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화병에 물을...
시들어가는 꽃...
얼마 전, 내 생일날 받아서 화병에 꽂아두었던 꽃들이 이제는 시들어 버렸다. 어느새 초록의 싱그러웠던 이파리들은 쪼글쪼글 말라비틀어졌고, 꽃들도 휘어진 가지에 초라한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이제 아름다운 꽃의 시간이 다 한 까닭이기에 볼품없이 변해가는 모습이 어느 정도 예견되기는 했어도 왠지 씁쓸한 생의 뒷모습을 보는 거 같아 쉽사리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새벽부터 비가 내리더니 종일토록 봄날을 적신다. 아마 산에 들에 핀 예쁜 봄꽃들도 저 찬비를 맞으며 오늘 하루를 견디겠지...
오늘 아내가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장기요양급여신청에 필요한 진단서를 받으러 간다고 했다. 어느새 80대 중반이 된 어머니는 나이에 걸맞게 여기저기 병들고 아프지 않은 구석이
없다. 팔, 다리도 더는 힘이 없어 물을 끌어올리지 못하는, 마른 가지처럼 야위였고, 얼굴과 피부의 주름살도 긴 세월 고생한 흔적을 보여주듯이 깊은 고랑을 이루고 있었다.
시들어가는 한 송이의 꽃이었으니... 그래도 머리의 흰 서리는 염색약으로 검게 감추고 있었다.
하루종일 하는 일없이 집에만 있으면 여러 가지 건강상 좋을 게 없다며 요양보호센터에 나가 사람들과 어울리고, 노래도 부르고, 이것저것 만들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면 좋지 않느냐며
자식들이 오래전부터 이야기했었지만 그저 괜찮다는 말만 하더니 결국 며느리의 설득에 넘어가 요양급여심사를 받기로 한 것이다.
어쩌면 저 모습이 멀지 않은 우리의 미래가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차례차례 시간의 정해진 길을 따라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니까... 그리고, 그
길 끝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게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아름답고 붉은 꽃도 열흘을 넘게 피어있지 못한다고, 제 아무리 잘난 인생도 결국 시들고 져야만 한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말이다.
지팡이에 의지해 집을 나서는 노모의 작고 나약해진 뒷모습을 보니, 등에 커다란 짐이 하나 매달려 있는 거 같았다. 아직도 이미 장성해서, 아니 초보 노인이 다 된 자식들에 대한
걱정과 노파심으로 가득 찬 저 짐의 무게는 얼마나 될는지... 언제가 되어야 저 짐을 벗어던질 수 있을는지...
시든 꽃이 꽂힌 화병에 물도 어느새 다 말라 있었다. 물을 다시 채워주어야 하나... 아니면, 그냥 뽑아서 쓰레기통에 버려야 하나... 갈등의 시간이 잠시 흘렀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뻗는데, 미세한 꽃향기가 향긋하게 풍겨 나왔다. "아직 나는 살아있어요... 버리지 마세요..." 마치 내게 말이라도 하듯이... 시들어버린 꽃송이를 가만히 만져보니
보기와 다르게 아직은 촉촉한 습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 보기는 좀 거시기해도, 아직 향기를 품고 있으니 끝이 난 게 아니야... 그 향기가 다 사라질 때까지 꽃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화병에
물을 채워주었다. 그리 오래가지는 못하겠지만, 결국 향기가 사라지는 날이 오면 향기 대신 그리움이 피어나겠지...
나도 먼 훗날, 누군가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형기 시인의 시처럼, 가야 할 때가 언제인지 분명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너무 많이
시들어 버리지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