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집에서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유형주 개인전
전시명 : 내가 만든 집에서 모두 함께 노래를 합시다.
작가명 : 유형주
일 시 : 2025.03.05(수)-03.23(일)
주 소 : 서울시 중구 창경궁로5길 32, 3층 COSO
운영시간 : 매주 월, 화, 공휴일 휴무, 13:00-19:00
주최 주관 : COSO
협력 : 작은도시이야기
글 고대웅
좁은 골목길을 따라 ‘집’에 들어선다. ‘집’이라는 곳은 삶의 은밀한 이야기가 쌓이는 장소이기에 초대를 하는 이에게는 부담을, 초대받은 이에게는 설렘을 준다. 만약 서로에게 애정이 있다면 그 부담과 설렘의 부피는 심장박동 수에 따라 불어날 것이다. 작가 유형주는 어떤 ‘집’을 만들었을까. 초대된 이들에게 어떤 순간을 선물하고 싶었길래 이토록 긴장되고 번거로운 일을 하게 되었을까.
나와 타인의 삶 경계가 되어주는 ‘집’은 어느 때는 쉼을 보장하는 휴식처가 되기도, 긴장을 유발하는 수용소가 되기도 한다. ‘주인’이 어떤 이야기를 쌓아가느냐에 따라 때마다 다른 형상을 띠는 유기적인 곳이다. 하얀 벽 안에 유형주가 만든 집에는 고요한 거울이 벽을 메운다. 사각형 거울엔 작가가 언젠가 마주했을 시간이 담겨 있다. 틀 안에 얼굴이 가득하다. 큰 눈망울, 부재한 입. 고요하고 한적한 공간이지만 들리지 않는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와 벽과 바닥, 천장을 타고 흐른다. 겹겹이 쌓인 눈망울이 흔들리며 저마다 입으로 다 하지 못할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가득한 공간 안에 서 있자니 천천히 질문들이 떠오른다. 흐르는 속삭임을 듣고 ‘나’에 대한 질문들이 수면 위로 천천히 무겁게 떠오른다.
나는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가.
나의 삶은 아름답게 끝날 수 있을까.
나의 시간은 계속될까.
나는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가.
나는 존재하는 것일까.
나의 존재의 시작과 끝을 나는 인지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제 어떻게 끝날까. 매스미디어를 통해 아름다운 죽음을 목격하곤 한다. 인생의 숙제를 마치고 마주하는 끝. 과연 내가 원하는 죽음을 마주하는 이들은 얼마나 있을까. 나는 그 소수가 될 수 있을까. 과분한 바람을 가지며 무기력한 죽음이 떠밀려 온다.
나의 시간은 계속되는가. 차를 몰다 가끔 아찔한 순간을 마주한다. 과연 그 순간은 그렇게 지나간 것일까. 아니면 나는 사고 맞이 했고, 이후 끊임없이 다른 현실 속에 있는 것일까. 알 방도가 없다. 위험과 상실, 아름다움과 경희로운 시간을 관통할 뿐이다.
나는 존재하는가. 수많은 종교인들이, 수행자들이, 철학가들이, 예술가들이 물었다. 우리는 어떻게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 그저 마주하고 들여다본다. 나의 존재, 나의 감정, 나의 기억, 나를 구성하고 나와 연결된 모든 것들이 주고받은 상호작용을 인지하려 노력한다. 깊이깊이 지겹도록 마주 한다. 그렇게 큰 눈으로 가득해진다.
작가 유형주는 미숙한 두 모습 사이에서 끊임없이 망설인다. 아르헨티나 국적을 가졌으며, 대한민국의 의무를 다한 국민이다. 한 없이 발랄하게 주변 사람에게 웃음을 주지만, 계속 사랑받을 수 있을지를 깊숙하게 두려워한다. 어떤 모습이 ‘나’일까. 두렵고 망설인다. 사람을 대면하며 나오지 못하는 모습. 사람과 소통하며 하지 못하는 말. 공유의 통로 위에 올려놓지 못한 감정, 기억을 그려나간다.
세상은 때론 나를 한 없이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 같다.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십자가 처형의 근거가 되는 형상을 위한 세 가지 습작(Three Studies for Figures at base of Crucifixion)」처럼 괴성을 지를 수 있었을 것이다. 모두에게 내 마음에 쌓인 것이 있다는 사실을 소리치며 알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형주는 침묵을 선택했다. 내면의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조용히 있으라는 외부의 힘 때문이었을까. 어느 쪽이었던, 어쩌면 둘 다였을지 모르겠지만. 고요한 감정이 그림이 되며 아이러니한 전환이 벌어진다. 무기력은 새로운 힘이 되고, 침묵은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개체가 된다. 낙상으로 무너졌던 다리는 다시 일어날 힘을 가진다. 강한 작용이 강한 반작용을 만든다.
자화상 속에 담긴 자신은 시각을 통해 관찰된 얼굴이 아닌 관념 속에서 발견한 형상이다. 다시 말해 내가 인지한 ‘나의 존재’이다. 나와 함께 하고 있는 나에 대한 기록이며, 나와 연결된 동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는 나에 대한 질문을 기록하며 고통의 괴성과 환희의 함성을 집어삼킬 힘을 지켜왔을지 모르겠다. 침묵하지만, 지켜보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말을 쏟아내는 법을 더듬더듬 찾아왔는지 모른다. 그렇게 한바탕 하얀 방에 고요한 집들이가 열린다.
고요한 외침이 가득한 집에 들어선다. 얼굴을 본다. 눈을 마주한다. 한숨 고르고 나를 마주한다. 이제 그가 초대해 준 집에서 나의 노래도 고요 속에 불러본다.
작업실을 이사하던 날, 천장에 등을 달기 위해 작업대에 올라섰다.
그때, 발밑이 흔들리며 나는 허공에 떠오른 듯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지만,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살을 파고들었고, 피가 흘렀다.
침착하려 했지만, 피를 많이 흘려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구급대원들은 수술이 가능한 병원을 찾아봤지만, 의료파업으로 인해 찾기 힘들었다.
그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고, 결국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여러 곳에 연락을 돌리다가 수술이 가능하다는 병원을 찾게 되었고, 수술에 들어갔다.
2시간 정도의 수술을 마친 후 병실로 돌아오니, 가족과 친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술실에서 느꼈던 추위가 그들의 따뜻한 시선으로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살아 있음을 실감했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이후, 나는 무너졌다. 몸도, 마음도.
손끝에 스며들던 감각들이 점차 멀어졌고, 세상은 점점 희미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질문이 나를 깊은 어둠 속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도 나를 일으켜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따뜻한 격려가 나를 감싸며, 조용한 위로가 되었다.
내가 그려온 인물들은 언제나 불완전했다.
그들은 삶의 불확실함 속에서 방황하고, 때로는 쓰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만의 빛을 품고 있었다.
나도 무너졌지만, 이 사고를 통해 이전의 나를 떠나보내고, 다시 태어났다.
이제 나는 이전보다 더 단단한 마음과 더 넓어진 시선으로
어둠 속에서도 몸과 마음을 일으켜 나아간다.
불확실함 속에서도 찬란한 빛을 찾아서.
· interview :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그리는 화가 유형주, 작은 도시의 들꽃
· review : 유형주님의 창작물을 소개합니다, 당작소
· present : 20190812_유형주, 함미나, 월요살롱
· press : 찾아가는 미술관, 이동형 팝업 전시 '영등포 ART TRUCK' 전시 개최, 뉴스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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