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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 진 Mar 17. 2022


어느 봄날에 만난 K역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봄날...

                어느 봄날에 만난 K역 



  K역으로 가는 길은 봄날의 눈부신 햇살로 가득 찼다. 화창한 날씨보다는 조금은 더위를 느끼게 했다. 햇빛은 고스란히 얼굴에 쏟아졌다. 혹여 자외선 과다노출로 인해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그을릴까 걱정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버스가 시끄러운 엔진음을 내며 연신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아마 저 버스를 타면 k역으로 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리 멀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계속 길을 걸었다. 바람도 시원하게 불어왔다. 곁에서는 그림자가  내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며 따라 걷고 있어 마음이 편안했다.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가게에 들어가 물어보았다. 아저씨와 아줌마의 대답에는 시간 차이가 있었다. 똑같은 거리일진대 남자는 10분 정도, 여자는 한 30분 이상 걸릴 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정작 그들과 다른 내 발걸음으로는 과연 얼마나 걸릴 건가? 


  부지런히 앞만 보고 바삐 걸으면 남자의 시간에 도착할 것이고, 느긋하게 봄바람맞으며 구경거리 다 즐기며 걷는다면 아줌마의 시간으로도 모자라겠지. 어쩔 거나? 길을 걸으며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선택에 마음을 쓰는 꼴이라니... 


  마음이 급하면 시간은 더디 가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걷는다면 시간은 빨리 간다. 똑같은 시간을 두고도 느낌이 다른 것이다. 그러면 세상에 정답은 없다는 말이 또한 정답이 되겠거니...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역겹지 않고 향긋하게 코를 자극하니 냄새가 아니라 꽃향기였다. 싱그러운 향기가 비릿한 냄새로 느껴지는 건 아마도 화초의 몸속에 흐르는 생명수 때문일 게다. 촉촉한 물기로 인해 탱탱해진 꽃들이 저마다 얼굴에 예쁘고 향기로운 분칠을 하고 나를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다. 화훼단지가 길을 따라 길게 늘어섰다. 한마디로 봄날의 꽃 잔치집에 온 것이다. 


  뜻밖의 횡재에 걸음을 멈추었다. 꽃들은 하나같이 다 예쁘고 아름다웠다.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하는 향기도 좋았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꽃내음이 서로 뒤섞여 진동했다. 갖가지 꽃들이 저마다 다른 향기를 내뿜고 있으니 어느 게 어느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각자의 향기를 잃어버린 것이다. 


  꽃집에 있는 붉은 장미보다 자갈밭에 핀 한 송이 이름 모를 야생화가 우리의 눈길을 더 끄는 건 아마도 홀로 서기를 하고 있어서가 아닐는지. 


  네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K역이 나타났다. 길을 가르쳐주었던 남자와 여자의 시간 사이에서 도착한 것이니, 두 사람 모두 틀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맞은 것도 아니다. 


  역시나 소도시의 역은 작고 허름했다. 역사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서늘한 공기가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차가운 피를 가진 뱀 한 마리가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대합실 안에 사람이 많지 않아서일까? 횡뎅그렁한 기분이 들었다.  텔레비전은 대기용 의자에 앉아있는 몇몇 사람들을 위해  열심히 떠들고 있었다. 사람이 별로 없는 걸로 보아 열차가 도착할 시간이 그다지 가깝지 않은 듯싶었다. 매표원에게 표를 사고 밖으로 나왔다. 앞으로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했다. 


  역 광장이라고 할 것 까지야 없겠지만, 그래도 약간의 마당이 있었다. 대부분의 역전 풍경처럼 택시들이 손님을 기다리기 위해 한낮의 봄볕 아래 길게 늘어서 나른한 졸음에 빠져 있었다. 


  아주머니가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신물을 나누어주고 있었다. 어느 교회에서 발행한 신문이었다. 믿음이 강한 신도인지, 아니면 일당 받고 아르바이트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 공짜로 주는 데도 별로 받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거의 대부분이 광고성 쪽지나 명함이다. 


  길을 가다 보면 어느새 손에 쥐어진 그것들을 발견한다. 이미 내 손에 들어온 것이니 그냥 거리에 버리면 내가 쓰레기를 버리게 되는 꼴이니 그렇게도 못 하고, 정말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게 불필요한 것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쓰레기 같은 기분이 든다. 세상은 끊임없이 내게 쓰레기를 안겨다 주고 있었다. 


  한쪽에는 지붕으로 햇빛을 가린 팔각정이 있었다. 마루에 걸터앉아 대합실에서 사 온 레모네이드를 마셨다. 사방이 확 트여서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이렇게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수 있는 팔각정이 있는 역은 처음 보았다. 마루 한쪽에서는 노숙자인지, 낮술이라도 한잔 걸친 사람인지 아예 바닥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그런 모습이 오히려 역 광장의 한가함을 더해주는 것 같았다. 


  기차를 기다리는 시간은 따분하고 지겹기 마련인데, 한가한 봄날에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기차를 타고 가다 보면 역이라고 해서 다 정차를 하는 게 아니다. 그냥 순간적으로 지나치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간이역이 많았다. 게 중에는 기차가 서기는 하지만 내가 내리지 않으니 그냥 역사 구경만 언뜻 하다가 출발하는 역들도 있었다. 나의 출발지와 도착지 외에는 다 그런 역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기차에서 내려 시간을 두고 역사 구경조차도 할 시간이 없으니 이름만 기억하게 된 역들 중의 하나가 바로 K역이다. 


  이 역에서 내려 밖으로 나가면 어떤 모습이 펼쳐질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어떤 말씨를 쓸까? 그저 창 밖으로 멀리 내다보이는 경치만 살피다 그냥 떠나기 일쑤였다. 


  인생이라는 기차가 나를 두고 갈까 차마 내리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던 세상... 사는 동안 내가 곁을 잠깐 스치고 지나는 인연과도 같은 만남. K역이 그랬다. 나는 얼마나 많은 역들을 지나왔을까?  


  기차의 덜컹거리는 진동음이 내 엉덩이 밑에서 울려 나왔다. 그것은 차츰 내 몸뚱이를 타고 위로 올라와 귓전에서 크게 울려 퍼졌다. 기차가 지나는 소리였다. 기차는 키 작은 역사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빽빽 소리만 지르고 바람 따라 사라졌다. 내 몸은 다시 봄날 아지랑이처럼 하늘하늘 한가롭게 잦아들었다. 기찻길 옆에 있는 오막살이, 그 집에 사는 아기는 노래 가사처럼 잘도 자는지 몰라도, 자다가 깬 어른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았다. 진짜인지 정확한지는 몰라도 기찻길 옆에 있는 집에는 아이들이 많이 태어난다고, 그것도 아들이 많다고.


  먼 옛날, 하동으로 가는 기차는 완행열차였다. 산허리를 돌며 뻗어있는 철로, 그 끝없는 길 위를 구르는 바퀴는 1분에 몇 번을 회전하는지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느린 속도로 갔다면 허풍이 너무 센 것일까? 


  하여튼 그렇게 느린 완행열차를 타고 갔었다. 내가 대학 1학년생이었으니 약 40 년 전의 일이다. 그 기차는 역이라고 이름 붙인 곳에는 다 정차를 했다. 시골 벌판을 달리다가 서고, 산을 하나 돌면 또 섰다. 기차에 올라타는 사람들은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양손에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있었다. 어디 5일장에라도 가는 모양이었다. 광주리에는 푸성귀며 나물들이 담겨 있었고, 내가 도저히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도 들어있었다. 장날이면 으레 만나는 이웃처럼 먼저 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다. 그 말소리들 중에는 꼬꼬댁하는 닭소리와 낑낑거리는 강아지 울음소리도 섞여있었다. 아마도 장에 팔려가는 몸인가 보았다. 주인집 아이의 신발이나  가방을 사주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실은 것은 아닐까? 눈을 마주친 그놈들을 보며 괜스레 애처로운 상상에 빠져보았다. 그 완행열차는 생활을 이어주고 희망을 싣고 달렸다. 


  기차가 올 시간이 되었다.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다시 K역에 올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거의 그럴 일은 없을 성싶다. 잠시 머물렀던 역, 한번 팔각정을 돌아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 되어서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모두들 어디에 숨어있다가 나왔을까? 개찰구를 빠져나와 기차가 들어올 4번 홈으로 갔다.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림자는 안심하라는 듯이 곁에서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잠시 후, 안내방송이 나오고 이내 기차가 도착했다.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기차는 몸을 꿈틀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 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에는 언제나 내다보기만 했던 K역이 잘 가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렇게 한번 만이라도 내려보고 싶었던 K역이 봄날 아지랑이 속으로 아련하게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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