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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급 호텔에 3일간 살아보기

아이와 5성급 호텔에 간 이유

by 레이첼쌤



작년 이맘때쯤 아이와 단 둘이 제주여행 2주 다녀왔다.

처음에는 호기롭게 한달살이라는 프로젝트로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제약으로 인해 한달살이라고 부르기 무색할 정도로 2주로 줄여서 여행을 끝냈다.

아빠 없이 아이와 단 둘이서만 하는 여행은 각오했던 것만큼 쉽지 않았다.

무거운 짐을 들어줄 사람, 내가 샤워하거나 음식 준비 할 동안 아이와 함께 해줄 사람, 운전해 줄 사람 없이 오로지 혼자 아이를 케어하며 다니는 여행은 정말 영혼 깊이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일 년이 지났고 어김없이 아이와 보내야 할 두 달간의 겨울방학이 주어졌는데, 어딘가 또 떠나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어차피 아빠는 주말밖에 시간이 되지 않기에 평일의 여유로움을 즐길 수 있는 휴가를 함께 간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럴 땐 부부교사하는 친구들을 많이 부러워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많이 내 숙명으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대신 어떻게든 아이와 단 둘이서 좀 덜 고생하면서 다닐만한 여행지가 어디일까 고민해 보는 편이다.


겨울은 날씨도 춥고 혹독해서 다들 코로나가 풀리면서 해외여행을 많이 가는 추세인데, 나는 아직은 아이를 데리고 해외까지 나간다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제주도는 작년에 가봤고, 내가 운전할 필요 없이 국내에서 가볼 만한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던 와중에 우연히 숙박앱에서 신라호텔이 평일 특가로 뜬 걸 발견했다.


평소라면 일박에 최소 50만 원은 족히 넘을 숙박비의 절반 가격으로 떠있는 걸 보고 나는 흥분해서 2박을 질러버렸다. 특히 아이를 낳고 나서 국내 호텔을 갈 기회가 많았는데 여태까지 서울 신라호텔은 못 가본 터라 늘 노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드디어 갈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것도 1박이 아닌 2박씩이나.


해외여행을 못 가는 우리의 처지를 위로하는 방편으로 가족여행은 좋은 호텔을 숙소로 잡아서 다니긴 했지만, 제주도를 제외하고 2박을 지내본 적은 없다. 1박이란 늘 짐 풀고 조식 먹고 나면 짐을 싸야 하는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이었다.


아이와 단둘이 제주도 한달살이를 하면서 느낀 건 숙소 선택을 정말 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무엇보다 단 둘이 있기에 "안전"이 중요하다. 작년에 나는 그런 측면을 간과하고 단독 타운하우스라는 명칭에 홀려서 덜컥 예약을 했는데 너무 외진 곳이었고 밤이 되면 어두워서 안전에 위협을 느꼈다. 말이 좋아 타운하우 스지 단독 주택이라서 누가 마음먹고 나쁜 짓 하자 싶으면 현관문만 따서 들어오기 쉬운 구조였기 때문이다.

사실 당초 계획보다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것도 내가 밤마다 너무 무서움을 느껴서이다. 제주도의 쌩쌩 부는 바람소리와 어두움이 깔린 밤을 외면하려고 집에서는 잘 틀어주지도 않는 TV를 밤늦게까지 틀어놨다.


다음부터는 꼭 큰 규모의 숙박시설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특히나 아이와 단 둘이 갈 경우에는 리조트나 호텔같이 여러 사람이 한 건물에 숙박하고 있어서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나와 아이 이외에 순수하게 여행목적으로 온 관광객들과 친절한 호텔 직원들을 늘 마주할 수 있는 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나의 선택은 아주 탁월했다.

무거운 여행가방을 책임질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라서 최대한 쓸데없는 짐을 줄이고 단벌신사로 지내기로 했고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체크인하고 짐을 맡긴 다음 일정을 짜서 돌아다니기로 했다.


신라호텔은 체크인 시간이 2시라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가 가본 다른 여타의 호텔은 보통 3시였는데 그 시간에 체크인하고 나면 금방 저녁 시간이 되는 기분이다. 그러나 한 시간 일찍 2시에 체크인을 하니 금방 어두워지는 겨울임에도 아이랑 어디 한 군데는 구경하고 올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입구에 도착한 순간부터 나는 직원들의 서비스를 받기 시작했다. 로비 밖에 서있던 직원이 차문을 열어주었고 갑작스러운 대접에 얼떨떨하게 서있던 나에게 체크인하시냐고 친절하게 물어보았다. 맞다고 했더니 짐을 들어주면서 일사불란하게 체크인을 도와줄 직원에게 연결해 주었다. 이곳의 시그니처인, 사진에서만 보던 호텔 로비 천장의 화려한 조명을 구경할 틈도 없이 직원들은 내 짐을 맡아주고 동선을 안내해 주었다.





문득 작년에 제주 숙소를 처음 들어가던 때가 기억났다. 하필 눈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치던 날이었는데 제주 공항에서 픽업한 차에 짐을 잔뜩 싣고 찾아간 그 숙소는 비대면 체크인이었다. 숙소 직원은 문자로 현관문 여는 법과 나중에 정산할 수도 및 가스계량기 켜는 법을 알려주었는데 다 외부에 있어서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면서 해결하느라 힘들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반겨주는 이 아무도 없는 이곳에 여행 와서 사서 고생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때와는 정반대 되는 호텔 직원들의 일사불란한 서비스로 "이곳에 온 걸 환영해요. 진심으로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사실 이곳은 천국이거든요."라고 나에게 온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서비스직이니 당연하겠지만 다들 어여쁘고 훤칠한 외모를 갖추었는데 외모보다 더 눈에 띈 건 헤어스타일과 몸가짐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훌륭한 외양을 갖춘 사람들이 시종일관 미소 짓는 얼굴로 나에게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식사는 어떠신지요?"라며 내 의중을 살펴주는 거다.



아이의 비위를 맞추며 하는 여행이라 늘 즐거울 수는 없고 긴장하고 에너지가 바닥나는 순간들도 많은데 그럴 때마다 청량수처럼 나를 찾아와 위로해 주었고 나는 정말로 위로받았다.






날씨도 한파로 추웠고 근처에 가까운 곳에 아이와 갈만한 식당도 없어서 거의 룸서비스와 호텔 내 식당을 이용했는데 결제영수증을 볼 때마다 뜨끔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렸다. "여긴 호텔이야. 이 정도 가격도 예상 못했니?"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비싼 가격만큼 음식의 맛과 질도 흠잡을 곳 없이 훌륭했고, 직원들의 서비스는 더 훌륭했다.



처음 보는 엄청난 크기의 악기를 직접 연주해 주는 음악을 들으면서 식당에서 아이와 식사를 하면서 내 눈에 들어온 건 주변 사람들이었다.


내 주변만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유독 여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삼삼오오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굉장히 부유해 보였고 여유 있어 보였다. 하긴 평일 낮에 호텔 카페에 앉아서 대화를 나눌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면 최소한 사모님들 정도는 아닐까. 그들의 명품 가방보다 더 눈에 띈 건 어깨에 무심하게 툭 걸친 모피코트와 고급스러운 가죽의 부츠였다. 역시 부자들은 겨울에 더 티가 나나보다. 옷과 신발로 부를 과시하는구나.


나는 어쩌다 호텔 특가로 운 좋게 와있는 이방인이고, 그들은 꼭 숙박이 아니라 친구들과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흔한 만남의 장소일 뿐이라는 걸 짐작했다.

최대한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면서 나는 속마음으로 부러움을 삼키며 유심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은 나도 똑같은 서비스를 받는 고객이니까 너무 부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객실에서 서울시내 야경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고 다음 날 부지런히 아이를 깨워 조식을 먹으러 향했다. 나는 아침밥을 따로 챙겨 먹지 않은지 몇 년 되었다. 커피만 마시거나 가끔 간단한 견과류 정도만 먹는다. 그래서 아침에 뭔가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고 하루 종일 불편하다. 그러나 호텔에서만큼은 그 더부룩함을 각오하고 조식에 겸허한 자세로 임한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일어나자마자 거지꼴을 하고 간 조식뷔페식당에서 깔끔하게 차려입은 직원이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맞아준다. 테이블에 앉을 때는 옆에 와서 나와 아이의 의자까지도 직접 빼주었다.


마지막날 아침에는 창가 쪽에 앉아서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언제 또 이곳에 와서 식사를 할 기회가 있겠냐 싶어서 직원에게 창가 자리를 문의해 보았다. 처음에 꽉 차 있어서 아쉬운 대로 그 옆언저리 테이블을 잡았는데 몇 분 후에 직원이 와서 창가자리가 비었다며 조금만 기다려주면 세팅해 주겠다고 했다.

감사했다. 내가 무심하게 요청했던 사항을 잊지 않고 기억해서 들어줘서 고마웠다.







그렇게 마지막 날 조식은 눈 내리는 창밖의 뷰를 바라보며 즐길 수 있었다. 아이 챙기느라 제대로 즐기기 어려웠다 할 수 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누군가 종류별로 정성스럽고 맛있게 차려놓은 음식을 취향껏 갖다 먹기만 하면 되는 이 호텔 조식을 싫어할 사람이 대체 누가 있단 말인가. 특히나 살림하는 엄마들이라면 호텔에서 즐기는 편의시설 중에 최고봉은 아마 이 조식서비스가 아닐까.


평소에 아침을 먹지 않기에 맘먹고 입안으로 구겨 넣어보려고 해도 위장에서 받아들이는 한계가 있기에 준비된 음식의 절반의 절반도 못 먹었지만, 아이도 입이 짧아서 서너 가지 음식만 떠와서 오천 원어치 정도 먹은 것 같지만 아쉬워하지 않기로 한다. 내가 서비스받고 있는 건 꼭 이 음식이 아니라 직원들의 친절함과 미소도 포함되니까. 아침부터 내 기분에 맞춰 응대해 주는 사람이 평생 몇이나 있을까.



또 한 가지 놀라웠던 건 여기는 호텔 서빙 직원들조차 외국어를 능통하게 한다는 것이다. 관광업이라 당연한 거겠지만 식당 서빙하는 사람들이 언어능력을 갖춘 인재들이라는 게 새삼 신기하게 느껴졌다. 영어를 하는 사람들도 일본어를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이는 다른 나라 언어를 들을 때마다 우리말 아니라면서 신기해했다. 아직 해외여행을 안 나가봐서 다른 언어를 직접 접해보지 않아서인지 이것 또한 하나의 경험이 됐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꼭 우리말만이 소통하는 수단은 아니라는 걸, 세상에는 무수히 다양한 언어가 있고 외국어를 배운다는 건 살면서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깨닫는 동기부여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비록 아이는 우리말 습득과정도 순탄치 않아 언어발달지연을 겪었지만 그것이 먼 미래의 외국어 습득까지 가로막지 않기를 바라보면서.



호텔 직원들을 관찰하면서 느낀 또 한 가지는 아무래도 우리나라 사람들보다는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한층 더 온몸을 다해 친절함을 선보이는 듯했다. 일본 경제가 침체라고 하더니 내 바로 앞에 체크인했던 일본에서 온 중년의 여성분들은 최고층에 있는 스위트룸으로 예약한 듯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자신들이 일본인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시종일관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었다. 선진국에서 왔다는 자부심일까. 아니면 스위트룸 고객이라는 자부심일까. 아니면 그냥 여행 왔다는 흥분감에 신난 것뿐인데 내가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눈이 많이 왔던 날 새벽 호텔 직원들은 열심히 입구 청소를 했다. 마치 눈이 호텔 앞 도로에 0.1미리라고 쌓이는걸 허용치 않겠다는 태도로 열심히 쓸고 또 쓸었다.



제주 단독 주택 숙소에서 비가 오고 눈이 오던 날 느꼈던 쓸쓸함과는 괴리가 있는 풍경이었다. 호텔에 있으니 나의 안전을 위해 누군가가 계속 신경 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문득 나는 직원들의 멘탈이 걱정되었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이토록 친절하고 상냥하게 대해준다는 건 보통 에너지가 드는 일이 아니다. 하물며 우리는 가장 잘 대해주어야 할 가족들에게조차 친절하기 쉽지 않다. 되려 집 밖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집에서 몽땅 풀어내는 경우가 더 많다. 뒷담화를 하기도 하고, 짜증도 내고, 무뚝뚝하게 대하기도 하고. 엄마로서 늘 아이에게 예쁜 말투를 쓰자고 다짐하는 나이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아무리 고객이라고는 하지만 자신과 관련 없는 제삼자인 타인에게 이토록 배려심과 친절함을 베푼다는 건 자신의 지치고 힘든 속마음은 숨기고 어찌 보면 연기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식이고 연기라는 걸 알지만 일단 이런 서비스를 받는 사람은 기분이 좋고 행복감마저 느낀다. 이곳은 직원들에게 직장이니까 당연히 제공하는 서비스겠지만 이렇게 친절함을 쥐어짜서 일하고 나면 집에 가서 얼마나 피곤할까 걱정되었다. 남 걱정도 적당히 해야지, 나도 참 오지랖이다.


이유는 내가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 된 것 같기 때문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5성급 호텔을 찾나 보다. 돈을 좀 더 쓰고서라도 대접받는 듯한 그 기분은 더 많이 느끼고 싶을 것 같다. 매일 그런 대접을 받다 보면 정말로 내가 그럴만한 사람이라는 착각에 빠져 살 수 있을 것 같고, 정말로 내가 그런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고 믿어버릴 것 같다.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당장 정리해야 할 여행짐과 밀린 집안일 그리고 당장 남편과 아이 해먹일 저녁밥반찬거리를 고민해야 할 처지가 되어버렸지만 어쩐지 견딜만한다. 3일간 최고급 호텔에서 최고급 서비스를 받고 왔기에 그 행복했던 경험에 의지해서 당분간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견디고 살아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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