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로스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어렸을 때 읽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나에겐 두려움의 존재였다. 무서웠던 이유라면 특별하게 못생겨서. 위의 그림과 같이 카이로스는 신기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앞머리는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대머리고 저울과 칼을 들고 다니며, 날개는 등도 모자라 두 발에도 크게 솟아있었다.
여기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이는 내가 ‘카이로스’라는 이름을 절대 잊지 않는 계기가 됐다.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그를 가려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지만, 발견했을 때는 그 풍성한 앞머리로 쉽게 붙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고, 뒷머리가 대머리였던 이유는 그가 지나가면 잡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저울이 있는 이유는 기회 앞에 경중을 정확히 파악하고, 칼을 든 이유는 칼같이 결단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날개는 주저함 없이 재빨리 사라지기 위해서였다.
기회의 신이라는 ‘카이로스’의 생김새는 우리 인생에 다가오는 ‘기회’를 그 풍성한 앞머리에 못 보고 지나칠 확률이 크지만 마주하게 된다면 앞머리를 꽉 움켜잡고, 정확한 판단과 결단을 내리고 기회의 뒤꽁무니를 바라보며 허망하게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었다.
그 결과, 이런 기가 막힌(?) 신의 이름을 가져다 쓰고 있는 드라마 <카이로스>는 나에게 강하게 닿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엔 안쓰럽기까지 했다. 왜 하필 저 무서운 아저씨를 제목으로 가져다 쓰는 건지, 나아가 드라마가 ‘카이로스’를 대체 어떻게 품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카이로스를 시청하고 얻어낸 제목의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온통 기회와 후회로 점철된 드라마 <카이로스>. <카이로스>는 카이로스여야만 했다. 드라마 <카이로스>가 담고 있는 그들만의 ‘카이로스’도 그랬다. 이처럼 드라마 <카이로스>는 주인공에게 찾아온 기회의 신을 맞닥뜨리며 시작한다.
당장 수술이 시급한 엄마의 병원비를 도둑맞은 한애리(이세영)와 아이를 유괴당한 후 아내마저 자살하며 모든 가족을 일주일 만에 잃어버린 김서진(신성록). 첫 화에서 이 둘에게 놓인 상황은 참으로 가혹했다. 그런 그들에게 카이로스, 즉 서로 한 달의 간격을 두고 하루 단 1분간 공조할 수 있는 신의 기회가 주어진다. 이 1분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와 과거를 바꿔가며 후회를 만회할 기회를 얻는다.
다른 타임 크로싱 물과는 달리 카이로스는 고작 ‘한 달’ 차이밖에 두지 않는다. 보통은 시대와 시대를, 적어도 1년 이상의 차이를 두는 것과는 달리 드라마 <카이로스>는 애매한 한 달을 사이에 두고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나는 이 또한 ‘카이로스’의 의미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기억한다면 기억하여 생생하게 활용할 수 있지만, 잊는다면 한 없이 잊혀 쓸모도 없는 과거가 되어버리는 시간인 ‘한 달’. ‘한 달’은 우리 나름에 따라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경계에 놓인 시간이었다. 기회가 그랬다. 순간을 놓치면 재빨리 잊히지만, 언제나 기억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버릴 수도 있는 존재였다.
기욤 뮈소는 <작가들의 비밀스러운 삶>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아무리 보잘것없는 삶이라도 사는 동안 적어도 한 번쯤 운명을 바꿀 기회가 주어진다잖아. 카이로스는 삶이 제공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붙잡을 수 있는 역량을 의미하기도 해. 그래서인지 대체로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순간은 지극히 짧은 법이야.
그래서인지 극 중 한애리(이세영)와 김서진(신성록)은 그들 앞에 놓인 카이로스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지치지 않는 역량을 발휘를 하고 있다. 카이로스라고 여겨지는 10시 33분 그 순간,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복잡한 생각은 접어둔 채 일단 나선다. 설사 그 결과가 좋지 않을지라도 말이다. 그러다 보니 서로 곤경에 빠지기도 한다. 심할 때는 본인이 죽음의 문턱에 다다르기도 하지만, 인생의 최악을 이미 경험한 그들에겐 그 최악의 뒤바꿀 소중한 1분이었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자신들의 역량을 최대로 활용해 ‘카이로스’를 붙잡아 두어야 했다. 기욤 뮈소의 말대로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적 순간은 지극히 짧은 법이라 1분의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애리에게는 유일한 가족인 엄마를, 서진에게는 후회뿐이었던 아내와 아이를 다시 살려내는 게 간절했으니까.
각자, 인생에 카이로스가 필요한 순간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애리와 서진이처럼 카이로스가 필요한 순간, 카이로스를 만났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애리와 서진에게는 하루에 한 번씩 10시 33분이라는 카이로스가 주어진다. 하지만 이것이 처음부터 카이로스였을까? 10시 33분의 1분이, 서진과 애리의 한 달 차이가, 그들에게 카이로스였던 건 그 둘이 찾아내고 발견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들이 무언가를 이뤄내고자 하는 간절함과 노력이 결국엔 드라마의 제목을 <카이로스>로 만들어냈던 것이라고. 나아가 우리의 인생도 그럴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카이로스는 심술궂게도 뒷머리가 없다. 한 번 놓치면 다신 잡히지 않겠다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카이로스에게 뒷머리를 심어줄 발모제가 애리와 서진, 그리고 우리에게는 없다. 후회 가득한 인생이 카이로스 덕분에 두 번째 전환점을 맞이할지도 모르는데 어쩌면 우리는 카이로스는 놓쳤는지 조차 모르게 흘려보냈을지 모른다.
참 진부한 말이지만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카이로스를 찾아낼 눈치가 없다면 그저 준비를 많이 해 기다렸다 낚아채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애리와 서진이처럼 그저 33분을 기다리며 최선의 준비를 해놓는 것이다. 그렇게 카이로스의 앞머리 잡는 연습을 하면, 언젠가는 허공에 지속해서 뻗었던 손에 앞머리가 한 움큼 쥐어지게 되는 날이 올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