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의 차이일까 아니면 나의 방어기제일까
아이는 어려서부터 한 가지에 꽂히면 무섭게 그것에만 파고드는 경향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런 성향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도 있고, 한 가지라도 파고들어서 잘 아는 게 있어서 다행스럽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유아기 시기의 어린아이라면 너무 한 가지 영역에 심하게 꽂혀서 하루종일 그것만 들여다보고 있는 일은, 자칫 발달상의 문제를 의심해 볼 수 있는 양상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뒤늦게라도 깨달아서 검사와 치료에 들어가긴 했지만, 조금 더 내가 예민하게 아이의 그런 특성을 바라봐주었다면 더 신속하게 조기개입을 해서 치료 결과도 훨씬 나아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항상 남아있다.
발달장애, 자폐 스펙트럼, ADHD와 같은 소아정신과적 어려움을 가진 아이들에게는 "집착총량의 법칙"이라 불릴 수 있는 특성이 있다. 뭔가 한 가지에 심하게 꽂혀서 그것 하나만 하루종일 보고, 갖고 놀고, 그것만 이야기하는 행동양식이다.
내 아이도 한자, 흔한 남매, 코딩 등 다양한 집착 대상을 두루두루 거쳐 왔는데, 요즘 심히 꽂히신 분야는 수학 학습만화와 교통신호등이다. 사거리 도로에 있는 신호등의 작동 체계를 운전을 할 줄 아는 나보다 더 잘 알아서 언제 이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차 안에 내 옆 좌석에 앉아서 곧 신호 초록불로 바뀌니까 핸드폰 들여다보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면서 내 안전운전 도우미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어서 이 "신호등 집착"은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문제 행동의 관점으로 보면 문제 행동이지만 딱히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남들 붙잡고 신호등 얘기를 줄줄이 늘어놓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 학습만화는 좀 심각하다. 한두 권에서 시작한 학습만화가 아이의 요구에 부흥하느라 시리즈물을 차곡차곡 사 모으면서 수십 권이 되었는데, 아이는 그 한 권에 한 권에 나온 내용을 거의 다 외우다시피 할 정도다. 이 만화책 지은이가 보면 아주 감동받을 정도로 대사 하나 하나와 나오는 수학, 도형 관련 퀴즈들은 다 섭렵했고, 외운 문제들을 끊임없이 나에게 반복해서 물어본다. 교과서적인 수학 지식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학습적인 면과 동떨어진 황당무계한 내용은 아니라서 그냥 놔두는 편이긴 한데 너무 하루종일 수학 퀴즈를 내는 통에 울며 겨자 먹기로 암산 연습을 할 정도다.
어려서부터 숫자나 기호 습득이 굉장히 빨랐고 예민해서 혹시 영재가 아닌가 은근슬쩍 기대한 적도 있지만, 발달 검사를 받고 치료를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런 마음은 진작에 접었다. 자기 아이가 영재일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마는 흔한 부모 중에 한 명이라는 씁쓸한 사실만 확인했다. 거기에 더해서 검사 결과 정상 범주에도 들지 못하고 언어지연 결과까지 나왔으니, 영재는 커녕 발달 장애라는 현실을 마주한 꼴이었다.
인지 수준이 나쁘지는 않아서 학교 수업도 그런대로 따라가는 편이고, 학교 선생님도 영리하고 똑똑하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나는 이미 아이의 결핍을 알고 있기에 착각하지 않으려고 경계하는 편이다.
의학적 기준으로 아이는 주의력이 결핍되고 언어 습득이 늦어져서 사회성 발달 저하와 그에 따른 정서 발달 지연과 자존감 하락 문제까지 발생한 정상기준에 못 미치는 아이일 뿐이라고 나 자신에게 되새김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모이고, 아이의 엄마이기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고 노력하고 있다. 세상의 기준으로는 부족한 아이지만 그건 세상의 기준일뿐, 아이 자체가 부족한 건 아니라고 그저 개성이 뚜렷하고 자기만의 세상이 좀 강할 뿐이라고, 또래와의 사회성 따위 근대 산업발전 이후 학교가 생겨나면서 발생한 억지스러운 개념일 뿐, 개나 줘버리라고 생각한 적도 많다. 게다가 내가 읽은 발달 장애 관련 서적이나 육아서에서는 장애아의 부모가 무조건 더 밝고 긍정적이어야 한다고 그게 의무라고 쓰여 있었다.
안 그래도 애가 느려서 답답하고 미칠 것 같고 우울증이나 안 걸리면 다행인데 이게 무슨 dog소리인가 싶었지만, 아이 스스로도 본인이 왜 느린지도 모르고 친구들과 어울리기는 어렵고 표현은 못하지만 우울감과 스트레스가 있을 테니 부모마저 거기에 함몰돼버리면 끝도 없는 나락에 빠지게 되는 건 사실이다.
당장 아이를 보면 힘들고 눈물만 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자주 웃어주고 기분 좋은 일들을 만들어주고 화목한 가정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게, 발달의 어려움이 있는 아이가 더 힘들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이다. 지금도 이 부분이 가장 실천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웃으니까 웃긴 일이 생긴다는 말이 맞는지, 아이랑 바보같이 엉터리 춤을 추거나 억지 장난이라도 걸어서 한바탕 웃고 나면 확실히 더 낫다.
그래서 아이가 학습만화에 집착해서 매일 수학 퀴즈를 내는 것도 최대한 받아주고 들어주면서 좋게, 긍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한 달에 한 번씩 약 처방을 위해 가는 병원 원장님께 이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받아주는 게 좋을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아이가 상황인지가 부족하고, 타인에 대한 인지가 약해서 그래요.
내가 관심 있고, 재미있는 분야는 다른 사람도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중심적이라서.
수학 퀴즈 같은걸 계속 물어보면은 엄마, 아빠가 어느 정도까지 적당한 선에서는 받아주다가 이제 엄마 바쁘니까 여기까지만 하자라든가, 오늘은 몇 번까지만 하고 그만하자고 좋게 말로 설명해 주면서 일정선에서 제한시켜 주세요. 그래도 이런 수학 관련 학습만화를 보는 것이 나쁜 건 아니에요. 학습만화도 보면서 사고력을 증진시킬 수도 있고 긍정적인 면도 있으니까 너무 못하게 하지는 마시고요."
원장님의 설명을 들으니 굉장히 수긍이 가고, 일단 마음이 놓였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인지"가 약한 아이의 특성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행동이니 그런 부분을 이해해 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습만화도 집착이 심해서 걱정스러웠는데 좋게 말해주시니 너무 걱정하지 말기로 하자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옆에 같이 진료받으러 간 아이가 나와서는 "나도 원장님 말에 백 퍼센트 동의야. 학습만화 괜찮다잖아."라고 하기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내가 너무 많이 본다고 뭐라고 하는데 원장님이 자기편을 들어줘서 기분이 좋았나 보다.
진료를 받고 나오는 길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한층 더 가벼워졌고 왠지 모르게 긍정적인 기분이 솟구쳐 올라서 힘이 났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 발달센터에서 사회성 그룹 수업이 있었는데, 센터 선생님의 의견은 매우 달라 보였다. 여느 때처럼 수업하고 나와서 피드백을 주시는데, "아이가 언제부터 저렇게 수학 퀴즈에 집착했나요? 다짜고짜 친구들이랑 선생님한테 자꾸 수학 문제를 내더라고요. 이거 그냥 이렇게 행동하도록 놔두셨어요?"
나는 당황했다. 오전에 병원 진료에서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해서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여기서는 다시 이 문제가 심각한 문제 행동이라고 여겨진 것이다. 나는 당황하면서 최대한 침착하게 원장님께 들은 말과 아이의 집착에 대한 특성을 말하면서 적당히 제한시키려고 노력 중이었다고 말했다.
"친구들한테까지 이러면 다들 관심 없는 거니까 싫어할 수도 있는데 아이가 다른 친구들이 관심 없다는 걸 모르니까 조절해 주셔야 될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 나름 친절하게 해결방안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려고 했다. 사실 그 해결법이라는 것도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 늘 그렇듯 부모가 이러이러하게 자제시키고 노력하라고 말하고 끝이다. 센터 피드백은 항상 엄마 숙제가 된다.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데 마음이 굉장히 무거웠다. 병원에서 뭔가 홀가분하게 느껴졌던 그 기분이 온데간데 사라지고, 아이의 수학 퀴즈 무한 반복이라는 특성이 또다시 문제행동으로 불거져서 고치고 소거시켜줘야 할 숙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많은 부모가 동의하겠지만 자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 하지 말라고 그만하라고 적당히 하라고 타이르고 좋게 설득해도 쉽사리 고쳐지지 않는다. 특히 내 아이 같은 특성을 가진 아이들은 더더욱.
좋게 바라보면 아이가 수학을 좋아하고 잘해서 그런 건데, 좀 긍정적으로 바라봐주면 안 되나?
괜히 센터 선생님께 원망의 마음이 생긴다. 굉장히 친절하고 밝은 분들이 시라 아이들과 관계 형성도 잘 되어있고 수업도 다양한 방식으로 아이들 수준에 맞춰 잘해주시는데도 발달센터의 특징이 그러하듯 부모에게는 아이가 지금 부족한 점, 어려운 점, 고쳐야 할 점들을 이야기해 주는 데에 집중한다. 늘 잘하고 있다고 칭찬만 해주는 것도 발전이 없을 테니 도움이 안 될 거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이번에도 아이의 결핍에 대해서 듣고 오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애가 나중에 수학 영재가 될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소거시켜야 한다니? 이런 얼토당토않은 생각까지 하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같이 센터에 다니는 엄마는 아이가 수학을 너무 잘해서 깜짝 놀랐다고 칭찬해 주라고 하는데, 잘하는 게 아니라 그냥 집착이에요라고 대답했다. 사실 수학 경시대회에 나간 것도 아니고 심화 문제집을 척척 다 풀어내는 것도 아니니 수학을 잘한다고 말하는 것도 무리수다.
문득 궁금해졌다. 이건 관점의 차이일까 나의 방어기제일까.
정신건강의학과 원장님은 괜찮다고, 큰 문제가 아니니 적당히 봐가면서 조절해 주면 된다고 했는데 센터 선생님은 문제 행동이니 신경 써서 소거시켜 주라고 하는 상반된 입장을 듣고 나니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의 똑같은 행동을 바라보는데 왜 두 분은 관점이 이다지도 다른 걸까.
의사 선생님은 정신과적 질환을 가진 환자들을 워낙 많이 보는 터라 내 아이 정도의 증상은 경미하다고 보기에 괜찮다고 해주는 걸까? 센터 선생님은 아이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높아서 좀 더 잘해주기를, 좀 더 정상 발달의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러는 것일까?
별 생각이 다 든다.
문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심각한 문제인 것 같고,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면 또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이렇게 고민한다고 해서 당장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오늘도 고민만 깊어가는 중이다.
그래도 나는 부모이고, 엄마니까 아이가 보여주는 모습을 문제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동안 여태 그래왔듯 이것도 한 때이고 또 지나갈 거라고 여기고, 아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거니까 억지로 억제시키지는 않기로 한다. 내 마음의 평안을 위해 나중에 수학 영재가 되려고 저러나 보다 하고 그냥 착각 속에 살아보련다.