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Knowledge's Choice
수행(?)을 결심하며 잡은 목표는 두 가지. 하나는 톤을 포함한 랩 자체의 개선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트를 직접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둘 다 한시라도 빨리 개선해야 하는 문제이긴 했지만 일단 우선순위는 비트메이킹 능력을 키우는 것에 두었다. 스스로 비트를 만들 수 없는 래퍼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뿐이니까. 다른 뮤지션이 공개한 instrumental에 랩을 하거나 다른 비트메이커와 협업을 하거나.
그러나 다른 뮤지션이 공개한 instrumental에 작업한 곡은 유통이 불가능하다. 사실 그건 둘째 문제고 아무리 공들여 가사를 적고 랩을 입혀도 일단 '작업했다' 말하기 민망하다. 어쨌든 다른 뮤지션 소유의 곡이니까. 결국 래퍼 지망생들이 입문 단계를 조금만 벗어나면 누구나 그렇듯 나도 다른 비트메이커와 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역시 문제가 있었다.
만약 내가 힙합의 음악적인 부분에 더 집중하는 래퍼였다면, 그래서 다른 래퍼들처럼 미국 본토 래퍼들이 미리 만든 음악 중 멋지다고 생각한 것을 레퍼런스로 잡고, 비슷한 비트를 받고 랩은 한국말로 번안해 흉내 내는 수준에 만족하는 정도였다면 사실 이 부분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돈을 좀 지불한다 해도 본토 느낌 충만한 비트를 사서 쓰면 되니까. 그러나 앞서 적었듯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야 비로소 창작을 시작하는 타입이다 보니 그게 안됐다.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고 주제를 압축한 묵직한 한 마디 가사가 떠오르고 그 가사의 템포가 곡의 비피엠으로 머릿속에서 정해지는 과정까지가 거의 동시에 끝나야 창작욕이 솟는 나로서는 비트메이커가 미리 만들어 쟁여둔 비트에 만족하기 힘들었다. 친분 있는 프로듀서와 주제에 관해 충분히 얘기를 하고 작업을 진행해 본 적도 있었지만 나는 Rakim도 Guru도 C.L Smooth도 이제는 헐리우드 스타가 된 The Fresh Prince A.K.A Will Smith도 아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비트메이커와 팀메이트가 될 만큼의 운이 내게는 없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참에 비트를 만들어보자 하고 덤비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감사하게도 어거스트 님의 블랙 랩이나 (http://blog.naver.com/odeng2580) Alan JS Han님의 믹싱/마스터링 강좌(http://www.alanjshan.com/)처럼 비트메이킹에 참고할만한 강좌는 온라인에 많이 있었으나 그걸 볼 때면 뭐랄까 학창 시절 수학 수업 때의 기분만 떠올랐다. 들을 때는 뭔가 알 것도 같았지만 강좌를 끄고 큐베이스를 켜면 다시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될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비트 만드는데 재능이 없다는 걸 인정하기 싫은 듯 샘플 탓, 가상악기 탓을 하며 열심히 무료 샘플과 무료 가상악기만 열심히 모아갔다
그렇게 여기저기서 하릴없이 무료 드럼 샘플이나 모으고 다니던 그때 DCT 게시판을 통해 우연히 'History of hiphop'이라는 믹스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http://www.itstherub.com/ 에서 공개한 것으로 79년부터 2009년까지 해당 연도에 가장 핫했던 힙합 트랙들을 선별하여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길이의 믹스 셋으로 만든 것인데 그걸 보는 순간 이거다 싶었다. 힙합을 좋아하고 즐겨 듣긴 했지만 주로 내가 듣던 시기에 유명한 이들 몇의 앨범을 반복적으로 돌렸을 뿐 힙합을 그 시작부터 개괄적으로 알아보거나 들어볼 생각은 그간 한 번도 안 해봤으니까. 이 음악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발전해갔는지 공부하고 듣다 보면 내가 음악적으로 어떤 음악을 진짜 만들고 싶어 하는지도 명확해질 것 같았고 그렇다면 큐베이스 앞에서 멍해지는 현상도 사라질 것 같았다. 곧바로 믹스 셋을 다운로드하고 비어있는 2010년부터 2014년까지의 베스트 트랙도 구글링을 통해 http://www.hiphopisread.com/ 라는 사이트에서 찾아 디깅을 시작했다. 단순히 듣는 건 시간낭비이자 청력 낭비인 것 같아 엑셀 파일을 만들어 좋은 트랙을 찾으면 이 트랙이 왜 내게 좋게 들리는지 나름의 분석도 병행했다. 그렇게 한 달 반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그게 내가 음악을 만드는 데 있어 어떤 면에서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겠다. 그건 앞으로 내 작업물들을 듣는 이들이 평가할 몫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이제라도 이런 작업을 진행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동시에 조금 더 일찍 이런 작업을 진행하지 않은 게 아쉬웠을 정도로 이 작업에 만족했다. 통풍도 잘 안 되는 좁은 방음부스에 틀어박혀 음악만 듣는 건 사실 괴로운 일이었지만 이후 작업을 진행할 때마다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도 다녀온 듯 이전보다 훨씬 더 귀가 트인 기분을 느꼈으니까. 내가 곡을 만든 것도 아니고 단지 음악을 디깅 한 일로 제작기를 적는 이유도 그것이다. 만약 당신이 힙합을 하려고 한다면 최대한 많이 듣고 자신이 어떤 힙합을 좋아하고 하고 싶어 하는지부터 명확히 하길 바란다. '그런 거 별 관심 없고 나는 그냥 랩스타가 되고 싶어요. 성공할 수만 있다면 발라드 사랑 랩도 거뜬히 할 수 있답니다 '한다면 뭐 할 말은 없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깊게 힙합을 해보고 싶다면 이런 작업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이렇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기 힘들 것 같다면 필자가 블로그와 각종 힙합 사이트에서 하루 한 곡 씩 연재 중인 Take Knowledge's Choice를 체크하는 것도 추천한다. 이 작업을 통해 선별한 '내 귀에 좋은 힙합곡'들이다. 물론 가장 좋은 건 본인의 Favorite List를 만드는 것이겠지만 그게 어려울 것 같다면 이 리스트를 참고하는 것만 해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