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이 오늘날 여전히 필요한 이유
당신은 자신만을 위한
방이 있습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오래전에 말했다. 여성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그 말이 지금까지도 인용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단순한 창작 조건이 아니라 존재 조건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문을 닫을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사람은 비로소 자기 생각을 갖는다. 자기만의 숨 쉴 공간. 작은 나의 방.
그 말이 혁명적이었던 이유는 당시 여성에게 방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금도 많은 어른들에게 방이 없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었지만 문을 닫을 수 없는 사람들. 방이 없거나, 있어도 언제든 열릴 수 있는 문 앞에서 사는 사람들. 혼자 있어도 혼자가 아닌 상태로 하루를 보낸다.
결혼하고도 자신들만의 방을 각자의 방을 가진 부부는 매우 드물 것이다. 아이에게 방을 내어 주고도 부모 각자만의 방이 있는 경우는 더더욱 보기 힘들 것이다. 한 인격체로서 아이의 방은 내어주면서 부모들은 대개 안방을 같이 쓰고 만다. 부모들에게 방이란 각자의 공간이 아니라 공유의 공간이다. 경제적인 이유로도 가족 구성원 각자를 위한 자신의 방이 있기란 여간 힘든게 아니니까.
문을 닫을 수 없다는 건 사생활의 문제가 아니다.
회복의 문제다. 사람은 닫혀야 회복된다.
아무에게도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아무 역할도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있어야 다시 열릴 수 있다. 그런데 그 닫힘이 허락되지 않으면, 사람은 계속 닳는다.
나는 오랫동안 동생들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가 마련해주신 방 2개짜리 전세집에서 나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까지 삼남매는 불편한 동거를 해야했다. 집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문은 늘 열려 있었다. 소리에 반응해야 했고, 기척에 신경 써야 했고, 혼자 있고 싶다는 말조차 설명이 필요했다.
그 상태에서는 쉬어도 쉰 게 아니었다. 몸은 누워 있어도 마음은 늘 열려 있었다. 그나마 아이를 본가에서 봐주시는 주말 엄마의 상황이어서 나만을 위한 시간은 가질 수 있었기에 조금은 나았달까.
늦고 뜨거웠던 8월 말, 나는 한부모 매입임대에 당첨되어 겨우 독립했다. ‘겨우’라는 말이 정확하다. 아이를 본가에서 데려올 수 있었고 아이방과 내 방이 온전히 생길 수 있었다. 타이밍이 좋았고 올 한 해의 운을 거기 다 끌어썼나 싶을 정도로 아이를 키운지 거의 10여년 넘는 기간만에 복지 제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방 하나와 문 하나를 갖게 된 뒤에야 알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열려 있는 상태로 버텨왔는지를.
비혼 싱글맘의 삶은 늘 열려 있다. 아이를 책임지지만, 자신을 보호할 문은 없다. 항상 누군가의 엄마이고, 누군가의 보호자이며, 동시에 아무도 보호해주지 않는 어른이다. 당면한 책임은 무겁지만 자신을 돌보기에는 버겁다. 닫히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루를 돌리고, 또 다음 날을 연다.
이 사회는 책임을 요구하면서도, 닫힐 권리는 주지 않는다. 아이는 보호해야 할 존재라고 말하면서, 그 아이를 돌보는 어른이 회복할 공간은 마련하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삶이 조용히 마모된다. 문제는 개인의 성실함이 아니라, 구조다.
버지니아 울프의 말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났는데도, 여전히 방 하나가 혁명처럼 느껴지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문을 닫을 수 없음은 개인의 나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구조적인 상태다.
분명한 건 문을 닫을 수 없는 삶은,
아무리 성실해도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