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성없는 선의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들
“얘들아, 이런 데는 많이 안 와봤지? 비싸고 좋은 곳으로 골랐다. 많이 먹어라.”
미혼모 시설에 있던 시절, 원장이 입소자들을 데리고 뷔페에 간 자리에서 했던 말이다.
이런 데? 그 말은 우리가 마치 여길 ‘처음 와본 사람들’인 것처럼 선을 긋는 기분을 남겼다. 별 뜻 없이 선의를 담았을지 모르지만, 듣는 쪽에서는 묘한 거리감이 스며들었다. 심지어 후원자들과 같은 공간에서 먹는 식사 자리였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만큼 어색했고, 그 말속에 스며든 시선의 결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임신하고 미혼모 시설에서 1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또렷하게 깨달은 단 한 가지 사실이 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사람은 손쉽게 '어딘가 불쌍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묶인다는 것. 그리고 그 프레임은 아주 자연스럽게, 아무 말 없이, 선의라는 이름 아래에서 작동한다.
돕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가 생긴다. 도움은 분명 고맙고 필요하다. 문제는 그 행위가 상대를 ‘작은 존재’로 상정할 때다. 그 순간부터 도움은 따뜻함을 잃고, 상대의 존엄을 비껴 간다.
도움을 주지 말라는 것도, 도움이 감사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다만 존중이 빠진 선의는 의도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더 약한 존재로 만든다. 당시 그 자리에서 내가 느낀 것은 배부름이 아니라, 조용하고 거북한 선명함이었다.
시설에서 생활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환경 자체보다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방식이었다. ‘도움을 받는 사람’이라는 틀은 너무 쉽게 타인을 규정했고, 그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해명과 설명을 요구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선의는 언제든 손쉽게 부담과 낙인이 될 수 있다.
10년도 더 된 기억이지만 그날의 공기는 늘 설명하기 어려운 어색함으로 가득했다. 사진의 주인공은 후원자였고, 시설 입소자였던 미혼모들은 그 사진을 완성하는 배경처럼 배치됐다. ‘도움받는 사람’이라는 틀 안에서 개인이 가진 기질, 노력, 고민 같은 입체성은 금세 지워졌다.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모두 위선자라는 뜻은 아니다. 가난하다고 모두 착한 것도 아니고, 도움을 준다고 모두 절대 선도 아니다. 누구나 복합적인 면을 가진 삼차원 공간의 입체적 인간이라는 사실이 납작하게 묻힐 때, 누군가의 선의가 상대를 단순화하고 존중을 생략하는 순간 문제가 생긴다.
선의를 베풀 때 가장 중요한 건 마음 그 자체가 아니라 방식이다. 상대의 삶을 하나로 묶지 않고, 도와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동등한 인간으로 마주할 수 있게 하는 것. 말 한마디의 뉘앙스로 누군가의 존엄을 스치지 않도록 하는 것. 그 기본적인 감각이 자리잡을 때, 비로소 선의는 온전히 전달될 수 있다. 도움을 주는 마음이 누군가의 존엄을 깎지 않는 사회. 우리는 그 단순하고 기본적인 것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