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는 사람의 부끄러운 민낯
명절에는 항상 시댁, 친정 양가를 방문하지만 시댁보다는 친정에 머무는 시간이 더 길다.
시부모님은 차례 지내고 정리가 대충 끝나면 얼른 친정에 가보라고 하시기에 시댁에 머무는 시간은 고작 몇 시간이다. 아무래도 둘째 며느리라서 덕보는 면도 없잖아 있는 것 같다.
친정에 이틀 정도 머물다 보면 오랜만에 엄마랑 대화를 길게 하게 된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연락이 끊긴 먼 친척들, 예전에 같은 동네 살던 사람들, 엄마와 친했던 지인들 등 엄마와 내가 같이 알고 있는 공통분모 안에 사람들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엄마의 친언니의 아들이자 나에게는 사촌오빠인 친척은 유수한 대학을 나와 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 박사 학위까지 있고 젊은 나이에 대기업 임원에까지 올랐다. 결혼한 언니도 사촌오빠와 같이 공부를 한 사람이라 아이를 낳고서도 꽤 오랫동안 연구원으로 근무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사촌오빠 부부의 첫 아이는 건강하지 못한 채로 태어났다.
정확히 진단받은 질환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태어날 때부터 제대로 걷지도,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한다. 일하느라 바쁜 아들 내외 때문에 이모가 늘 손주를 데리고 대학병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녔고 그런 이모를 보고, 친정엄마는 자신의 친언니가 장애를 안고 태어난 손자 때문에 고생한다고 말도 못 하게 속상해했다.
그렇지만 멀리 살기에 자주 못 보고 소식만 가끔 듣는 정도인데, 이번 명절에도 어김없이 그 사촌오빠 이야기가 나왔다. 그 손주도 지금은 많이 커서 중학생 정도의 나이가 되었지만 특수학교조차 다닐 수가 없어 집에서 병원으로 치료만 정기적으로 받으러 다닌다고 했다. 특수교사 선생님들이 한 번씩 집에 와서 수업을 해주기는 하지만, 제대로 학교 문턱도 받아보지 못한 채로 크고 있는데 아직도 스스로 걷고 먹는 것이 어려워서 엄마가 어렵다고 했다.
엄마는 조카손주의 근황 이야기를 나에게 전하면서 왠지 모르게 나에게 "그에 비하면 우리 손주는 학교도 잘 다니고 말도 어느 정도 소통이 되니 얼마나 다행이냐"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 사촌오빠네 이야기를 하면서 나를 위로하고 싶으신 것 같았다.
평소에는 엄마가 남얘기를 하면 우리 걱정이나 하자며 일축하던 나였는데, 이번만큼은 그런 엄마의 의도가 나에게 관통했다. 나는 위로를 받은 것이다.
"그래, 저렇게 1급 장애를 받아서 학교도 못 다니고, 제대로 된 일상을 누리는 것조차 힘든 아이도 있는데 내 아이는 그에 비하면 얼마나 나은 처지야." 하는 마음이 들고 말았다.
처음에는 사촌오빠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슬퍼하고 안타까워했던 우리 가족도 시간이 흐르고 몇 년이 지나가니 그 고통에 둔감해졌고, 심지어 그 이야기에서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며 위로까지 받고 있는 것이었다.
새언니가 해준 또 다른 이야기는, 쌍둥이를 임신한 한 지인이 출산 과정에서 잘못돼서 둘 다 거의 반불구로 태어나게 되어서 초등학교에 갈 나이인데도 누워서 지낸다는 것이었다. 제대로 걷기는커녕 백일 된 아기면 한다는 뒤집기조차 하지 못해서 누워만 살고 여태 기저귀를 하고 분유를 먹으며 연명한다고 했다. 건너 건너 들은 이야기라 정확한 상태는 알 길이 없지만 대충 듣기만 해도 부모가 얼마나 힘들지 안타깝기만 했다. 그 지인은 쌍둥이 이외에도 다른 형제도 있다고 하는데 제대로 케어하기 너무 어려워서 늘 힘들어한다고 했다.
명절에 가족들과 모였을 때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남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지만, 엄마도 새언니도 나를 위로하려는 일말의 목적이 있었던 것 같다.
"우리보다 훨씬 안타깝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도 있는데 너무 힘들어하지 말아라. 우리는 훨씬 나은 거다. 괜찮다."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자식의 장애로 힘겹게 살아가는 부모들 이야기에 안타깝고 속상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내 자식은 그 정도는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문득 그런 나에게서 역겨움을 느꼈다.
구토가 나올 지경까지는 아니지만 내 인간성의 비천함 같은 걸 느꼈다고나 할까.
나는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구나.
나보다 더 힘든 처지의 사람들에게서 위로를 받는구나.
그들에게 더 공감하고 위안이 되어주지는 못할망정 그 자식들보다 내 자식은 좀 덜 어려운 상황이니 그래도 내가 더 낫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란 인간의 도덕성과 인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인간은 끝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사는 거라지만, 그런 식으로 내 위로의 방식을 합리화하기에는 어쩐지 찝찝하다.
이건 불행한 사람들끼리의 서클 안에서 누가 더 불행하고 못났나 비교해서 우위를 점하는 꼴이다.
거꾸로 생각해 보면, 나의 처지를 보고 위로받는 사람도 있지 않겠는가.
"저 엄마 아무 문제 없이 잘 사는 줄 알았는데 자식이 저렇게 치료를 받으러 다닌다니, 역시 세상은 공평한가 봐."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주변 지인들은 대체로 다 호의적이고 좋은 사람들뿐이지만,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무조건적으로 좋아하고 지지하며 내가 잘 되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예전에 카페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치료받으러 다니는 발달센터에서 한 엄마가 "우리 아이는 경증이라 일시적거라 치료 좀만 더 달리면 금방 좋아져서 정상 발달 될 거예요"라고 했다고.
같은 발달장애라는 리그 내에서도 경증, 중증을 나누며 차이를 두려는 사람의 본성을 엿볼 수 있다.
나도 가끔 내 아이가 정식 장애 등급을 받을 정도는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인가,라고 생각한 적이 있으니까.
내 인간성을 좀 더 연마하고 싶다.
앞으로는 남의 불행으로부터 위로부터 받고 마는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 그를 위해 진실된 마음으로 기도하고 축복해 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드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마도 나는 천성이 늘 타인을 위하는 천사 같은 사람이 못 되는 인물이라서 그런 마음은 후천적 노력으로 갈고닦아야 하나보다. 그런 나 자신이 안타깝지만 이제라도 어떻게든 노력해서 조금씩 만들어나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