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볼을 찐하게 탔다. 내 돈 주고 위스키, 토닉워터를 처음 샀다. 술집에선 하이볼을 맛없게 마신 적이 없었는데 똥손과 눈대중으로 대충 타보니 위스키와 진토닉이 따로 놀아서 참 요상했다. 근사한 잔과 각얼음도 없는데 M은 이따위 엉터리 술상을 그저 귀엽게 봐주었다.
유치원생들이나 할법한 '합동생파'를 하게 되었다. 나는 기념일에 알레르기가 있다. 무슨 무슨 날을 기념하고 케이크에 촛불을 켜고 다 같이 와아아아아아 박수 치며 화목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짓에 알레르기가 있다. 본인 의지로 태어난 게 아닌데 왜 축하를 하는지 받는지도 모르겠고, 평소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힘들게 하다가 생일날 케이크 앞에서 화목한 척하는 게 기괴했다. 그냥 평소에 잘하는 게 낫지 않나. 그래서 유난히 더 생일을 부정하며 365일 중에 하루일 뿐이라고 강조하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런데도 같은 해,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구실로 M과 파티라는 걸 해보기로 했다. 파티라고 하기엔 넘나 소박한 배달음식과 엉터리 하이볼 술상이 전부였지만 우리에겐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야 우리 사이에 무슨..."
같은 생년월일에 태어나 사회인으로서의 출발도 동시에 했던 우리는 지금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M은 한 회사에 장기근속을 하며 꽤나 높은 직급까지 올라갔(을 것이)고, 나는 이리저리 방황하며 후리하지 못한 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이 나이가 되면 회사 밖에서도 상사놀이 혹은 대표놀이에 심취한 인간들이 수두룩한데 M은 여전히 그냥 귀요미 똘똘이다. 초심을 간직하라는 말은 참 웃기다. 사람과 상황은 늘 변하기 마련. 우리는 지금 많이 변했지만 오히려 안 하던 '합동생파'를 하고 앉아있으니 좀 귀엽게 변했다고 치자.
한 시간이면 매우 양호한 거리라며 M이 환하게 웃었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하루 쉬는 일요일에 시간을 내어 와 준 것이 무척 고마웠다. 나라면 만사 다 제치고 집에 누워 있을 텐데. 밤 1시가 넘어서까지 신나게 웃고 떠들며 엉망진창 하이볼을 할짝였고 다음 날 새벽 M은 바로 출근을 했다. 체력도 좋지. 상쾌한 새벽바람을 마시며 M을 배웅하고 돌아와 곧바로 커피물을 올리고 그가 만들어온 미니케이크를 한입 했다. 그의 말대로 레몬아이싱이 씌워져 있어서 그렇게 눅눅해지진 않았다. 뜨거운 커피와 케이크가 위를 감싸니 더 허기가 졌다. 어제 먹고 남은 배달음식을 데워 아침상을 차렸다. 이놈은 회사에 잘 가고 있으려나. 아까 깜빡하고 바디로션과 선블록을 내어주지 않은 것이 갑자기 떠올랐다. 아이고, 아침부터 위스키 샷 한 잔이 당겼으나 이따 있을 수련을 위해 자제하기로 했다. 웃겨, 언제부터 위스키 마셨다고 나 참.
책꽂이를 통째로 비우면서도 아직 남아있는 책 중의 하나가 바로 데일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M이 26번째 생일을 함께 맞이하며 선물한 책이다. 어리바리 새파란 신입사원이었던 때. 아마 그때도 우리의 생일을 같이 축하했었나 보다. 사실 기억이 잘 안난다. 이 책만이 남아있을 뿐. 책을 간직하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