외한 대다수의 신장 공여자와 수용자는 생면부지입니다. 이식의 부작용을 주의해야 하듯이 신장 공여에 대한 대가 요구 등의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해 서로의 얼굴도,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 것이 원칙입니다. 나의 것을 나눈 게 아니라 주신 걸 나눈 것이므로 대가를 바라거나 생색내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리 없습니다.
그래서, 잊고 지냈습니다. 까마득히 잊고 지내다 문득 생각이 나서 처음으로 안부를 물었습니다. 내가 낳은 적 없는 새들이 우짖고 내가 씨 뿌린 적 없는 들꽃이 화들짝 피어 만발한 봄 들녘을 보면 저절로 “하나님 아버지, 어찌 이리 아름다운지요!” 찬양하게 되는데 하물며 나의 한쪽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어찌 아니 기쁠 수 있을까요. 꽃과 새들이 노래하는 봄이 아름답긴 하지만 꺼져가던 생명의 불꽃이 회복하는 소생의 봄보다 더 아름다울까요.
2007년 6월 6일 퇴원하던 날,
40대 후반의 여인이 제 병실에 찾아오셨습니다. 청년의 어머니였습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던 청년의 어머니는 “부모도 주지 못했는데 남이 어떻게 주실 수 있는지요… 얼마나 아프셨습니까, 얼마나…”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한 채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라고 위로의 말씀을 드린 까닭은 여인의 두 아들이 유전에 의한 만성신부전으로 고통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낳은 두 아들이 현대 의학으로도 극복하기 힘든 병으로 고통을 겪는 것을 보면서, 부모의 유전에 의한 병이라는 사실 앞에서 어머니는 얼마나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었을까요.
청년의 어머니는 자신의 한쪽 신장을 한 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을 다른 아들에게 주고 싶었으나 줄 수가 없는 가슴 아픈 사정을 전해 들은 저는 청년의 어머니에게 “다 잘 됐으니 얼마나 좋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아드님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말의 속뜻은 내 몸을 떠나 그 청년의 신체가 된 한쪽 신장이 나에게 해준 것처럼 임무 수행을 잘해달라는 당부였고, 그 청년이 만성신부전의 고통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살길 빈다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두려운 마음으로 서원을 이행한 제가 부끄러운 삶을 벗기 위해 바친 참회의 기도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 2
『하꼬방 지붕 위 루핑이 가난보다 더 서럽게 떨던 1970년 그해 겨울, 새끼줄로 꿴 낱장 연탄을 든 노점상 홀아비가 귀가도 하기 전에 배급 밀가루는 떨어졌습니다. 호롱불 그을음보다 더 깊은 어둠이 내리면 흙벽 틈새로 닥친 삭풍이 송곳처럼 찌르는 냉골이 무서워 홑청도 없는 솜이불에 숨었다가 모가지를 내밀면 얼려 죽일 듯이 위협하던 망나니 같은 엄동이었습니다.
새마을 취로사업에 나선 동민들이 언 삽으로 동토의 땅을 삽질하면 공동펌프도 시래기도 얼어버렸고 오목교 뚝방에서 불을 피우던 아이들은 얼어 죽은 새와 쥐에게 침을 뱉고 동사한 걸인 노인을 덮은 가마니를 지켜보던 전선(電線)이 북풍한설에 자지러지듯 곡(哭)을 하고 황천길 노잣돈 하라고 누가 던져 놓은 누런 동전 몇 개가 얼어 죽은 무연고 영혼을 애도했습니다.
겨울이 옵니다. 판자촌 어미들이 밤 봇짐을 싸고 술주정하다 쓰러져 잠든 아비 몰래 수제비로 허기 채우는 엄동의 겨울이 옵니다. 보름달 떠오르면 술 취한 아바이는 오목교 뚝방을 허청허청 걸으며 ‘고향 가야디, 평남 대동군 용연면 천리, 내 고향으로 가야디’, 늙은 오마니 계시는 북녘 고향을 애타게 그리던 아바이가 끝내 귀향하지 못한 그해 여름, 영등포 시립병원으로 실려 간 행려병자 배천(白川) 조(趙)씨는 벽제화장터에서 고달픈 피난살이 끝냈습니다.
어미들은 왜 도망갔을까. 무슨 부귀영화 누리려고 자식새끼 버린 게 아니라 지겨운 가난과 불화를 견딜 수 없어서 밤 봇짐을 쌌다고 했습니다. 뚝방에서 날리던 연은 어두운 하늘로 사라지고 아무리 기다려도 돈 벌어 돌아온다던 엄마는 소식조차 없다가 발신인 없는 소포가 배달되자 판자촌 여자들이 ‘집 나간 피산이 엄마, 부산에서 여관 조바 한다더라!, ’ 전라도 어디선가 술집 한다더라!‘ 쑥덕거렸습니다.
새마을 고등공민학교 중퇴한 형은 구로공단 공돌이가 됐습니다. 공순이 생활이 지겹다던 판자촌 누나들은 차장이 되거나 술집으로 돈 벌러 갔고 동네 형들은 소주 병나발 들이키며 깨진 병으로 팔목을 그으면서 가난에 깨지지 않겠다며 패싸움을 벌이다 더러는 소년원에 갔고 더러는 영등포 역전에서 구두닦이를 했습니다.
엄동설한에 철거반이 기습하면 오목교 판자촌은 비상이 걸렸고 철거반원들이 해머로 판자촌을 부수고 때 묻은 양은 냄비를 걷어차면 동네 소년들은 투석전을 벌이면서 울부짖었습니다. “우리 집 부수지 마!” 눈물 훔치며 짱돌로 대응했지만 쨩돌로는 집을 지킬 수 없었으므로 폐허 더미 위에 움막을 지었습니다.
밀가루 배급하던 동사무소 직원이 “법을 어기면 안 된다’고 일장 연설하면 ”그럼, 얼어 뒈지란 말이야! “ 빈민들은 깽판을 놓았고 그의 자식들은 더 부서지지 않기 위해 검은 안양천에 뛰어들어 멱을 감았고 공장들이 쏟아부은 폐수에 떼 죽음당한 메기와 붕어들이 배를 뒤집은 채 ‘우리도 좀 살자!’ 죽음의 시위를 벌였으나 판자촌은 끝내 철거됐습니다.
술집과 노름판을 전전하던 피산이 형이 무연고자로 비명횡사한 지난해, 겨울이 오기도 전에 어미에게 버림받은 소년들은 부천역을 떠돌다가 가출팸이 되거나 호송차를 타고 소년원 ‘법자’(법무부의 자식들)가 되고 거리를 떠돌던 어린 미혼모는 또다시 버림받기 위해 아이를 낳고 아비에게 마저 버림받은 소년은 미혼부가 되어 지아비처럼 어린 자식을 버린 뒤 아동수당을 몰래 타 먹는 원미동의 해 뜨지 않는 겨울.』
(‘1970년 오목교 뚝방촌에서 2025년 원미동까지’)
#. 3
지난해 가을, 피산이 형이
예순여섯의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총명한 소년이었던 형은 어머니가 가출한 뒤에 구두닦이를 했고, 판자촌 또래들과 어울려 패싸움했고, 물건을 훔치다가 소년원에 갔습니다. 소년원에서 나온 뒤에는 순천교도소에 갔고 38 따라지 고달픈 피난살이에 지친 아버지는 오마니 계신 북녘 고향을 그리다가 행려병자로 생을 마쳤습니다. 자식 버린 죄의 공소시효가 끝났음에도 "당신이 나를 버려서 내 인생이 이렇게 됐다!"면서 노모의 죄를 추궁하며 난동을 피우던 피산이 형이 무연고자로 세상을 하직했을 때,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그가 깬 소주병과 유리창과 핏자국과 울부짖음부터 지워야 했습니다.
이혼과 파산의 벼랑에 내몰렸던 저는 문패도 번지도 없는 주소 불명의 아비였습니다. 죽는 건 두렵지 않았지만 두 아들이 아비의 삶을 대물림하는 건 끔찍했습니다. 세상은 막막했고 살벌했습니다. 두 아들을 데리고 월세방을 얻으러 갔더니 홀아비에겐 방을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서러워서 울었습니다. 그랬더니 어린 큰아들이 ”아빠, 하나님이 더 좋은 곳을 주실 거예요! “라면서 못난 아비를 위로했고, 막내아들은 누군가 준 꼬깃꼬깃한 5천 원짜리를 저에게 주면서 ”아빠, 이 돈으로 빚 갚으세요 “라며 막장에 내몰린 저에게 삶의 희망을 선물했습니다.
하나님과 저는 생면부지였습니다. 판자촌에 살던 어린 시절, 친구들이 교회 가자고 해서 따라갔다가 가난을 차별하는 것만 같아서 다신 가지 않았습니다. 시골 공고를 졸업한 직후, 기독교인이 만든 공장의 공원(工員)으로 기숙사 생활했습니다. 일요일이면 쉬어야 하는데도 교회에 가야만 했습니다. 야간 잔업 등의 장시간 노동에 지친 공원에게 필요한 건 예배가 아니라 밀린 잠이었습니다. 잠과 휴식을 빼앗는 교회가 싫었고 가난한 공원에게 달콤한 사탕발림하는 장로 사장님이 싫어서 공장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렇게 교회를 싫어하고 하나님을 미워하던 제가 울며불며 기도했습니다. 어린 두 아들과 함께 캄캄한 지하 예배당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생면부지였던 하나님이 저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안아주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나와 함께 살아야 이혼과 파산, 배신과 버려짐, 술 취함과 방탕으로 얼룩진 가계의 저주를 끊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원(誓願)했습니다. 깨진 가정을 회복시켜 주시면 하나님이 주신 신장 한쪽을 나누겠노라고. 그랬더니 천사 같은 아내와 재혼을 허락해 주시고 깨진 가정을 회복시켜 주셨으며, 아프리카 선교사를 꿈꾸던 큰아들을 연구교수로 세워주시고 막내아들은 위기청소년의 자립을 돕는 ’소년희망공장‘(카페) 공장장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것 만으로도 복에 겨운데 손녀와 손자까지 선물로 주셨으니 고난을 끝내 이기면 축복의 날이 오리라던 말씀은 헛된 약속이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생면부지인 저를 조건 없이 사랑해 주셨지만 저는 조건을 내걸고 거래했습니다. 불순한 의도를 잘 아시면서도 괜찮다고, 가난과 버림받음은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건져내면 죄의 웅덩이에 또 빠지고 또 빠지는 인생을 건져주었음에도 아버지 품을 떠나는 탕자를 기다리겠노라고, 어미에게 버림받은 상처가 다 씻겨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환대해 주셨습니다. 티끌만큼이라도 염치가 있으면 통회 자복하고 다신 넘어가지 않아야 마땅함에도 습관처럼 죄에 넘어가는 저를 향해 네 놈은 구제 불능의 인생이라고 욕하면서 잡은 손을 놓으신다 해도 무슨 염치로 고개 들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불쌍한 나의 아들아! 가계에 흐르는 저주의 피를 씻어야지. 네가 아니면 그 누가 저주를 끊겠느냐며 쓰러진 저를 일으켜 주셨습니다. 몸이 아플 때면 가장 취약한 곳인 왼쪽 신장 부위가 아려왔고 그러면 아버지가 수술 자국이 선연한 옆구리를 어루만져주셨습니다.
로마 군인이 찌른 창에 피를 다 쏟아내신 주님이 한 줌의 재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육신에게 주의 면류관을 씌워 주시면서 한 생명을 살린 것을 잘했노라 칭찬해 주시면서 삶이 흔들릴 때면 너의 옆구리 꿰맨 자국을 보면서 흔들리는 생을 부여잡으라고, 그리 살다가 마침내 흙으로 돌아가거든 가계에 흐르던 저주의 피를 끊는 임무를 완수하게 해 주신 은혜에 감사하라고, 아내와 자식과 손주에게 믿음을 유업으로 물려주고 오라 하시는 주 은혜의 말씀에 두 손 모으는 사순절의 아침.
※ 기독교 잡지 <빛과 소금> 2025년 4월호에 기고한 졸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