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일차
2017. 1. 25.
아... 온돌이 열일해서 바닥에 뒀던 바셀린 로션하고 다 녹아버렸다. 방바닥이 불 탄다고 미리 말이라도 좀 해줬으면 좋았을텐데.
혼자 걸어가면 심심했을 1시간 거리를 리어와 함께 걸어서 외롭지 않다. 다만 리어는 자가보행이 불가능해서 내가 계속 앞에서 끌어줘야한다. 네 발로 걸을 수도 있지만 그러면 너무 시끄럽게 소리를 질러대서 뒷발은 살짝 들고 앞에 있는 두 발로 걷도록 끌어줘야 얌전히 따라오는 친구다. 리어가 돌팍에 몇 차례 부딪히는 바람에 좀 놀라긴 했지만 무사히 산을 넘고 물을 건너 공천포에 도착했다.
게하는 이미 전지훈련을 오신 대학 축구부 형님들로 포화상태이다. 들어서자마자 무질서하게 늘어진 빨래 건조대가 길을 막는다. 뭔가 촘촘해서 쉽게 뚫고갈 수 없는 걸 보니 무질서하게만 보이던 빨래 건조대들이 수비대형처럼 보이기도 한다. 결국 탈압박에 실패하고 게하 앞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등장한 미취학 아동이 내게 떠넘겨졌다. 바다를 보고 나란히 앉아서 퀴즈놀이를 1시간 정도 했더니 적당한 타이밍에 삐져주시고 집으로 들어갔다.
두 달간 이 동네에 있었는데도 매 번 반쪽짜리 올레길만 걷다가 오늘에서야 올레 5코스를 전부 걸어본다. 바다가 잘 보이는 명당에는 부자들이 지어놓은 듯한 이쁜 집들이 당당하게 서있다. '아 여기 살면 진짜 좋겠다.'하는 이야기가 절로 나올 것 같은 비주얼들인데 전부 독채펜션이라는 조그만 간판을 달고 있다. 이렇게 좋은 집을 지어놓고 여기 와서 안 살 거면 탐라국에 계속 살고 싶어하는 나같은 사람들한테 집을 넘겨줬으면 좋겠다. 집을 이렇게 전시만 해두지 말고.
지난 9월부터 탐라국에 와서 막상 한 건 없는데 하는 것 없이 보냈던 이 시간이 그동안 자주 있던 것도, 앞으로 자주 있을 것도 아니라는 생각에 지금 이 기억이 오래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인지 매일매일을 담아둔 하늘 사진이나 유배일지가 점점 더 나에겐 가치 있어질 것 같다.
이 넓은 유배지 가운데서도 반짝이는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재밌게 살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내가 세운 계획은 하나도 없었지만 사람과 상황이 가져다 주는 운은 넘쳤던 탐라국 생활을 생각보다 짧게 마치게 되어서 좀... 아니 많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