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호진 시인의 희망 한 톨] 동암(東巖)의 아들 차영조의 인생 이야기
독립운동가의 아들을
고문으로 추대한 까닭
비영리 민간단체 '어게인'에는 고문(顧問)이 딱 한 분 계십니다. 단체들이 고문을 추대할 때는 지위, 돈, 명예 등을 가진 사람을 모시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어게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고문으로 추대한 분은 지위와 돈 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지위, 돈, 명예는커녕 가난과 병고로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그분을 고문으로 추대한 까닭은 자애로운 인품과 겸손한 성품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정)에서 국무위원과 비서장을 역임한 동암(東巖) 차리석(1881~1945)의 외아들 차영조(77) 선생님을 고문으로 모신 것은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란 이유 때문만은 아닙니다. 많이 배우지 못했으나 도리를 모르지 않았고, 많이 가진 적 없었으나 가난한 이웃을 외면한 적 없고, 높은 자리에 오른 적 없다고 굽신거리거나 지조를 허투루 한 적 없습니다. 특히, 굶주림의 고통을 겪었기에 불우한 아이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십니다.
2014년 겨울, 서울 가정법원이 위탁한 보호소년들과 살 때였습니다. 그때가 설 전이었는데 암 투병 중인 차 고문님이 아이들의 사정을 듣고는 소고기와 떡을 주면서 "아이들에게 먹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굶기도 많이 굶고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차 고문님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그리고는 이 집 저 집 다니며 문전걸식을 해야 했고 아이스케이크(꼬챙이를 끼워 만든 얼음과자) 장사, 여관 보이, 국밥집 배달원 등을 하며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친일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며 살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유령처럼 떠도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였습니다.
지난 9월 9일은
동암의 75주기였습니다.
차 고문님은 아버지 동암보다 더 오래 산 노인이 됐습니다. 아버지 없이 산 세월은 그리 모질고 서러웠습니다. 가슴에 쌓인 눈물은 멍울이 됐습니다. 여든 앞둔 노인이 됐다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어찌 없겠습니까. 아버지의 도리보다 조국 독립을 더 중히 여겼지만 어린 아들을 두고 눈을 감은 동암에게 슬픔이 어찌 없었겠습니까. 아래의 글은 차 고문님이 임정 수립 100주년이던 지난해 3월 동암을 그리워하며 쓴 편지입니다.
아버지 동암께 부치는 편지
아버님!
저는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함부로 부를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아버지이기 전에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운동의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킨 동암은 저에게 너무 큰 산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버지라고 부르기보다 동암 선생님이라고 높여 부르곤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 나의 아버지라고 목메게 부르는 저는 어느덧 아버님이 세상 떠나실 때보다 더 늙은 일흔여섯의 아들이 되어 그리운 아버지를 불러봅니다.
동암이 걸어가신 길은 이 길 저 길이 아니라 오직 한길, 조국 독립의 길이었습니다. 분단의 길이 아니오, 분열의 길도 아니오, 사방팔방 갈래갈래 찢긴 길은 더욱 아니요, 오직 한민족의 하나 된 길이었건만 환국을 앞두고 아버님이 먼저 떠나시고 백범 선생님마저 흉탄에 가신 뒤에 오천 년을 한 하늘 아래서 살던 한민족이 남북으로 갈리고, 동서로 나뉘고, 좌우로 찢어지고 말았습니다. 못난 아들은 동암의 길을 감히 헤아릴 수 없고, 따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조국 독립의 길, 고난의 길, 풍찬노숙의 길을 걸으면서 남긴 아버님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싶어 병든 노구를 이끌고 길을 나섰습니다.
임정 수립 100주년(1919년 4월 11일 수립)을 앞둔 2019년 3월 13일부터 16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중국 상해, 가흥, 항주 등 임정 유적지 세 곳을 다녀왔습니다. 제 발길이 멈춘 곳은 항주 임정 기념관이었습니다. 항주는 어떤 곳입니까.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가 중국 상해 훙커우공원에서 거행된 일제의 '상해사변 승리 및 천장절 축하'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 원흉들을 제거한 상해 의거 이후, 이동녕과 김구 주석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야 했고 역시 일제의 탄압을 피해 피난길에 나선 김철, 차리석, 송병조 등 세 분의 독립운동가는 임정의 새로운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항주를 찾았습니다.
일경과 밀정이 호시탐탐 노리는 살벌한 상황에서 임정의 국무위원들은 항주 청사 주변 남호에 배를 몰래 띄워 놓고 임정 재건을 도모했습니다. 1932년 5월에서 1935년 11월까지 임정이 거점으로 삼은 항주에서 동암은 위기에 처한 임정을 재건하고 지키면서 임정의 파수꾼이 됐습니다. 아, 그때! 누란에 처한 임정이 와해됐다면 대한민국의 법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일신과 가족의 안위를 버린 채 목숨까지 내놓아야 했던 독립운동사를 어찌 자랑할 것입니까. 저는 임정을 지킨 동암에게 감동했으며 아들로서 아버지의 공로를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임정의 마지막 망명 정부 청사가 있던 중경에서 1944년 2월에 태어났습니다. 그때 동암의 연세는 예순넷, 백범은 "늙은 동암에게 아들이 생긴 것은 하늘의 축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늙은 아버지는 어린 저를 축복으로 여겼지만 어린 자식과 함께 한 시간은 1년 반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백범이 먼저 환국한 뒤 임정의 환국을 준비하던 동암은 1945년 9월 9일 과로사로 순국하면서 조국 땅을 밟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두고 눈을 감을 때의 심정을 저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재롱을 선물하는 손자를 키우면서 아버지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었습니다. 아, 내가 꼭 요만할 때 아버지가 어린 자식을 두고 눈을 감으셨는데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셨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습니다. 항주 임정 기념관에 걸린 아버지 동암의 사진 앞에서 저는 그때의 어린 자식이 되어 눈물짓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자 어머니는 저를 안고 병원에 찾아가셨습니다. 그러자 동암은 "젊은 여인에게 짐만 지워놓고 같이 귀국하지 못하게 되어 미안하오. 그러나 영조를 데리고 귀국하면 정부든 주변의 누구든 이 아이를 키우는데 도움을 줄 것이오. 그리 알고, 귀국하시길 바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조국은 동암이 생각하던 조국이 아니었습니다.
임정에서 같이 활동하던 이범석 장군님이 초대 국무총리를 하시고 백범 김구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는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나 친일파가 득세하면서 어머니와 저는 문전걸식하는 거지 생활까지 했습니다. 구걸해 온 밥은 한 끼니인데 이를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니로 나누어 먹다 보니 온종일 배고팠습니다. 노점에서 양담배를 팔아 생계를 이을지언정 아들 핑계로 손을 벌린다는 구차한 말을 듣기 싫었던 어머니 홍매영 지사는 어떤 도움도 구하지 않고 홀로 저를 키웠습니다.
청상(靑孀)의 몸으로 독립운동가의 자식을 키운 어머니의 생은 또 다른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셨던 어머니는 "수입에 맞게 생활해라", "갚을 길이 없는 돈은 꾸지 마라", "굶어 죽을지언정 남에게 손을 벌리지 말라"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머니의 생활신조 덕에 저는 닥쳐올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6개월 치 생활비를 비상용으로 남겨두고 살았습니다.
아버지, 삶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독립운동가 아들의 길은 영광의 길이 아니라 힘들고 위태로운 길이었습니다. 백범이 흉탄에 서거한 뒤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자 어머니는 저를 지키기 위해 차(車) 씨에서 두 획을 지워 신(申) 씨로 성을 바꿔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 학업을 중단한 뒤에는 아이스케이크 장사, 여관 보이, 국밥집 배달원 등의 밑바닥 생활을 했습니다. 홀몸으로 저를 키우신 어머니는 1979년 66세의 일기로 돌아가셨습니다.
서른다섯에 어머니를 잃은 저는 한전 검침원으로 일하고 중동과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가서 건설노동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2007년 위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일제가 물러갔는데도 여전히 친일파가 득세하는 세상에 울분이 쌓였던 것이 화가 되고 병이 된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법통인 임정을 훼손하고 독립운동의 역사를 왜곡하는 친일파 세상에 절망한 것입니다.
병든 노구를 이끌고 광화문 촛불 집회에 참석한 것은 동암의 아들로서 당해야 했던 치욕스러운 역사를 청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저에게 촛불 혁명은 이 시대의 독립운동이었습니다. 마침내 임정의 법통을 잇는 정권이 들어서면서 임정 100주년 기념사업이 전개되고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예우하는 등 독립운동이 제대로 조명되는 것을 보면서 저는 감격하고 말았습니다.
아버님!
늙고 병든 이 자식이 아버지처럼 역사의 산을 넘을 순 없겠지만 동암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역사에 누 끼치지 않도록 주위를 살피며 항상 낮은 곳에 있겠습니다. 청렴과 강직으로 소임을 다한 독립운동가 동암의 아들로서 겸손한 마음과 따뜻한 손길로 불우한 이웃에게 손을 내밀면서 동암의 역사가 100년 후에도 민족의 역사가 될 수 있도록 병든 몸으로나마 정의의 길을 걷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2019년 3월 21일 임정의 막내 차영조 올림
가난 속에서도
지조를 지킨 동암의 아들
차 고문님은 삶이 누추했지만 지켜야 할 것은 지켰습니다. 임정을 끝끝내 지킨 동암의 아들답게 가난과 병고 속에서도 지조를 지켰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란 이유로 죄인처럼 숨어 살면서 굶기도 많이 굶고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친일 반민족 세력에게 영혼을 판 적 없습니다. 독립운동가의 아들이란 완장을 차고 거들먹거린 적도 없습니다. 정직하게 일하고 근검절약하며 살았을 뿐입니다.
변절과 배신이 만연한 이 땅에서 신념과 지조를 지키는 일이 쉽다고 말하진 않겠습니다.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가 민족을 배신한 친일파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립운동가 후손 중에 변절한 이들은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조상의 삶을 짓밟으면서 친일 반민족 세력에게 영혼을 팔았습니다. 하지만 동암의 아들은, 병들고 가난한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 살기 위해, 끝끝내 임정을 지킨 파수꾼의 아들로 살기 위해 영혼을 꼿꼿하게 지켰습니다.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암 투병 중인 차 고문님은 놀라울 만큼 건강하십니다. 임정 100주년이던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건강을 유지하며 동암의 75주기 추모식을 진행했습니다. 그것은 독립운동 역사가 바로 세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동암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잠든 임정 묘역을 처음으로 참배하고, 임정 기념관 건립이 추진되는 등 독립운동 선열에 대한 예우와 명예가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차 고문님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습니다.
효창원 임정 묘역 성역화가 2024년 준공 목표로 추진되는 것을 보면서 차 고문님은 비로소 아버지를 뵐 면목이 선 것입니다. 동암에게 아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누가 동암의 유업을 이었을 것인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동암에게 하늘이 아들을 선물로 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은 가난과 고난 속에서도 유업을 이어 받았으니 하늘에 계신 동암이 어찌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차 고문님의 집안은
명문 독립운동가 가문입니다.
차 고문님의 안방에는 동암을 비롯한 네 분의 독립 애국지사가 모셔져 있습니다. 아버지 차리석(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작은아버지 차정석(2017년 대통령 표창), 고모 차보석(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 어머니 홍매영(2018년 건국포장) 지사까지 모두 네 명의 지사를 배출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기릴 유일한 자손은 차영조 고문 한 분입니다. 차정석과 차보석은 후손을 남기지 못했고 동암의 첫 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두 딸(차애련, 차영희)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차 고문님이 우리 곁에
오래 계셔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반일 종족주의>를 집필한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반민족 행위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자 자신이 동암의 외증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차영조 고문님에 의해 곧바로 거짓임이 밝혀졌습니다. 궁색해진 이영훈은 동암은 외외증종조부라고 구차한 해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토착 왜구들은 언제든 역사를 왜곡하는데 그들의 거짓을 누가 진실로 밝힐 것입니까. 동암의 아들이여,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길 빕니다.
이 시대의 독립운동은
따뜻한 세상 만드는 것
차 고문님의 희망은 친일파 청산과 함께 가난한 이웃도 행복하게 사는 세상입니다. 반민족 세력을 기필코 청산해야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한 손엔 정의 또 한 손엔 사랑이 있어야합니다. 어게인에 매월 후원금을 보내주시는 차 고문님은 "이 시대의 독립운동은 가난한 이웃들도 행복하게 사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라면서 "제가 보내는 후원금은 제 돈이 아니라 아버지 동암이 주시는 후원금"이라고 말씀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우리나라와 아프리카의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후원하는 돈은 제 돈이 아니라 아버님이 내시는 후원금입니다. 저는 애국한 것도 없는데 아버님 덕분에 보훈 보상금을 받고 있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아버님이 살아 계신다면 굶주리는 아이들을 외면하는 세상을 원치 않았을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동암 선생님도 후원금을 통해 그늘졌던 아이들이 웃음 짓는 것을 보시고는 기뻐하실 것입니다. “
독립운동가의 아들이 꿈꾸는 세상은 소외된 이웃과 불우한 청소년이 '우리나라 만세'라고 외치는 나라입니다. 저의 소망도 고문님의 소망과 다르지 않습니다. 차 고문님은 요즘 손주 재롱에 흠뻑 빠져 지내십니다. 어제(14일)는 손주 형제의 동영상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첫 손녀의 동영상을 페북에 간혹 올립니다. 그러면 차 고문님이 ‘좋아요’를 눌러주십니다. 차 고문님과 저는 손주 바보입니다.
아들에게 좋은 세상을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불평등한 세상과 야만의 정권에 맞서면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데 일조했으나 친일파 청산에는 실패했습니다. 차 고문님의 암 재발을 막으려면 종양을 완전히 제거해야 합니다. 그렇듯이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려면 종양인 친일파를 청산해야 합니다. 친일파 없는 세상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못했으나 손주에게만큼은 친일파 없는 대한민국을 물려주고 싶습니다.
손주 바보인
차 고문님과 제가
역사에 참여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