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페르소나 이야기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대학 동기모임이 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나는 이 모임에 한 번 참석하는 것도 나에게는 엄청나게 큰 일이었다. 다들 다른 지역에 살기 때문에 서울에서 모이는 것이 가장 나은 선택지였는데,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모임에 참석하고자 하면 나는 아침부터 하루 온종일 시간을 내야 한다.
하지만 남편은 아예 육아를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고, 돌봄 이모님도 몇 시간 정도는 가능하지만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하루 온종일 봐달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려웠다. 차라리 유치원 다니던 시절에는 아침에 등원시키면 오후 늦게 데리러 가도 되니 시간 내기가 더 수월했는데 초등학생이 돼버린 지금은 더 내 시간을 내기 어려워졌다.
여름에 있었던 모임에는 결국 참석하지 못했다. 서울 한 호텔에서 애프터눈티를 예약하고 먹기로 했는데, 기대도 참 많이 했는데 아쉽게도 나만 갈 수 없었다. 아이를 키우는 다른 친구들은 남편이나 친정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나만 예외였다. 나는 어찌 됐든 하루에 6-7시간을 자유롭게 외출할 수 없는, 아이에게 매인 몸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이번 모임에는 고맙게도 친구들이 내가 사는 지역으로 와주기로 했다. 덕분에 일 년 만에 친구들 얼굴을 볼 수 있었고 나는 무척 설레었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 학교 다니던 시절에 편하게 지냈던 친구들의 존재가 무척 소중하게 느껴진다. 나의 20대 초반, 차마 말로 꺼내기 부끄러울 정도로 철없는 행동을 일삼던, 알코올이 인간을 얼마나 우스운 존재로 만들 수 있는지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던 그 시절을 함께 공유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건 복 받은 일이다.
아직도 마음은 그때 그 시절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은데 어쩌다가 훌쩍 이렇게 세월이 지나버린 건지 참 덧없다고 느껴지지만.
나는 대기업 임원이라든지 고위 공무원직이라든지 하는 내로라할만한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아이 키우느라 휴직 중인 전업주부의 포지션에 있는 그저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몇 개의 사회적 페르소나는 필요하다. 얼마 전부터 페르소나라는 말이 유행인 것 같았지만 직접 즐겨 쓰는 말은 아니었는데, 이번에 심리학 책을 읽으면서 친근하게 다가왔다.
전업주부로 지내면서 자연스레 친하게 지내는 동네 엄마들 무리가 있는데 각 무리마다 특유의 분위기가 존재한다. 나는 약 세 개 정도의 무리에 속해있는 것 같다. 그분들도 나를 무리의 한 일원으로 인정해 준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한 무리는 아이들 놀이터에서 자주 만나면서 친해졌는데, 모두 성격도 무난하고 많이 배려해 주고 잘 챙겨주는 사람들이다. 만나면 하는 이야기들은 매번 비슷하다. 아이들 학습지 숙제를 매일 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좀 어려운 수학 문제집을 풀렸다가 좌절한 이야기, 오늘 저녁밥 메뉴는 또 뭐로 해야 하는지 반찬 걱정, 남편과 시댁 이야기나 즐겨보는 드라마와 예능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전업맘들이 정말 평범하게 자주 나눌 것 같은 수다 소재들이다. 드라마나 예능을 즐겨보지 않는 나는 가끔 이야기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서 미안하기도 한데 그럴 땐 그저 조용히 듣기만 한다.
그리고 아주 가끔 유치원 선생님이나 학교, 학원 선생님에 대한 불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는데 그때에는 더 조용히 있는다. 학교 교사를 욕하는 일은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고,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오죽하면 그 선생님이 애한테 그랬을까"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나는 철저히 학부모이자 엄마의 입장에만 머무르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럴 땐 그냥 고개를 끄덕이거나 간단히 동의하는 처마나 하고 만다. 아무튼 가장 주가 되는 이야기는 아이들이다. 이 모임에서 나의 페르소나는 그냥 평범한 동네 아줌마다. 나 나름대로 그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애쓰는 편이다.
또 다른 무리는 내가 가장 애정하는 센터 엄마들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친하지 않았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의무적으로 센터 대기실에서 만남의 시간을 가지다 보니 오래 보면 정든다고 부자연스럽지 않게 서로에 대해서 조금씩 천천히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강력한 공통분모도 지니고 있지 않은가. 바로 아이들이 발달상의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 각자 정도도 다르고 그 분야도 양상도 조금은 다르지만, 어찌 됐든 경계성 발달 장애라는 공통점을 가진 우리는 서로를 위로하기도 하고 같이 신세 한탄을 공유하기도 하면서 점점 더 의지하고 있다. 실제로 이 모임은 나에게 힘이 많이 된다. 아이도 센터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자신감 있어 보이고 정서적으로도 편한 모습을 보여준다. 아직 일반적인 또래 아이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워하는 아이지만 이 친구들에게만큼은 자기 본연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 같아 고맙기도 하다.
그리고 두 분 다 어찌나 부지런하고 아이에 대해서 많이 공부하고 걱정하면서도 여러 방면으로 알아보고 실천하면서 노력하시는지 배울 점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그 엄마들을 보면서 나도 자극을 받고 아이를 위해 더 이런저런 노력을 해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엄마들인데, 원하지 않은 아이의 발달 장애로 보통 엄마들보다 더 강도 높은 스트레스와 우울 증상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 나의 페르소나는 아픈 아이를 키우는 엄마다. 내가 가진 몇 안 되는 페르소나 중에서 가장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고 말해도 무방한데, 이 페르소나를 가감 없이 아무런 제재를 거르지 않고 편하게 내보일 수 있어서 마음이 참 편하다. 다른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 모임에서 보여주기 어려운 내 깊은 속마음들을 아무런 계산 없이 말할 수 있어서 행복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내가 조심하는 부분이 있으니, 조금 더 소통에 어려움을 가진 아이 엄마를 대할 때 더 말조심을 하려고 노력한다. 내 아이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해내고 있는 발달과제나 나의 걱정거리가 그 엄마에게는 조금 더 나아 보이는 내 아이의 모습이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운데, 나 나름대로 의식적으로 조절하려고 애쓴다.
또 다른 모임은 아주 가끔 만나는 엄마들인데 굉장히 교육열이 높은 사람들이다. 현재 본인 직업을 가진 엄마도 있고 아이 낳기 전에 교육계에 종사한 엄마들도 있고, 발레 전공이었던 분도 있다. 남편들 직업도 전문직이라 그런지 더 교육에 관심이 많다.
하지만 초등학교 예비 2학년인 현재 아이들 기준에서 교육열이 높다고 함은 거의 영어 교육으로 귀결된다. 지금 아이들의 영어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어느 어학원 어떤 레벨에 속하는지가 가장 주된 관심사다. 하긴 초등학교라서 아직 학교에서 정기고사를 치르는 것도 아니고 수학은 1, 2학년에서는 연산 정도만 잘해도 되는 쉬운 단계이니 영어실력이 주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 동네가 학군 지는 아니라서 영어유치원을 끼고 있지는 않지만 유치원 때부터 어학원이 딸린 곳으로 보내고 꾸준히 엄마표와 학원 공부를 병행해 온 아이들은 지금 상당한 수준까지 올라온 것 같았다. 그 엄마들은 서로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부분도 많고 공감대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나는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나는 아이가 언어발달지연 진단을 받으면서 영어와는 아예 담쌓고 있기 때문이다. 3,4세였을 때 아이를 바이링구얼로 키워보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영어노출이랍시고 노부영이며 각종 영어동화책과 CD를 주문해서 열정을 내뿜던 시절을 처참하게 후회했다. 그 시간에 아이랑 더 몸으로 놀아주고 우리말로 더 깊게 상호작용하려고 노력해 볼걸. 그랬다면 아이가 언어가 느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좀 더 일찍 알아채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말이다.
아무튼 우리말도 제대로 안 터져서 언어치료를 다니는 주제에 영어 교육은 언감생심이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 어느 정도 사람다운 말을 하게 됐다고 느껴진 최근에 이르러서야 학습식으로 파닉스 좀 시작하고 있는 수준이다. 이 엄마들에게 초1에서야 파닉스 어설프게 시작했다고 하는 건 거의 죄악시되는 분위기다. 그래서 아예 말도 안 꺼내고 조용히 듣고만 있다. 영어 좀 한다는 아이 중에 이번에 주니어토셀 시험을 본다고 하는데 그 말을 들은 다른 엄마들은 충격과 자극을 동시에 받은 모양이었다.
내 아이도 못하는 것만 있는 건 아니니 그나마 좀 한다고 말할 수 있는 한자자격시험 준비나 피아노대회 준비 이야기가 나올 때는 나도 대화에 적극적으로 끼어들만한 자격이 되었다. 이 모임에서 나의 사회적 페르소나는 아이 교육에 관심 많은 교육열 높은 엄마다. 사실 나도 아이의 발달장애만 없었다면 이 페르소나가 그냥 나 자신의 본모습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아이의 어려움을 인지한 후에도 남편과 나는 아이의 학습능력에 대해서는 아직도 기대를 갖고 있고,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보란 듯이 명문대에 입학해주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희망을, 우리 둘 다 내색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품고 있는 듯하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영어 교육에 관심이 있는척하며 어학원 레벨별 반편성에 대한 이야기나 원어민 관리 시스템 등에 대해서 귀 기울여 들었다. 그러지 않는다고 해서 이 모임에서 퇴출당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게 나의 의무처럼 느껴졌다. 교육열 높은 엄마들과 만나고 오니 드는 생각은, 이미 우리 아이들이 한 줄 세우기식 치열한 경쟁무대에 올라서있는 듯한 느낌이다. 15년생 예비 초2 아이들을 능력별로 한 줄로 세운다면 우리 아이의 위치는 어디쯤일까 생각해 보았다. 언어지연과 사회성 부족으로 인해 센터 치료를 받고 있는 처지이니 경쟁줄 세우기는커녕 애초에 경쟁에서 도태된 외딴 줄을 만들어 따로 세워야 하는 걸까.
휴직 중이니 직장 생활에서의 페르소나는 연기할 필요가 없으니 그에 따른 피로도는 확 줄어든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여기에 직장인이라는 페르소나까지 추가된다면 더 힘들어지리라. 일할 때 나는 성격 좋은 척, 사람 좋은 척, 같이 어울리기 무난한 인간인 척, 일 야무지게 잘하는 척,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일만한 도덕적인 인간인척 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가. 생각해 보면 이 역할을 벗어던졌을 때의 내 모습은 직장에서와는 전혀 딴판의 허물 많고 덤벙대는 인간일 뿐인데.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기 친구들과의 만남에서는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나마 가장하지 않아도 되는, 있는 그대로의 나의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줘도 되는 친구들이다. 흑역사라 칭할만한 내 못난 어린 시절을 알고 있어서, 젊으니까 용인 가능했던 숱한 실수들을 지켜봐 주던 이들이라서 지금 나에게 주어진 역할과 의무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물론 이 친구들 앞에서도 약간 의식해서 행동해야 하는 부분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일단 편하다. 어떤 주제의 대화가 나오든 관심이 있으면 듣고, 아니면 조금 주의가 흩트러져도 아무렇지 않다.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들이라 코로나가 완화되면서 몇 년간 묶여있던 한을 풀어내듯 다들 방학기간을 이용해 해외여행을 다녀온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것이 자랑으로 들리기보다 나에게는 나는 못하는걸 친구들이라도 해봐서 대리만족할 수 있다는 느낌이었다. 친구들이 해주는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 생각지도 못한 황당한 실수로 인해 벌어진 해프닝, 생애 첫 비즈니스석 경험들이 재밌게만 느껴졌다.
집에서 아이만 돌보면서 제대로 된 레스토랑이나 브런치 식당, 예쁜 카페를 가본 적도 정말 오래되었는데 다들 양식을 좋아하는 친구들이라서 위시리스트에만 있던 브런치카페도 가보았다. 남편과 아이를 데리고 꾸역꾸역 그런 레스토랑에 가도 되지만 갔다 오면 파스타와 샐러드로 배가 덜 찬다며 따로 밥을 챙겨 먹는 가족들을 보고 있자니 아예 처음부터 한식위주로 공깃밥이 제공되는 식당에서 외식을 하는 편이다.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나와 이야기가 잘 통하는 어른 친구들과의 만남을 못한 지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다. 결혼 전에는 언제든 할 수 있는 당연한 거였는데, 나이가 들고 주어진 삶의 의무에 치이다 보니 그 당연한 것들이 사실은 참 귀하고 소중한 것들이었음을 깨닫는다.
단 몇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너무나 행복했고 귀했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가장 나 자신에 가까운 페르소나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행복이다.
인간적인 단점이나 실수도 있는 그대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사람들에게 드러낼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사람들도 나에게 높은 도덕적 잣대를 갖다 대지 않아요.
즉 페르소나와 나 자신을 완전히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이미지에도 어느 정도 맞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면은 사기를 치기 위한 가면이 아닙니다.
배우가 자기 역할을 연기하듯이 나도 내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 역할의 가면을 쓴다고 생각하면 돼요.
자신 안에 있는 여러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통합적으로 자기를 인식하는 데에도 도움이 됩니다. 또 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때도 떳떳하고 자연스러워집니다.
<힘들어도 사람한테 너무 기대지 마세요, 정우열>
최근에 읽은 책에서 페르소나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나의 사회적 페르소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 동네 엄마들과의 모임 이외에도 딸, 며느리, 아내, 엄마 등 내가 수행해야 할 페르소나는 꽤 여러 가지였다. 나같이 내세울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연기해야 할 역할이 꽤 많다는 사실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페르소나라는 말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간단하게 생각하면 자식에게조차 내 본모습을 보이면 곤란하다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나는 어린 한 생명체의 양육을 책임지고 있는 엄마이기에, 이 어린아이를 올바른 성인으로 키워낼 의무가 있다. 그러자면 내 본성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원래 타고나게 생겨먹은 성격대로 아이를 대하면 큰일 난다. 화가 나도 참고, 인내심을 갖고, 어느 정도 모범을 보이려는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야 내가 낳은 자녀를 사회에 부끄럼 없이 내놔도 될만한 인성과 시민의식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시킬 수 있다. 아이만 없다면 화가 나면 나는 대로, 남편과 한 판 크게 할 말 못 할 말 다 싸지르면서 싸울 것 같은데, 그것조차 참아야 하지 않는가.
나에게 주어진 페르소나를 적당히 잘 해내되, 너무 그 역할에 몰입되어 그 페르소나가 오롯이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휩싸이지 말아야겠다. 그것들은 그저 내 안에 있는 여러 모습들 중 하나이고, 진정한 내 모습은 나만 알고 외면하지 않고, 잘 인식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