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공포를 보여주는 창
을지로 철공소 마을 2층에 작업실을 가지고 있던 적이 있습니다. 밤이면 고요해지는 동네인데 어느 날 뭔가 분주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려다보니 생명체가 골목에 있는 듯했습니다. 굵은 와이어에 의지해 있는 작품은 그곳에 잠시 찾아온 생명체처럼 보였습니다. 잠시 뒤 궁금하여 다시 내어다 보았을 땐 이민 사라진 후였습니다. 마치 고치가 허물을 벗고 어디론가 날아간 듯.
얼마가 지나 골목에서 보았던 형상과 닮은 작품을 발견했습니다. 둘은 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 하염없이 테이프를 감으며 작품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작업을 보며 도대체 저 많은 테이프는 얼마일까 싶은 생각에 질문을 했습니다. 환한 미소를 띠며 돌아왔던 답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후원받은 재료예요. 모두 회사에서 직접 받은 거예요. 작업을 하는 동안 계속 후원해 주시기로 했어요."
만들고, 가열하고, 태우고, 긁어내고, 문지르며 치열한 실험 끝에 만들어진 작품은 어떤 생명체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일상에선 볼 수 없지만 다른 세상을 상상하게 만드는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질감과 크기, 움직임에 애틋하기도 공포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들이 본래 있었을 그곳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떤 작품은 작가를 통해 이 세상에 오는 법을 드디어 알게 된 존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현실의 창 너머 아름다운 공포를 실어오는 '장시재'를 소개합니다.
목차
장시재 이야기
작업 이야기
공간 이야기
내일 이야기
장시재 이야기
서울에서 작업하고 있는 장시재라고 합니다. 입체작업을 주로 하고 있어요. 만들어진 입체를 촬영하거나 다른 매체로 전환한 작품을 만드는 것에도 흥미를 가지고 있어요. 공간에 위치한 입체를 만드는 작업이 제가 표현하기 가장 재미를 느끼고, 원하는 방향이 잘 표현되는 것 같아 계속하고 있어요.
어떤 시간을 보내오셨을지 궁금해요.
저는 인테리어와 건축을 전공했고 학교 졸업하고 회사도 2년 정도 다녔어요. 인테리어 회사를 다니면서 설계도 하고 3D 작업하고, 현장 일도 많이 다니고 했었어요.
인테리어를 업으로 삼다가 미술을 해야겠다고 생각이 전환되는 시점이 있었을까요?
저는 공간 작업을 하고 싶었나 봐요. 처음엔 자연스럽게 전공 공부를 하면서 시작한 일인데 이게 제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느꼈어요. 어느 지점에서 내 손으로 만든 소품 하나라도 배치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하고 회사를 들어갔던 것인데 그럴 시간조차 없었죠.
현장일을 바쁘게 하던 중에도 인스타그램에 제가 만들고 싶은 작품, 텍스처, 형태를 그래픽작업으로라도 해서 계속 업로드했었어요. 그렇게 디지털 작업이 쌓이다 보니 어떤 기획자 분께서 전시를 하자고 연락을 주신 거예요. 그렇게 단체전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전시를 하면서 알았어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이건가 보다.
회사를 다니면서 점점 작업하는 시간을 늘려나갔어요. 그러다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그만두고 지금 까지 작업을 하고 있어요. 회사를 그만둘 때 솔직히 말씀드렸어요.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예술인가 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술을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씀드렸더니 “아.. 네가 회사 와서 조는 이유가 있었구나.” 하시면서 응원해 주 시 더라고요. 저는 제가 많이 졸았는지 몰랐어요. 아마 저만 몰랐나 봐요.
저는 세상을 좀 그렇게 보는 것 같아요. 모든 일은 정해져 있다. 내가 해도 안될 일은 안되고, 해서 될 일이면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전시도, 예술 작업도 해나가면서 너무 마음 졸이는 것보다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으로 임하고 있어요.
작가님께서 스스로 하는 일,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계신 것 같아 보여요. 정의 내리거나 명확해질 때 더 섬세해지기 위해 고민을 쌓아가시는 것 같아요.
더 찾고 싶어 하고, 더 들어가고 싶어 하고. 이게 다가 아닌데 더 뭐가 있지. 무엇이 맞을까. 고민스럽고 고통스러운 부분들이 있어요. 평생 이렇게 사려나 봐요. 어떻게, 그냥 살아야죠.
작업 이야기
우선 저는 재료 실험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새로 개발된 재료에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에요. 제 눈에 걸리는 재료들이 있어요. 그것들로 실험을 하고, 실험을 통해 발견된 형태에 따라 작품이 나오기도 해요. 혹은 돌아다니다가 제가 좋아하는 질감이 있으면 사진을 찍곤 해요. 이걸 내 손으로 표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 재료나 제작 기법에 대한 연구를 하곤 해요.
‘입체’와 ‘사진’ 두 매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질감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혹 작가님께 ‘촉감’이라는 감각이 중요한 것일까요?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촉감’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시각으로 느껴지는 촉감에 더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재료 실험을 하다 보면 마음에 드는 질감이 생겨나는 순간이 있어요. 하다 보면 제가 좋아하는 질감이 일치되는 순간이에요. 그 순간을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공통점이 있어요.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주는 질감이라는 점이에요. 재미있는 지점은 저는 그저 ‘좋은 질감’ 일뿐인데 타인이 보았을 때 ‘그로테스크함’을 느낀다는 점이에요.
제가 의도할 수 없는 불규칙한 질감을 만들고 있어요. 재료를 의인화하게 되어요. 작업을 하다 보면 재료 스스로가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을 느껴요. 예측할 수 없었지만 실험을 하다 예상을 하게 되고, 좋았던 그 질감을 표현할 수 있는 환경과 움직임으로 재료를 유도하는 과정이에요. 그 과정이 제가 100% 의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 좋아요. 여러 요소가 만나 만드는 우연성을 좋아해요.
작가님께서 함께 작업하는 재료들은 화학을 통해 인간이 만든 것이에요. 물론 자연에서 온 것들도 있지만. 흙, 나무, 돌 등 자연에서 온 재료들을 다루는 작가나 장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과 함께 만드는 겸손함이 묻어 있어요. 어떤 맥락에서 작가님의 작업은 재료의 태생에서 멀어 보이기도 하지만 물성과 함께 작업을 해나간다는 면에서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돼요. 어떤 면에선 예술의 탄생 이전부터 이어진 전통적인 조각가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게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지점에서 흥미를 느끼는지. 내가 왜 건물 사이나 야외에 설치하고 싶은지. 왜 그곳에 작품이 존재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지. 그런 질문을 계속 던졌어요. 아직 모든 게 정리가 되거나 완벽하진 않은 상태예요.
제가 만든 생명이 알 수 없는 어딘가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멀티 유니버스처럼요. 지금 우리가 똑같이 보고 있지만 다른 차원의 지구에 살아 있는 생명체를 만들려고 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했어요.
불현듯 떠오르는 형태가 있어요. 그 형태가 어디서 어떻게 왔다고는 설명이 되진 않지만 그것을 포착하고 만들려고 하는 것은 분명해요. 그래서 형태도 그렇고 텍스쳐도 그렇고 좀 더 생명력 있어 보이게 만들고 싶음을 느껴요. 그런 욕구가 있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봐줬으면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으면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결국엔 ‘숭고함’인데 그것을 느끼게 하는 어느 과정에 서있는 것 같아요. 지난 '오픈스튜디오(2024)’를 진행하면서 어떤 사람들은 무섭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슬프다고 이야기를 해줬어요. 여러 피드백 중에 ‘무섭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성공적’이 단어가 떠오르더라고요.
관객들이 작품을 볼 때 천천히 압박되는 느낌을 받았으면 했어요. 지금까지 모든 작품이 그랬던 것 같아요. 압박이 공포를 느끼게 하는 요소가 되어주길 바래요. 공포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 작품의 텍스쳐가 보는 이들로 하여금 호감을 주기 어려운 요소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내장이 나와 있거나, 뭔가가 부식되는 모습이 징그럽거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이미지들과 닮은 부분이 있어요. 어떤 부분을 살짝 바꿔준다면 그 모습이 아름다움으로 전환되는 지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제 작품을 구성해 온 여러 감각들이 결국 공포와 닿아 있는 것 같아요. 아이러니하게도 공포감을 느끼게 하는 이미지들이 제 눈엔 아름다워 보여요. 사람들의 공포가 제겐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요소예요. 전혀 다른 것이지만 두 가지가 함께 있는 모습을 어떤 생명의 형상에 담아 만들어 가고 있어요.
생명력이 없다고 여겨지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화학 재료가 작가님의 눈을 만나면서 어떤 작용이 일어나게 돼요. 작가님의 손이 닿고 열이 가해지거는 물리적인 변화 속에서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생명의 모습을 현시점, 현 장소로 끌어오는 과정이 작업의 결과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관찰과 현신의 과정이 어떤 목적을 가진 행위인지,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 왜 근원적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찾으며 그 과정을 때론 지치지만 집요하게 하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요.
사람들이 작품을 보았을 때 ‘공포’를 느낀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목숨에 위협을 느끼거나 타인이 그런 상황에 처해 있는 모습을 볼 때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혹은 치명적인 상해를 받게 될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에도요. 작가님 작품이 주는 ‘공포’의 맥락은 죽음 이후에 있을 서사의 일부를 현실로 당겨옴으로써 느끼게 하는 지점이 있어 보여요. 은근한 압박, 숭고. 이것을 어쩌면 이 세상을 다른 세상을 연결했던 역할을 해온 예술의 영역과도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고요.
제가 엄청 큰 설치물을 한번 만든 적이 있어요. 제 프로필 이미지로 쓰고 있는 빨간 박스가 그 작품을 압축해서 보관 중인 작업이에요.
2018년 엄청 더운 날이었어요. 빨간색 테이프로 살을 붙여가며 작업을 했는데 얘(작품)들끼리 붙어버린 거예요. 너무 화가 나서 얘네들을 막 집어던지고 했었어요. 한참 화를 내고 담배를 피우고 내려와서 다시 보니 너무 안쓰러워 보였어요.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너희도 덥고 힘들겠지만 설치 때까지 서로 잘해보자고 사과도 하고 다독여도 보면서 작업을 하게 되었어요. 신기하게도 이후로는 늘러 붙지 않고 작업이 너무 잘 되는 거예요. 7m 정도에 설치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어요.
이 작업을 하면서 얘한테 잡아 먹힌 듯한 느낌, 압도되는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처음으로 ‘나는 이런 작업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설계는 제가 했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어요.
작업을 하다 보면 내가 어떤 마음으로 하는지, 어떻게 작업을 대하고 있는지를 속일 수 없는 것 같아요.
맞아요. 그 마음 가짐이 있다고 봐요. 내 마음 가짐이 저 기계도 똑같다고 보거든요. “마음을 잘 먹어야 얘도 잘 듣지.” 맨날 장난으로 얘기하지만 결국 그것이 제 태도가 되니까요. 얘의 길을 좀 따라가 보려고 해요.
신전의 사도 같은 느낌이 들어요. 탱화를 그리거나 불상을 만드는 불모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작가님의 이야기에 많은 공감을 하실 부분이 있어 보여요.
도고마성(道高魔盛)이라는 말처럼 자신의 경지가 높아지는 만큼 자신이 마주하는 상황이 달라지고 극복해야 하는 정도가 높아지는 것처럼 작가님의 한걸음에 따라 마주하는 작업의 모습이 계속 달라져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품 뒤에 있을 우주의 모습을 보는 창이 그대로지만 그 창을 통해 오가는 것들이 계속 변하지 않을까 싶어요.
지금 하라고 하면 저는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는 왜 했나 싶지만, 뭔가 갑작스럽게 서울 도심에 나타나는 설치를 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1년 프로젝트로요. 그래피티 작가들이 도시의 여러 공간을 오가며 작업을 하듯 입체 작품을 곳곳에 설치했다 빠졌다를 해보고 싶어 했었어요.
지금 도시에 거대한 작품을 설치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끌려요. 너무 해보고 싶어요. 제가 보여주고 싶은 공포와도 좀 닿아 있어요. 제가 보고 싶어서 하는 것도 있지만, 이게 예술인지 모르겠지만, 있지 말아야 할 곳에 뭔가 나타났을 때 주는 공포의 한 부분을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어요. 일상을 비틀어 보는. 아마 예전에도 이런 마음으로 했었던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 PTSD를 꺼내게 할 수 있고 나쁜 감정이 올라오게 할 수 있지만, 그런 것을 또한 꺼낼 수 있게 하고 싶어요. 내 안에 있는 것을 마주 보게 하는 기회를 예상치 못한 일상에서도 제공하고 싶어요.
제 이야기를 했다고 느낀 것은 최근에 진행한 ‘오픈스튜디오(2024)’였어요.
오픈스튜디오 당시 작가님께서 그곳에 쌓았을 치열함과 애틋함이 느껴졌었어요.
그게 너무 좋았어요. 그 공간 자체가 저였어요. 그곳에서 자기도 하고 밥도 먹고 사람들이랑 대화도 하며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 공간이 제가 되었어요. 그 시간을 압축해서 보여줄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어요.
‘오픈스튜디오’를 보는 당시 고군분투하는 작품 앞에 서있었어요. 제 발아래로 나비가 살짝 앉았다 공간 안을 날아다녔어요. 그 순간이 누가 의도할 수 있는 순간은 아니었을 거라 더더욱 강렬하게 느껴졌어요. 작가님께서 이제 치열함을 뒤로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시는 때가 되었음을 비유적으로 느끼는 대목이었어요.
너무 깔끔한 끝이었어요.
그런 마무리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게 참, 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간 이야기
상봉에서 옥상, 집 그리고 구석구석에 숨겨 놓으면 작업을 했었어요. 제가 아는 동생에게 계속 서울에 작업실을 가지고 싶다는 얘길 했었어요. 그 동생이 이승현 작가님을 소개해줬어요. 다행히 작가님께서도 좋게 봐주셔서 그분의 작업실을 함께 쓰게 되면서 시작되었어요.
당시 중구청이 지원해 주는 공간이었어요. 산림동 내 1층 작은 공간을 사용하다 인근 3, 4층 좀 더 넓은 곳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어요. 1층 공간은 딱 5평 정도였으니 많이 작았었죠. 하지만 감사한 공간이었어요. 당시 공간을 함께 내어준 이승현 작가님이 은인이라고 생각해요.
을지로에서 작업을 하는 것도 다 정해져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왜 그러냐면 제가 해온 작업들이 다 을지로를 어느 정도 닮아 있어요. 작업을 한참 할 때도 사람들이 그렇기 이야기해 줬어요. 당시엔 잘 안 보였는데 이사할 때가 되니 그때쯤 알게 되었어요. 어떤 부분들이 닮았었는지.
만약 작가님께서 신도시에서 작업을 시작하셨다면 어떠셨을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아요. 지금 모습이 자연스러워 보이고, 그 형태가 나올 수 있도록 을지로가 좋은 환경을 제공해 줬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물도 길도 많이 낡은 곳이잖아요. 환경적인 요인으로 어려움은 없으셨을까요?
열악하다는 생각은 많이 못해본 것 같아요. 서울 한 복판에 있다는 것도 너무 좋았어요. 비가 세면 조금 심각하긴 했어요. 그런데 그건 뭐 어쩔 수 없죠. 물 빼고 다시 작업하면 되니깐. 공장이 돌아가는 시스템이나 재료를 구하기 너무 좋은 환경이 구축되어 있어서 을지로에 계속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재 작업실 역시 다른 작가님들과 함께 사용 중이신 것으로 알고 있어요. 어떻게 인연이 되셨는지 궁금해요.
미디어 작업을 하시는 분과 퍼포먼스를 하시는 작가님 두 분이에요.
저흰 전시를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제가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라 전시가 아니면 작가님들을 뵐 기회가 많이 없어요. 그래서 단체전을 좀 많이 했으면 좋겠어요. 그 과정에서 영감도 받고 사람들도 알게 되어요. 이렇게 같이 작업실을 사용할 인연도 생겼고요.
‘전시’ 과정 자체가 작가님께 들숨과 날숨 같아요. 만든 것을 선보이기도 하고 새로운 요소들을 내 안으로 받아들일 기회도 열어주는. 또, 공동의 목표를 가진 안정감 안에서 만날 수 있는 장이라는 점에서 더 편안한 숨 같아요.
지금 함께 하는 두 분은 제가 작업실을 새로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계속 작업을 하시는 사람들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공간이 넓지는 않으니 입체 작업을 하지 않는 분이었으면 했어요. 그러다 두 분도 작업실을 옮겨야 할 시기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꼬셨죠. 저랑 같이 씁시다.
내일 이야기
12월 7일부터 12월 15일까지 《Xenogenesis》라는 이름의 개인전이 계획되어 있어요. 삼선동에 위치한 ‘팩션’이라는 곳에서 열릴 예정이에요. 앞서 말씀드린 맥락 위에 있는 전시가 될 예정이에요.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을 산업 재료들이 모여 만들어낸 작업들을 선보이려 해요.
개인전 소개
장시재 개인전 《Xenogenesis》
2024. 12. 07. ~ 2024. 12. 15. (월, 화 휴관)
13:00 - 18:00
팩션 (서울특별시 삼선동 5가 4 지층)
기획: 윤태균
포스터 디자인: 곽세현
포스터 3D 그래픽: 장시재
사진: 송광찬
주최: 팩션
후원: 서울문화재단
장시재의 조각 신체는 평행한 허구와의 웜 홀(worm hole)-백도어이다. 기능적인 산업적 재료가 서로 접합하여 서로를 수태하고 이식한 그 신체. 혹은 무기적 산업 재료 간 교배로 이종발생(Xenogenesis)한 유기적 신체. 장시재가 이격 한 환상과 환상 사이는 서로 다른 언어적 현실의 틈을 건널 수 있게끔 한다. 언어와 언어 사이의 텅 빈 그 공허를 말이다. 앞서 말했듯, 이 공허는 죽음으로서 심연이다. 우리는 이 기괴하게 접합한 조각 신체에서 실재로 향한다. 이 감상은 언어의 공백에서 오는 공포 혹은 외상이다: 우주와 우주를 가로지르는-분자와 분자를 가로지르는-입자와 입자의 강력을 가로지르는: 합성-수지, 합성-우주, 합성-신체. 이것이 장시재의 조각 신체를 특징짓는 구조이다. 공간 내에서 상하좌우로 작용하는 불안정한 중력과 의미의 안정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신경증(neurosis)적 통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정교한 허구는 우리의 탈출을 허하지 않는다. (그것이 탈출을 허하는 경우는, 죽음의 순간뿐이다.) 그러나 장시재의 조각 신체는 또 다른 허구와의 경계 너머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우리의 우주 경계를 결코 넘을 수 없지만, 적어도 수많은 평행 우주가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알 수 있다. 예술의 혁명적 가능성은 이 백도어의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Sijae Jang's sculptural body serves as a wormhole—a backdoor—into parallel fictions. This body, created by the conjoining and transplantation of functional industrial materials, is either a hybrid organism conceived through the fusion of such materials or an organic body arising from xenogenesis between inorganic industrial components. The spaces between the fantasies Jang deconstructs enable us to traverse the gaps between distinct linguistic realities. These spaces embody the void between languages—the emptiness that, as previously mentioned, is an abyss of death. From this grotesquely conjoined sculptural body, we are drawn toward the real. This experience evokes a fear or trauma arising from the voids in language: traversing universes, molecules, and the strong forces between particles—synthetic resin, synthetic cosmos, synthetic bodies. These elements constitute the structural hallmark of Sijae Jang's sculptural body. Within spatial dimensions, this structure operates under unstable gravitational forces, producing a neurotic syntax that renders the stabilization of meaning impossible. The intricate fiction of our present reality offers no avenue for escape. (The only moment of escape permitted is through death.) Yet, Sijae Jang's sculptural body offers a glimpse beyond the boundaries of another fiction. While we may never transcend the limits of our universe, we can at least recognize the existence of countless parallel universes. The revolutionary potential of art lies in the functionality of this backdoor.
기회가 된다면 유학을 가고 싶어요. 미국이나 영국에서 석사를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요. 해외에서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저는 한국에서 살 거 거든요. 다른 나라에서 삶은 사는 것은 어려울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서울 같은 도시에서 살 건데 외국을 다녀올 계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학교를 가게 되면 비자도 나오고, 작업 공간도 있고, 인프라가 있을 거라 안정적으로 외국에서 공부하고 작업할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혹 유학을 가지 못하더라도 뭔가를 계속 만들고 있지 않을까요? 지금과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 같아요.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며 계속 실험해 보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아름다운 공포를 보여주는 창
이렇게 뵙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후 작가님께서 만들어갈 이야기를 더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항상 치열하게 실험하고 만들어 온 모습을 보았습니다. 때론 재료를 후원받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며 지혜로운 전략을 구사하기도 하셨죠. 그러면서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거나 취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하는데 작가님께서는 어떤 답을 찾아가야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고민하며 밖으로 쏟아내는 에너지만큼 안을 다지기 위해 애써오신 것 같습니다. 이제 그 시간이 쌓여 답을 찾아가는 실마리의 두께를 굵게 만들고 있는 전환점으로 다음 발걸음이 옮겨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시점에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개인적으로는 기쁘네요.
전환점 위에서 작가님이 보는 세상, 아주 작은 것을 크게 보고, 어딘가 멀리 있을 것을 당겨 보고, 같은 공간에 존재하지만 알 수 없었던 것들을 감각하게 해주는 창이 더 견고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단단한 걸음으로 숭고함, 애틋함, 공포감을 느껴 내 안에 것들도 같이 볼 수 있게 하는 작가님의 내일을 기대합니다. 긴 시간 이야기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장시재의 작업실
장시재의 작업실 이동
・instagram : @jangsijae_
・website : www.jangsijae.com
도시 속 작은 도시의 예술이야기를 전하는〈작은도시이야기〉 뉴스레터 ►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