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육아 도전기
책육아에 관한 책을 몇 권 읽고 나서부터 나는 열심히 중고 전집을 검색해서 몇 질 들이고, 거실 책장을 꽉 채우고 있던 보드게임과 각종 레고와 장난감들을 일제히 정리해서 한 곳에 몰아넣고 그 빈자리에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으로 채워두었다.
엄마의 역할 중 하나는 "환경구성가"라는 말이 굉장히 와닿았다. 책을 즐겨 읽는 아이로 만들려면 우선 가까이손 닿을 거리에 언제나 꺼내서 볼 수 있는 책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응당 책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책이 방에 있든, 손에서 뻗기 어려운 곳에 멀리 위치해 있든 가서 알아서 꺼내볼게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내 생각이 좀 안일하고 게으른 발상으로 느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책을 좋아하고 즐겨 읽는 아이는 없다는 말이 맞다. 타고난 지능이나 성향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독서습관에 관해서는 집안환경과 가정분위기에 의해서 좌우되는 면이 크다는 것은 반박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아이가 어려서부터 거실에 TV를 놓지 않는 것이 몇 안 되는 나의 집 인테리어 철학 중 하나여서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실에 TV는 없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을 책과 순진한 놀이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건 다만 TV만이 아니다. 우리 어렸을 때야 TV가 바보상자라고 해서 많이 보면 바보 된다는 인식이 있었지, 요즘처럼 아이패드, 노트북, 스마트폰과 같은 넘쳐나는 스마트기기로 유튜브와 넷플릭스, 온라인게임 같은 아이를 유혹하는 놀거리가 가득한 세상에서는 차라리 아이가 건전하게 TV만화라도 봤으면 하는 게 바람이 되고 만다.
아이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거실에 책을 많이 비치해 두고, 남편에게도 본격적으로 책육아를 시작할 것임을 선포하고 협조하라는 암묵적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갑자기 아이에게 책 좀 보자고 해도 아이는 쉽사리 엄마의 노력에 부흥하지는 않았다. 베드타임스토리로 하루에 한 두권 정도 자기 전에만 읽던 책을 뜬금없이 낮에 읽자고 제안하니 아이는 당황하는 것 같았다.
목이 아파도 매일 아이와 함께 자기 전에 두세 권 정도의 책은 열심히 읽어줬기에 나는 아이가 "읽기 독립"이 된 줄 알았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읽기 독립이란 "아이가 스스로 책을 꺼내서 누가 읽어주지 않아도 혼자 조용히 속으로 읽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는 아직 읽기 독립이 되지 않은 것이다.
초등학생 정도 되면 그림이 많이 줄어들고 글이 많아진 문고판 형태의 책을 읽어야 한다기에 들여놓은 건 있지만 아이는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한글은 잘 읽을 줄 알기에 내용만 재미있으면 곧잘 읽을 줄 알았다. 재미있을 것 같으니 좀 읽어보라고 권하니, 너무 길어서 어렵다고 싫다고 했다. 아직 그림이 많이 없는 호흡이 긴 스토리의 책은 읽을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아이의 독서에 관한 현상태를 파악하고 나는 조금 절망했다. 그냥 수준을 많이 낮춰서 단순하고 재미있고 그림이 주를 이루는 유아용 전집이라도 읽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집에 책이 꽤 많다고 생각했는데, 순전히 그건 나의 착각일 뿐 유아동 전집은 세계는 무궁무진했다. 책육아 좀 한다는 사람들의 블로그나 SNS를 가보면 우리 집 책장의 열 배는 가뿐히 뛰어넘는 양의 책을 구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전집 몇 개를 들이고, 아이와 도서관 나들이도 해보고, 은근히 아이 옆에 흥미끌만 한 책을 놔둬봐도 학습만화책만 열심히 보는 아이는 관심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반강제 독서 방식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한 번 로블록스 게임을 허락해 주는데 게임을 하려면 무조건 책을 5권 읽어야만 시켜주겠다고 엄포를 놨다. 책 5권이라고 해봐야 거의 그림책 위주라 한 페이지에 문장 하나 정도라서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양이다. 그마저도 아이는 하기 싫다고 울고 떼를 썼지만 나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이가 영영 책에서 멀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이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고 싶은 게임을 하기 위해 책을 억지로 읽었다. 본인이 읽고 싶은 책 5권을 들고 와서 소파에 앉아 조용히 속으로 책을 읽도록 했다. 비록 반강제로 읽기는 하지만, 책을 읽을 때만큼은 집중하는 것 같았다. 언어력이 아직 부족해서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잠깐의 시간이라도 혼자 책을 읽는 모습이 어찌나 예쁘던지.
시각적 자극에 약하고 문자 집착이 심해서 한 때는 책을 아예 집에서 없애야 하나 고민도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이제 초등 시기가 되고 보니 늦어진 언어능력을 끌어올리는 데에는 책 읽기만 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가장 아이의 발목을 잡고 있는 화용언어 측면도 책에서 나오는 등장인물 간의 대화를 읽다 보면 도움이 될 것이고, 상황인지와 타인에 대한 인지 부족으로 겪는 어려움도 인물들 간의 갈등과 화해를 주를 이루는 내용을 접하다 보면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게임하고 싶어서 책을 억지로 읽는 아이러니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 잠깐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꼭 사진을 찍게 된다.
항상 동화책을 내가 읽어주기만 했지, 아이와 내가 각자 자기 책을 읽어본 적은 없었다. 처음으로 식탁에 앉아 각자의 책을 읽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싶었다. 왜 진작 이런 생각은 해보질 않은 건지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시도해 봐서 다행이긴 하다.
아이에게 읽을 책을 몇 권 가져오라고 하고 나도 내가 읽을 책을 꺼내 들었다. 웬일인지 남편도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내와서 자리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이 남자랑 결혼하고 나서 책 읽는 모습을 본 건 거의 처음이다. 항상 퇴근하고 오면 아이랑 좀 놀아주다가도 틈만 나면 핸드폰을 손에 쥐고 사는 사람이었다. 독서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책을 가까이하고 자주 읽으려는 나와 달리 학창 시절 너무 공부를 많이 해서 책에 질렸는지 아예 독서와는 담쌓고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남편을 보면서 나는 책 안 읽어도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잘 살 수 있는데 나는 헛수고를 하고 있나라는 생각까지 한 적이 있다.
그런 남편이 아이를 향한 내 노력에 일말의 자극이라도 받은 건지 책을 읽기 시작했고 엄마, 아빠가 식탁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을 본 아이는 자기도 별 말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말 놀라운 순간이었다. 나와 남편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아이의 모습에 적지 않게 놀랐음을 공유했다. 이런 게 바로 부모가 본을 보이는 건가 보다. 엄마, 아빠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아 책을 보고 있으니 자기도 별수 없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아이는 부모가 보여주는 그 모습 그대로를 보고 배우고 받아들인다는 명제를 몸소 깨달은 순간이었다. 부모가 소파에 드러누워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말은 책 좀 보라고, 학습지 숙제나 좀 하라고 하면 동기가 생길 아이가 몇이나 될까.
그날 이후로 웬만하면 저녁 먹고 나서 잠들기 전에 10분 정도 둘러앉아 책을 읽는다. 더 오래 읽으면 좋겠지만 아직은 아이의 집중력이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기에 더 큰 기대를 하지는 않기로 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나에게는 정말 힐링이고 치유가 되는 느낌이다. 아이가 제대로 책을 읽고 있는지 한 번씩 곁눈질하긴 하지만 나는 나대로 책에 빠져서 읽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남편도 내가 그렇게 수십 권씩 사다가 읽어대던 ADHD, 발달장애 관련 서적으로 거들떠도 보지 않더니 어제는 처음으로 꺼내와서 읽기 시작했다.
나 어렸을 적 우리 엄마, 아빠가 집에서 이런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나는 어땠을까. 나는 책을 즐겨 읽지는 않았지만 방학 때나 시간이 넘쳐날 때 심심하면 혼자 아무 책이나 꺼내서 푹 빠져 읽던 기억이 있다. 그때 읽었던 책들이 내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집에 책이 많았던 것도 아니고 부모님이 앞장서서 책을 읽는 집안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 저녁 자식들은 방에 들어가서 공부하라고 해놓고 부모님은 방음이 잘 되지도 않는 집에서 TV 소리가 들릴 정도로 켜놓고 보기 일쑤였다. 나는 엄마, 아빠가 보는 TV가 뉴스가 됐든 드라마가 됐든 너무 보고 싶어서 공부에 집중이 되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어찌 생각해 보면 부모로서 그것만큼 이기적인 행동이 있을까. 내 부모님도 일부러 자식들을 힘들게 하려고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그런 행동이 자녀들 학습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면, 만약 우리 앞에서 책을 읽고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나는 지금쯤 훨씬 더 나은 인간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시민 작가님과 같은 지식인이라 불릴만한 사람들이든 빌 게이츠 같은 성공한 사업가든 모두 어렸을 적 어떤 경로로든 책을 굉장히 많이 읽은 다독가라는 공통점이 있다.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사지선다형 객관식 문제 풀이에 능해 우리나라 교육 입시에서 성공해 훌륭한 학벌을 가지는 것도 부모의 꿈이자 양육 목표가 될 수 있겠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기를 바라는 게 대다수 부모의 바람이지, 그 반대인 사람은 거의 없을 거라고 본다.
그러나 요즘 나는 아이의 미래에 대해 조금 다른 바람이 생겼다. 책을 늘 가까이하고, 깊이 있게 읽고, 스스로 생각해서 세상 만물을 판단할 줄 아는, 자기만의 철학을 가진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정보와 지식이 쏟아지고 저마다 특출 난 전문가가 판치고 있는데, 무분별하게 남이 주장하는 진실이라는 것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만의 관점과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선별하는 능력을 지녔으면 좋겠다. 그러한 능력을 키워주는 데에 독서만 한 대안은 아직 없는 것 같다.
이제 막 책육아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주제에 이런저런 말을 늘여놓을 자격은 없지만, 남편까지 지원사격을 나서 주니 앞으로 천천히 조금씩 변화가 시작되지 않을까 싶다.
아직은 게임하고 싶어서 반강제로 책을 읽는 순간이 더 많지만, 조금씩 역전해 가기를, 변화가 생기기를 욕심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